문제는 선진국 금융시장이다

노동사회

문제는 선진국 금융시장이다

admin 0 3,616 2013.05.0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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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회의(AFL-CIO) 산하 연구소인 ‘공공정책’에서 부소장을 맡고 있는 토머스 I. 팰리가 쓴 논문 「금융 안정: 자산기초지급준비규정(ABRR; Asset-Based Reserve Requirements)의 사례」를 우리말로 옮기며 역자가 붙인 서문에 해당한다. 이 글의 번역문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인터넷 홈페이지(
http://klsi.org)에서 볼 수 있다. 원문은 금융시장을 감시하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파이낸셜마켓센터(FMC)가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는 간행물인 『금융시장과 사회』 2000년 8월호에 실려 있다. -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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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비율의 폐해

sang21_01.jpg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8%. 한국은 일본과 함께 이것의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험장이다. BIS자기자본비율은 1990년 자산시장의 거품 붕괴와 함께 찾아온 일본 경제의 경기침체가 장기불황으로 이어지게 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1988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바젤 합의를 거쳐 BIS비율이 도입될 당시 일본은 이 제도가 개발도상국 등 각국의 실정을 감안하지 않은 영미식 자본주의의 확산을 위한 도구라며 반발했지만, 결국 이 제도의 도입에 합의하고 만다. 수익을 많이 내는 자산에 대해 더 많은 자본을 쌓게 하는 BIS비율은 일본에서 신용경색을 깊게 하고, 중소기업 등 실물부문 연쇄 파산과 함께 금융기관의 잠재적 부실을 더욱 증가시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8년 6월 29일 5개 은행 퇴출 당시 적용된 유일한 기준은 바로 BIS비율이었다. 이 퇴출 과정에서 부산·경남 지역의 중소기업전담은행이던 동남은행, 대구·경북 지역의 중소기업전담은행이던 대동은행 등은 사라졌다. 중소기업전담은행이라는 특성을 살리고 영업지역이 달라 업무 중복이 없어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컸음에도, 이 은행들이 건의했던 지방은행간 합병 등의 자구책은 당시 금융감독위원회에 의해 무시당했다.

BIS비율의 폐해는 한국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1998년 국내 경제를 강타한 신용경색과 연쇄도산은 2000년 하반기부터 다시 찾아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0년 초 도입된 신자산건전성분류기준(Forward Looking Criteria)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작용했다. 기업의 미래상환능력을 감안한 FLC에 따르면,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은 경기순환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줄어들게 된다.

민간신용평가기관을 견제해야

지난 1월 11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BIS비율이 지닌 이런 문제점을 결국 인정했다. 1월 7~8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BIS정례 총재회의 및 특별총회’에서 “(각국 경제의) 구조와 내용이 다른데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영미식 자본주의 선진국)의 요구수준을 따르는 것이 국제표준일 수는 없다”고 밝힌 것이다. 전 총재는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금융기관의 성과와 관련해서도 선진국 수준의 수익구조를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라고까지 말했다. BIS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검토·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입발림에 불과하다. BIS는 2001년 말까지 기존 바젤협약을 수정한 새로운 자기자본규제협약을 확정해 2004년부터 적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기존 자본기준 체제가 지닌 심각한 문제점을 인정하고, 민간 신용기관이 하는 평가의 역할을 끌어올림으로써 바젤 규칙을 수정”한다는 것이지만, 이미 새로운 바젤협약의 내용은 정해져 있다.

새 협약에는 현재 무조건 100%로 잡혀 있는 기업 채권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신용등급에 따라 20~150%로 차등 적용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국채의 경우 그동안 위험가중치가 무조건 0%였는데, 새 협약은 회원국 여부에 상관없이 스탠더드앤푸어스(S&P),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기관이 부여하는 신용등급에 따라 위험가중치를 0~150%로 달리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새 바젤협약 역시 위험(risk)에 바탕한 자기자본규제협약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BIS비율은 어떤 수정을 겪더라도 기본적으로 경기순환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친경기적인’ 속성을 지닌다. 호황기에는 자산시장의 거품을 부추길 만큼 호황을 투기적으로 한껏 부풀리고, 불황기에는 신용경색을 낳아 불황을 더욱 깊게 한다는 얘기다. 특히 불황기의 경우 자산의 질이 급속히 악화하면, 금융기관은 이에 요구되는 자본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조달해야 하는데, 자본조달에 가장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더 많은 자본을 쌓으라는 규정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신용경색과 불황의 악화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새 바젤협약은 ‘민간신용평가기관’을 참여시키고 이들의 역할을 끌어올린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민간신용평가기관의 책임지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개편 논의가 3년이 다 돼 가는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은 현상 유지를 원하는 민간신용평가기관을 비롯한 국제금융자본의 저항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 재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이다.

