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촛불혁명과 마지노선 민주주의
촛불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마지노선 민주주의’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란 특정 층위 -특히 정치적 층위- 에서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최후 방어선’으로 삼아 그것이 위협받을 때에(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이 생성, 유포되어 인민주권의 행사가 일어나는 ‘단층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또 문제 해결의 방식도 마지노선을 따라 이미 구축된 요새와 그것을 지키는 부대 -기성의 대의제적 장치와 그것에 기댄 정치세력- 에 주로 의존하는 ‘일원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특정 층위 –정치적 층위- 의 문제만을 민주주의의 지표로 설정함으로써 다른 층위 -사회경제적, 문화적 층위- 에서의 문제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가운데, 부와 권력을 독점한, 혹은 독점하려는 ‘민주주의의 적’에게 그 접근의 시각과 방법을 잠식당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혹은 이미 잠식당한 채 방치되어 있다.
그런 중에 이들 문제들은 공적 문제가 아니거나, 개인이 홀로 책임지고 해결할 사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면서 인민주권 행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급기야 그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유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그것이 남겨져 있다는 것 자체를 민주주의의 증거로 삼는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 혹은 (반공주의적) 자본주의와 등치된다. 다른 방식 -비제도적 장치와 그것을 동원하는 세력에 의한- 의 문제해결은 바람직하지 않거나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기존의 제도적 질서와 그것에 기댄 세력은, 불신의 대상임에도, 재생산되고 회생한다.
촛불혁명은 특히 사건 발생의 맥락과 해결 방식의 측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와 같은 마지노선 민주주의임을 알려준다. 촛불혁명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대통령의 권력 사유화의 문제가 부각되었을 때 비로소 인민이 적극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면서 일어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승자독식의 만연과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차별 –이른바 ‘갑질’- 의 지속적 반복에 대해서는 시민사회 내의 부정적 인식과 비판적 여론의 형성에도, 촛불혁명과 같은 집합적 항의와 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층위에서의 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과 요새 자체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의 숱한 죽음을 가져온 노조의 파업에 참여한 개별 노동자에 대한 기업 측의 손해배상소송 문제에 대한, 또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노동청년’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죽음에 대한 그간의 정치권과 사법부, 그리고 시민사회의 미온적이고 무성의하고 일회성에 그친 반응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촛불혁명은 철저히 ‘절차적/제도적 방식’을 견지하였다. 이를테면 국회 – 사법부 – 선거 - 투표를 통해 불의한 대통령과 그 세력을 심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자 촛불혁명의 대오는 정치권과 사법부 등을 불신하면서도 대통령을 위시로 한 그들에게 혁명 과업의 수행을 맡긴 채 각자의 일상적 삶의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2. 마지노선 민주주의와 진보정당 침체의 ‘정상성’
한국의 민주주의가 마지노선 민주주의임을 감안할 때, 진보정당의 ‘침체’는 너무나 당연하다. 마지노선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적 층위만이 아닌 사회경제적 층위, 더 나아가서는 문화적 층위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미약하거나 정치적 의제로 설정되기가 쉽지 않아 진보정당이 자리를 잡을 공간이 협소하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층위에서의 민주주의가 문제될 때에도 제도적 해결 방식에 대한 선호가 높아, 다수의 국회의원 의석을 비롯한 제도적 권력의 자원을 이미 상당 정도로 보유하고 있는 기성 거대 정당에게 우선적으로 의존한다. 이는 촛불혁명 이후 ‘적폐 청산’을 포함한 정치적·사회경제적 개혁에 대한 열망이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에 대한 관심과 기대로 모아진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단지 주관적 선호에 따른 것이 아니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토대를 갖고 있다. 즉, 마지노선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토대에 적응한 결과다. 분단과 전쟁을 통해 수립된 반공체제 아래에서 선거와 투표라는 정치적 대표 선출 절차를 중시하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전부 혹은 요체라고 생각하는- 민주주의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그것의 ‘수호와 회복’을 위한 것이 되었다.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급진적 변혁운동세력의 등장에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핵심 강령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그와 같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경험과 기억은 대통령 중심제와 맞물려 민주주의를 ‘대통령 문제’의 영역에 머물게 한다.
