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 10년, 6·3 지방선거가 던지는 질문
박경은 전국공공기관노동이사협의회 상임의장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선로 위를, 정해진 신호에 따라 달리는 일은 어쩌면 매뉴얼에 충실한 고도의 숙련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새로운 길을 묻고, 다른 선택지를 상상할 여지가 없다. 지금 노동이사들이 마주한 현실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지방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10년, 국가공공기관 도입 4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노동이사는 이미 깔린 선로를 운행하는 ‘운전자’가 아니었다. 노동이사는 지도가 없는 곳에 궤도를 놓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노선을 설계해온 존재였다. 제도가 허락한 최소한의 공간 안에서, 노동이사들은 늘 한 걸음 먼저 판단하고 책임져야 했다.
현업의 운전석에서 잠시 물러나 이사회라는 공간에 들어선다는 것은 단순한 역할 이동이 아니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의사결정의 한복판에서, 노동이사는 노동의 언어를 경영의 언어로 번역하고, 현장의 긴장을 제도의 논리로 설득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궤도를 놓기 위해 이어진 밤낮의 고민은 때로 막막했고,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한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미 닦인 길을 가는 것보다 지도가 없는 곳에 첫 번째 침목을 놓는 일이 더 어렵고 고단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의 노동이사들이 흘린 땀과 고뇌 덕분에, 내일의 노동이사는 조금 더 안전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역할을, 노동이사들은 지난 10년간 묵묵히 수행해왔다. 이 치열한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의 중심에 닿지 않는다면 공공기관의 지속가능한 미래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제도는 문서로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제도는 사람의 결단과 현장의 책임감으로 완성된다. 노동이사들이 실천으로 축적해온 경험은 단순한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공공기관 운영 방식을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설계도다. 문제는 이제 그 설계도를 언제까지 개인의 헌신과 용기에만 맡겨둘 것인가 하는 점이다.
2026년 6월 3일, 전국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다. 이 선거는 노동이사제의 향후 10년을 가늠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노동이사제는 더 이상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할 단계가 아니다. 이제는 어떤 책임 구조로, 어떤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운영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노동이사들이 현장에서 놓아온 궤도는 이미 분명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개인의 헌신에 의존하는 제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내용과 형식은 반드시 조응해야 한다. 노동이사제의 확산과 정착은 더 이상 노동이사 개인의 노력만으로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 공공기관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정치와 행정의 몫으로 확장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계기로, 지방정부 차원에서 노동이사제 확대와 정착을 위한 정책협약을 공식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노동이사 선출과 활동의 제도적 보장, 이사회 운영에서의 실질적 참여 구조, 이를 뒷받침할 행정·재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구조적 약속이어야 한다.
정책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의 엔진이 되고, 노동이사제가 그 동력을 안정적으로 전달하는 제도로 작동할 때 공공기관은 비로소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노동이사제는 특정 집단의 요구가 아니라, 공공기관 운영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제 네 달 남짓 남았다.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는 노동이사들이 지난 10년간 축적해온 경험과 성과를 제도 안으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지방선거에 나서는 후보들 역시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노동이사제를 현장의 부담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공공기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책임질 것인가.
노동이사제가 다음 궤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인의 헌신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제도를 제도로서 책임지겠다는 정치적 결단이다. 6·3 지방선거는 그 결단을 요구하는 첫 번째 신호다.
출처: 『e노동사회』 202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