새 바젤협약이 민간신용평가기관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만큼 동아시아 차원의 독자적인 신용평가기관을 설립하는 노력을 다그치는 한편,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처럼 국책 신용평가기관을 설립하고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국제적인 민간신용평가기관을 견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은행합병이 해결책?

전철환 총재의 발언 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일단 바뀌었다. 신용경색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 영업을 주로 하는 금융기관에 대한 BIS비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일단 이 기준을 달성한 은행에 대해서는 ROA(총자산 대비 당기순이익률)와 ROE(자기자본 대비 당기순이익률) 등 수익성 지표에 감독의 무게를 두겠다는 후속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의 이런 정책 변화에는 1998년과 2000년 금융노조 총파업 등 진보진영의 험난한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BIS비율의 탄력적인 적용과 함께 정부가 신용경색을 타파하기 위해 펴고 있는 정책은 지난해 12월 26일 발표한 뒤 시행하고 있는 산업은행을 통한 회사채 인수 조처다. 정부의 긴급 회사채 인수 조처는 은행 합병을 통한 주도은행(leading bank)의 출현이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기업대출을 정상화시킨다는 보장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업대출 정상화 조처의 뼈대는 일시적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는 기업들이 자금난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의 80%를 산업은행이 인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차환발행(만기연장)을 지원하고, 채권형 펀드를 10조원 단위로 계속 만들어 회사채를 사들이는 게 주요 내용이다.

산업은행의 회사채 인수가 사실상 ‘금융기관의 팔을 비틀어 신용경색을 풀려 하는 행위’에 해당한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문제는 그만큼 긴급한 비상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지금의 신용경색이 심각하다는 현실에 있다. 정부의 이런 조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은행 합병은 기업대출 정상화와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정부의 조처에서도 드러났듯이, 현재 기업대출을 맡을 수 있는 곳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변하고 있는 국내 시중은행들밖에 없다는 점이다.

선진국금융시장, 규제가 필요하다

역자가 옮긴 이 글의 요지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 각종 뮤추얼펀드·보험회사·연기금·증권회사 등 비은행 사적 금융기관들이 주도권을 발휘하고 있는 선진국 국제금융시장을 제대로 규제해야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위기의 근원은 선진국 금융시장에 있는데, BIS비율의 내재적·실천적 문제점은 선진국 금융시장에 대한 제대로 된 규제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전세계적으로 69건의 은행위기가 발생했는데, 해당국가의 은행시스템은 순가치가 0이 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1975년 이후, 87건의 통화위기가 있었다. 해당국의 통화 가치는 최소로 잡아 연간 25%, 위기 이전해보다 최소한 1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여러 사례에서, 특히 1980년대 남미의 “잃어버린 10년”과 최근의 동아시아 위기의 경우, 금융 파산은 사라진 성장과 증가된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해당 사회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되풀이해서 터지는 이런 위기를 분석할 때, 정치적 스펙트럼에 관계없이 연구자들은 개발도상국 금융시스템의 결점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 왔다.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진단의 전형은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개발도상국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제도적 준비의 부적절함을 강조하며, 더 나은 회계기준, 더 강화한 투명성, 개선된 감독시스템의 도입을 촉구했다.

더 광범위한 지구적 시스템에 대한 비판자들은 이와는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몇몇 사람들은 개발도상국과의 거래를 규정하는 동기에 주목하는데, 공적 부문의 구제에 대한 거듭되는 의존이 국제금융시장에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조성했다고 주장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자신들의 소유자산이 악화해도 구제될 것으로 믿는 투자자들은 필연적으로 위험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 개발도상국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추구한다고 한다.

도덕적 해이 비판론의 완고한 옹호자들은 IMF 및 IMF에 수반되는 구제(bailout) 관행의 철폐를 제안한다. 이보다 온건한 옹호자들은 새로운 국제파산법을 통해 (위기에 책임이 있는) 금융기관들을 (bail out; 위기 밖으로 탈출시키는 구제가 아니라 - 역자) “위기 안으로 개입시키는 구제”(bail in)를 추구한다. 새로운 국제파산법을 제정해 대부자들을 집단적이고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금융 파산의 비용을 이들에게 부담시키자는 것이다. 그 사이에 진보적 연구자들은 국가별 자본통제의 부활을 주장해 왔다. 여기에는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외환거래에 부과하는 토빈세, 일정한 기간 동안 투자자금을 해당국에서 빼가지 못하도록 투자자에게 의무화시키는 칠레식 완충판(가변예치의무금제 - 역자)이 포함된다.

