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서평
노동사회 188호에 실은 서평입니다.
심리정치와 성과주의 사회
성과주의 사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심리정치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증식을 위해 추구하는 정치방법이다. ‘무한정 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정치가 곧 심리정치이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긍정성을 강조한다. 반면 그 이전 규제사회에서 자본은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면서 사람을 통제하여 자본을 증식시켜 왔다.
하지만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동물이며, 이러한 질문은 사람의 부정성을 발동시킨다. 인류의 학문적, 기술적 업적은 모두 이 부정성에 기인하고, 사람의 부정성은 자본의 통제에도 발동했다. 노동자의 부정성은 노동조합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으로 표출되어 자본증식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자본은 진화하는 생물과도 같아 기존의 강압적인 통제방식이 장기적으로 자가증식에 장애물이 될 거라 인식했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과 노동의지를 분리시킴으로써 노동과정을 통제했던 예전의 방식에서 탈피해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장했다. 자연스레 노동과 노동의지는 통합됐고 노동자는 작업에 애착을 가진 상태에서 생산과정에 직접 개입하고, 노동과정의 통제권도 다시 쟁취했다.
이처럼 변화된 노동과정에서는 자본에 의한 노동통제가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이 땀 흘려 일한 결실 즉, 성과는 모두 자신의 것이고, 자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결실에 의해 평가받으며, 성과는 곧 자기 자신과도 같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본에 대한 저항과 부정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과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저항과 부정을 한다면,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과 부정을 의미하고 자기부정과 자기실증은 우울증과 히스테리를 가져온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건전지로 치환되는 인간
성과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자본화되고 자본증식을 위해 존재한다. 힐링, 사람들과의 소통, 감정, 꿈과 목적의식 등 모든 것은 자기착취와 자본생산을 위한 요소로 전락한다. 한병철은 또 다른 저서『피로사회』에서 우울증과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로 주체적 노예화와 성과주의 사회를 꼽았다.
또한 성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의 영속과 증식을 위해서 기계부품(규제사회에서의 인간)에서 인간건전지(성과주의 사회에서의 인간)로 치환된다. 인간이 매우 불행하게도 자신이 자본의 영달과 영속을 위해서 사용되다가 버려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두 가지 경우뿐이다. 생산과정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와 우연한 기회로 ‘내가 인간건전지가 아닐까?’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때이다. 사실 이 깨달음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깨달음 이후의 행동이 중요하다.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든 후 다시 일상을 반복하던지,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쇼크요법과 한국의 노동운동
신자유적 정치 즉, 심리정치는 모든 의견과 가능성에 무한한 긍정성을 부여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기성취를 통해 욕구를 해결하도록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긍정’의 사회는 인간의 저항과 부정성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이 국민들에게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규제로 가득한 규제정치의 사회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각 연령∙성별∙직업 등 다양한 유형에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인간을 압박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정치의 핵심은 규제와 쇼크이다. 규제가 사회를 단속하기 위한 소의 ‘코뚜레’라면, 쇼크는 요구 조건과 상황을 왜곡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논의를 전환시키는 ‘요술’이다. 쇼크는 한국의 노동운동에서도 확인되는데, 한국 노동운동의 쇼크는 바로 ‘종북’과 ‘경제위기’설이다. 이 두 가지 쇼크요법은 국민들의 지적 사고능력을 마비시키고, 노동운동의 당위성은 쇼크요법으로 인해 제거된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의 당위성, 즉 정의라고 불리는 것은 부정부패 척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아나키즘으로의 사회체제 전복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생존권과 자기 몫 찾기이다. 이는 자연권이자 기본권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당위성이 정치적∙계급적으로 얼마나 순수한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권과 기본권에 대한 요구에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자연권과 기본권 외에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인 ‘비교’ 문제는 철학의 문제일 뿐, 우선순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정부의 쇼크요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자연권과 기본권에 대한 요구는 저급한 정치프레임으로 대체되고 묵살 당한다.
더욱이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가 되고, 경제위기를 가져오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는 매우 유능고, 그 덕분에 노동자 아니,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행동의 당위성은 왜곡되고 묵살된다. 주체적 행동의 당위성을 옹호하고 지지해줄 무엇인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타자가 필요하고, 바로 여기에 노동조합이 가야할 길, 즉 인간을 위한 대타자로서의 길이 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대타자인 노동조합
성과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이 인간의 대타자가 되기 위한 길은 다음과 같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산업시대에서의 노동조합의 길이 아니라, 과거 노동조합이 계속 해왔던 기능이었고, 해야만 했던 기능이다.
1) 실패자로서의 낙인을 지우는 것
성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노동자다. 노예시절의 인간은 자신이 처한 불평등하고 왜곡된 상황에 대해 다른 노예들과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에서 노동자로 진화한 인간은 자신이 처한 불평등하고 왜곡된 상황에 대해 다른 노동자들과 공감하고 연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하고 왜곡된 상황을 만든 것이 노동자 자신이라고 치부되기 때문이다. 성과주의 사회 이전에 불평등하고 왜곡된 상황에 노출된 인간은 ‘소외자’로 여겨졌지만,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실패자’로 여겨진다. 인간은 실패자와 연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실패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2) ‘경제적’ 성과자로의 추락을 막는 것
성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성과로 보고, 무엇을 위해 성과를 내야 하는 지 이다. 현재 정부나 기업이 도입하려는 성과제는 ‘경제적’ 성과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가 가져오는 결과는 금전적 이득, 경제발전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인간의 파편화, 자기 학대, 사회 이원화 등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다.
또한 경제적 성과는 공공선이나 문화적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닌, 극소수 인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극소수는 상대적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성과를 누리고 있다.
3) 노동조합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정의로 변화시키는 것
대중이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의 쇼크정치 에 넘어가는 이유는 정의와 도덕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자의 이익을 빼앗는 노동조합의 행동은 비도덕적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은 정의로운 행동이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자유권과 기본권은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이며, 본질적 가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정의와 도덕론은 자유주의자나 공리주의자 모두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인간이 생계수단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생존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위해 불안을 느끼는 인간은 주체가 되지만, 주체로서 행동하기 위해서는 방향을 제시해 줄 대타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인간의 주체적 행동을 위한 대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갈망하는 대타자가 노동조합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인간의 대타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