한편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30여 년에 걸쳐 전개되어 온 ‘3중의 배제’를 통해 도달한, 혹은 그럼에도 지켜낸 ‘최고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3중의 배제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인 노동계급에 대한 배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평등에 대한 배제, 그리고 △민주주의 질서의 작동 원리인 국가권력의 공적 사용에 대한 배제를 가리킨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노동과 평등에 대한 배제를 막아내지는 못했으나, 사이비 보수정권이 감행한 국가권력의 공적 사용에 대한 배제를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중단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도달한 혹은 지켜낸 민주주의이다. 하지만 노동과 평등의 자리가 없는 마지노선 민주주의에서 진보정당의 입지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침체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사실 도약의 이미지로 채색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의 민주노동당과 2012년 19대 총선에서의 통합진보당의 선전은 지극히 예외적 현상이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석을 차지한 민주노동당의 선전은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은 상황에서 도입된 1인2표 정당명부제와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호감이 빚어낸 것이었다. 또 2012년 19대 총선에서 13석을 차지한 통합진보당의 선전은 민주당과의 ‘반MB 선거연합’과 노무현 참여정부 세력의 일파(국민참여당)를 포함한 ‘자주파와 평등파 간의 재통합’에 대해 호의적 평가가 내려진 것의 결과였다. 고유의 지지기반의 구축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이후 분열과 통합을 거듭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고유한 지지기반이 미약해 지속적 성장의 전망이 보이지 않음에 따라, 상황에 기대어 거둔 성과를 차지하기 위한 당의 내부 경쟁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19대 총선 직후 결국 분당으로 귀결된 통합진보당 사태가 그 적나라한 예이다. 그 후 진보정당은 사실상 대중적으로 긍정적 인지도가 높은 유명 정치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명사 정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정의당이 진보정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 경쟁’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문제를 중심으로 삼아 작동하는 마지노선 민주주의에 조응하는 요소는 갖추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3. 민주주의의 다층화와 다원화
마지노선 민주주의의 현실에 서 있음을 감안할 때, 기존 및 현존 진보정당의 재도약 가능성은 낮다. 특히 진보정당을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등으로 혹은 그것들 간의 이러 저러한 통합에 따라 등장할 특정 개별 정당으로 설정하고서는 재도약의 기준을 17대 총선과 19대 총선에서처럼 두 자릿수 이상의 국회의원 의석을 차지하는 것에서 찾을 경우 더욱 그러하다.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의 배출을 기준으로 삼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마지노선 민주주의에서 진보정당 재도약의 기준은 국회의석의 증가나 지자체장의 배출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런 재도약의 통로는 이미 차단되어 있다. 원내교섭단체가 되고 지자체를 운영할 수 있다면 진보정당의 위상과 역할은 분명 높고 커진다. 고유의 지지기반도 그 과정에서 확충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진보정당이 재도약의 기준을 그리 잡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5%대의 지지율과 5석 남짓의 의석 보유의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진보정당에게 허용한 몫이 대략 그만큼인 것이다. 진보임을 자처하는 모든 세력이 다 모였던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때의 10∼13석이 몫의 최대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런데도 국회의석 수 증가나 지자체장의 배출에서 재도약의 기준을 찾는 것은 마지노선의 요새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보정당 재도약의 길은 다층화와 다원화에서 찾아야 한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층위에서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민주주의를 다층화해야 한다. 또 문제해결의 방식도 제도/비제도 차원을 넘나들며 다원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주체도 육성하고 발굴할 수 있다. 노동과 평등의 포괄도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방식과 형태로- 가능해진다.
진보정당은 청년노동과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혁명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각과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기존의 정당 안의 지식인이나 전문가에 의존해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당사자의 주도 속에 분화해 ‘청년노동당’, ‘페미니즘당’, ‘과학혁명당’ 등으로 각기 새로운 결사체를 조직해 그리해야 한다. 그 분화의 정도가 재도약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는 진보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래를 선도하고 그것을 담당할 새로운 주체를 삶의 현실 속에서 발견 혹은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한편 제도/비제도의 차원을 넘나든다는 것을 (제도)정치와 (비제도)사회운동의 결합 정도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정부와 기업을 넘어서서 주민이 직접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직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관계를 형성하고 자원을 동원하며 적정 기술과 상품을 개발해 공유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진보의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는 ‘사회혁신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갖는 진보정당들은 그 과정을 통해 등장할 수 있다.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진보정당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념과 주체로는 재도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또 진보정당은 이제 여의도 정치로 빨려 들어간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의 것이 되어야 재도약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존의 진보정당들은 그것을 촉진하는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