이렇게 제안된 상당수 해결책들은 그 구상이나 실행 측면에서 고유한 문제점들을 제기한다. 예를 들면, IMF 해체는 주기적인 유동성 위기를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유동성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통제불능의 악순환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종대부자를 요구한다. 실행가능한 국제파산법의 확립은 법률적 관할권을 둘러싼 논쟁적인 결정들은 물론, 채권자 권리에 대한 몹시 복잡한 변화를 동반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 제안을 하나로 묶는 것은, 개발도상국과의 거래가 지구적 금융 폭발을 위한 낙하점(ground zero)을 이룬다는 공통된 믿음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또는 우선적으로 개발도상국에만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두 가지 두드러진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차입자에는 대부자가 있다는 것과, 증가된 금융 불안정은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만큼이나 선진국에도 고통을 주어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의 혼란을 촉진시키는 데 일조한 일본의 불황은 일본 자산 거품의 붕괴와 시작됐고, 이에 따른 부채과잉이 불거지면서 깊어졌다. 비록 러시아의 채무불이행이 촉발했지만, 1998년 10월 지구적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와 코네티컷주에 있는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에 정면으로 집중됐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은 자생적인 은행 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는 미국의 거대 예금기관들의 기술적 지급불능(technical insolvency),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사실상 파산, 최종적으로 국내총생산의 2~3%에 이르는 세금을 들게 한 저축대부조합(S&LA)의 파산으로 얼룩졌다.

1990년, 심각한 은행위기가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을 강타했다. 그 결과 10년 뒤에도 스웨덴은 높은 실업을 감내하고 있다. 1992년, 외환투기는 유럽의 환율메커니즘을 끝장냈고, 이와 동시에 영국 자산시장은 붕괴를 겪었다. 그리고 지난 15년에 걸쳐, 1987년 주가폭락부터 2000년 4월 나스닥 거래중지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주식시장 폭락은 투기적인 상승과 급락에 대한 미국 주가의 민감성을 드러냈다.”


필자는 BIS비율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꼽는다. 높은 수익을 내는 자산에 대해 더 많은 자본을 쌓게 해 도덕적 해이에 따른 지나친 위험 감수를 예방하겠다고 하지만, 실천적으로 서로 다른 형태의 위험으로 효과적으로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강한 친경기적 속성을 지닌다는 게 하나다. 두 번째는 BIS비율 적용의 중심에 있는 은행의 역할이 점점 줄고 있는 지금의 금융시스템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표] 참조).

sang21_02.gif“시장 격동의 증가는 선진국 국내의 금융혁신과 규제 해제와 동시에 일어났으며, 저축대부조합(S&LA) 파산과 같은 경우들에서는 분명히 이로부터 유래했다. 이 과정은 상품 시장의 관리 해제 물결에 편승했다. 이 물결은 영국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들에서 사영화한 정부 소유 기업은 물론, 미국의 운수·항공·통신과 같은 주요 부문의 지형을 새로이 형성했다.

미국에서 국내의 금융 규제 해제의 씨앗은 1970년대에 뿌려졌다. 그때 예금기관들은 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요구불 금융시장계정(checkable money market account)과 같은 금융혁신들이 규제를 받지 않는 바람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금융상품이 불리한 경쟁의 위치에 놓이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런 금융혁신들은 당시 지배적이던 규제틀의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규제틀은 금융시스템을 세 부문, 곧 은행, 증권, 보험으로 분리하고 있었다. 각 부문은 서로의 사업영역에 대한 진입이 금지돼 있었는데, 각각 별도의 법을 통한 규제와 특화한 공적 기관의 감독을 받았다.

규제망을 확대해 금융혁신을 포괄하는 대신, 의회와 카터 행정부는 1980년 ‘예금기관 규제 해제 및 통화통제법’을 제정하면서 ‘하향‘ 규제를 향한 최초의 결정적인 조처를 취했다. 이 법은 이자율 통제를 해제해 은행과 저축기관이 자금 수신 경쟁을 더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비은행 금융회사들이 유사 은행 상품과 서비스를 계속 취급함에 따라, 아울러 금융업계에서 정책 영역에서 규제를 풀라고 거듭해 압박함에 따라, 감독기관, 주 의회, 연방 의회, 법원들은 은행에 대한 다른 제한들도 점차로 없애나갔다. 여기에는 이전에 금지됐던 지역과 비은행 업무영역들로 은행이 확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처가 포함된다. 1999년 ‘그램-리치-빌리 법’의 통과로 이 과정은 완결됐다. 이 법은 ‘글래스-스티걸 법’에 따른 상업은행(우리나라 시중은행 격임 - 역자)의 증권·보험 업무 취급 제한을 폐지했다.

규제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금융혁신은 또한 경기순환을 증폭시키는 자동 불안정요인들을 배양함으로써 거시경제 관리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불안정 요인의 결과, 금융시장은 친경기적으로 움직이며(곧 경제가 활황일 때 금융시장도 활황이고, 침체할 때 같이 침체한다), 경기상승은 증폭시키고 경기하강은 악화시킴으로써 실물 부문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은행에 예금하는 대신 저축을 변동가격 자산 구매로 전환시키는 가계들의 성향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경기가 뜨고 주가가 상승함에 따라 가계들의 부가 더욱 친경기적으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증가된 부는 경제가 이미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계들로 하여금 저축을 줄이고 소비를 늘리도록 유도한다. 1990년대, 가계들은 저축을 줄였을 뿐 아니라, 증가된 부를 추가 소비지출에 충당하기 위한 담보물로 사용함으로써 기록적인 부채 수준을 기록했다.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변동가격 자산을 사들이기 위해 고정가격 부채를 떠맡은(일정한 이자를 내야 하는 담보대출을 받는다는 뜻임 - 역자)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대차대조표상의 취약성을 높였다.

주택담보융자(home equity loan)도 비슷한 효과를 지닌 또 하나의 금융혁신이다. 경기 활황 때, 주택가격이 오르고, 주택순가격(home equity)도 상승한다. 이를 근저당으로 설정하는 주택담보융자는 소비자가 추가 소비에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근거로 통크게 차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주식과 뮤추얼펀드로 전환된 가계 저축의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주택담보융자의 증가는 경기 확장의 하강 국면에서 심각한 친경기적 위험을 제기한다. 불황기 동안 주택가격이 폭락할 때, 많은 주택담보 차입자들은 버거운 부채를 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부채는 소비를 제약하고 총수요를 낮출 것이다.

놀랍게 증가한 ‘대부의 증권화’는 이와 비슷한 혼란스런 결과를 제기한다. 회계장부에 대출을 그대로 보유하기보다, 은행과 다른 대출기관들은 대부신용을 증권으로 전환해 이를 유통시장에서 매각하는 게 현재의 추세다(대출채권을 담보로 발행하는 유가증권인 은행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이 그 한 예다 - 역자). 이 결과 생기는 꾸준한 유동성 흐름은 … 훨씬 더 많은 경제적 활동에 자금을 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자산을 시장거래화함으로써, 증권화 역시 투자자의 갑작스런 감정 변동에 개별 부문 및 더 넓은 범위의 경제를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유통시장의 대부신용이 뒷받침하던 증권이 1998년 갑작스럽게 폭락한 데서 극명하게 증명됐다.

국제무대에서, 신흥시장기금과 같은 혁신 역시 불안정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시장에 대한 투자자의 점점 높아지는 관심은 차입국의 부채 한도를 높여 왔다. 특히 세계경제가 활황을 보이고, 교역조건이 차입국가들에 유리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둔화할 때, 이런 흐름은 역전된다. 차입 파티에 몰두하던 개발도상국들은 활황과 불황에 덜 민감한 행동을 보이는 시스템에서보다 훨씬 더 버거운 부채과잉에 직면한다.“


자산기초지급준비규정(ABRR) 도입해야

BIS비율에 대한 대안으로 필자는 금융기관 형태(은행, 증권회사, 할부금융회사 등)보다는 금융기관들이 보유하는 자산에 기초해 모든 금융중개기관이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쌓게 하자는 ‘자산기초지급준비규정’(ABRR)을 제안한다.

금융중개회사들은 예금자, 채권보유자, 기타 채권자들로부터 모은 기금을 대출 및 다양한 형태의 유가증권 투자에 운용한다. 금융회사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자산에 걸쳐 자신의 기금을 배분한다. 최적의 할당을 위해, 중개회사들은 다양한 자산의 한계수익성이 같아지도록 자산구성을 조작한다. 모든 자산이 같은 한계수익을 낳는 관계로, 금융중개회사들이 이 지점에서 자산구성을 재배열할 동기는 없다.

ABRR은 이런 모든 종류의 자산에 대한 지급준비금을 보유할 것을 금융회사에 요구한다. 그러면 특정한 자산 유형을 인수함에 따라 중앙은행에 예치해야 할 지급준비금이 많아지면, 이 자산의 한계수입이 줄어들게 되고, 금융회사는 한계수익률이 더 높은 자산 유형을 인수하기 위해 기금을 이전시킨다.

지급준비규정은 모든 자산 종류에 대한 규제당국의 관심사에 기초해 설정된다. 자산 종류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은 하나의 관심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산 종류가 너무 급속히 성장하고 있고 팽창된 자산 가격을 낳고 있다는 것도 관심사가 될 수 있다. 금융회사들이 지급준비금을 보유하게 강제함으로써, 금융시스템은 금융회사들이 이자를 낳지 않는 예금 형태로 자신의 일부 기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도록 규정한다.

자산 가치가 상승하거나, 금융부문이 새로운 자산을 창조할 때, ABRR은 금융부문이 추가 지급준비금을 쌓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통화를 제약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 팽창이 지나친 소비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싶을 경우, 통화당국은 주식 소유에 따른 지급준비규정을 올릴 수 있다. 이는 금융회사들이 주식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현금을 보유하도록 강제하고, 주가수익을 낮추고 주식투자의 동기를 감소시킬 것이다. 반대로 자산 가치가 하락하거나 금융자산이 삭감될 경우, ABRR은 이전에 예치됐던 그 자산들의 지급준비금을 방출함으로써 자동적인 통화 완화를 낳는다.

자본기준과 마찬가지로, 지급준비규정은 애초 발행인이나 유통시장에서의 구매자에 대한 의문스러운 대부의 비용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데, 위험한 대부가 ABRR 아래에서 채무불이행 되면, 그 대부에 대한 지급준비금이 방출되어 가장 어려운 때에 필요한 유동성을 은행에 제공한다는 얘기다.

ABRR 시스템 아래에서, 무분별한 자산구성을 선택한 잘못 경영된 금융중개회사들은 파산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기준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감독 시스템에서처럼, 질이 악화한 대출과 제도적 실패가 무자비하게 유동성 부족의 확대로 이어지게 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통화당국이 불황의 시기에 금융산업의 대출능력을 한층 쉽게 확장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경기 하강 국면에서 은행에 신규자금을 공급하기를 꺼려하는 투자자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ABRR 시스템에서 통화당국은 모든 금융부문에 대한 지급준비규정을 직접 낮춤으로써 반(反)경기적 투자를 부추길 수 있다.

필자는 이런 ABRR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반대에 부닥칠 것으로 예상한다. 중앙은행가를 비롯한 금융자본 쪽에서 “금융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에 간섭한다”는 이유를 들고나올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비판은 공허한 울림이다. 통화당국은 예금에 대한 지급준비규정을 통해 이미 개입하고 있다. 통화당국이 채권 가격과, 주식 가격, 저당 비용에 영향을 주는 이자율 설정을 통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다. 신용 할당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에도, 중앙은행가들은 이자율을 조정하고 은행을 감독하는 과정에서 신용을 선택된 이용자에게 계속 연결하고 있다.

이런 도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ABRR 시스템을 공식화시키는 과정에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하며, 이 시스템의 실행을 보호하기 위한 엄격한 공적 감시 메커니즘을 확립해야 한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결국 ABRR 시스템이 실현가능하기 위해서는 ‘규제당국의 관심사’를 확장하고 견제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중앙은행을 비롯한 규제당국의 민주화는 선행조건이다. 

구체적으로는 이것은 우리에게는 한국은행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구성의 민주화, 국회라는 대의기구의 실질적 민주화를 통한 기능 활성화 및 국회에 대한 시민의 감시·통제 등이 이뤄지는 것을 뜻한다. 특히 물가안정이라는 협소한 목표에만 자신의 목표를 가두고 있는 중앙은행의 민주화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결국 이 지점에서 ABRR 역시 민주주의 문제,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정치적인 진출과 맞닿는다.

자본이동 자유화에 따른 고삐풀린 자본 유·출입 규제를 위한 가변예치의무금제(VDR)와 외환거래세(토빈세) 등의 자본통제 방안과 함께, ABRR은 진보진영의 정책 및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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