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2019-08-29 06:00:00 『뉴스토마토』 '(시론)디지털 경제와 노동의 미래'에 실렸던 글 입니다. [기사링크]
작성자: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출근 시간대 가장 많은 사람이 하차하는 역은 가산디지털단지역이다. 가산디지털단지는 구로 2, 3공단이 있었던 공장 터로 현재는 6700여 개 중소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는 국가산업단지다. 정보기술(IT) 업종이 30.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벤처업계의 본거지이다. 구로공단은 노동자들의 진한 땀 냄새와 삶의 애환이 배어 있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시발점이었다. 수출주도형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구로공단은 성장의 이면에 저임금과 쪽방, 노동탄압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기도 하다. 과거의 흔적은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에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디지털단지의 고층 건물과 명칭에 걸맞게 노동자의 일터는 변화했을까. 제조업 노동자가 첨단산업의 엔지니어와 사무전문직으로 탈바꿈했지만 가산디지털단지는 ‘가산동 오징어배’와 ‘칼야퇴’로 유명하다. 악명 높은 노동 강도 탓에 마치 ‘등대나 오징어잡이 배’처럼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불야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야근하는 날이 많다 보니 ‘칼야퇴’란 말도 쓰인다. 밤 10시에만 퇴근해도 ‘집에 빨리 간다’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일이 끝나면 굳이 집까지 가기보다 회사 부근 찜질방에서 쪽잠을 잔다.
4차산업의 대명사인 IT업종의 장시간 노동은 하루 이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2017년에 과로사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고용노동부가 게임업체 12곳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노동자 3250명 가운데 63.3%인 2057명이 주중 12시간인 법정 한도를 넘겨 일하면서도 연장근로수당은 받지 못했다. 최근 노동조합 결성이후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판교 게임업체들은 주 52시간이 상당수 지켜지고 있지만, IT 하청업체들이 몰려 있는 가산단지의 장시간노동과 공짜노동은 여전하다. 공단은 디지털로 변화했지만 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조건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IT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 아래”라고 말한다.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수식어는 다단계 하청구조 속에서 신음한다.
한편 제로아워(zero-hour) 계약은 디지털시대 노동시장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고 고용주가 필요할 때 불려가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고용계약을 말한다. 우버나 딜리버루(Deliveroo) 같은 플랫폼노동의 확산은 과거에 보지 못했던 노동자를 양산한다. 재택근무를 하고, 대리기사가 30분 운전하고 돈을 받아가고, 편의점·식당 등 여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는 일본 프리터족과 유사하다. 최소한의 근무시간과 임금 등을 보장하는 파트 타임보다 근무조건이 열악하다. 언제 고용주가 부를지 모르니 다른 부업을 하기도 어렵고 무작정 불러 줄 때까지 연락을 기다린다. 패스트푸드점, 배달업, 돌봄 서비스 등 주로 서비스 분야에서 제로아워 계약이 확산되고 있다. 고용주는 성수기·비성수기에 맞춰 인력을 조정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근무시간과 임금을 예측할 수 없어 안정성이 파괴된다.
디지털경제의 확산은 노동 유연화와 함께 불안정성을 높인다. 영국의 앞선 경험은 디지털 대한민국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준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5분 대기조’처럼 일하는 사람의 수가 전체 인구의 6% 정도로 집계되는데, 이들을 ‘제로아워’ 노동자라고 부른다. 최저 근무시간 기준이 0시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의 제로아워다.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한 노동자가 소수이듯 ‘제로아워’ 노동도 강요된 선택이다. 영국 공공정책연구소가 2만 명의 제로아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는 이를 입증한다. 영국 유연근로제의 상징인 '제로아워 계약' 노동자 절반 가까이가 상시·지속적 업무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로아워 노동자 중 더 긴 시간의 노동을 원한다고 답변한 비율은 44%에 달했다. 유연근무제로 이익을 보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28%에 불과했다. 2000년대 초반 20만 명 수준이던 영국의 임시직 노동자 규모는 최근 10여 년간 이어진 경기 침체로 100만 명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경제의 확산은 좋든 싫든 노동의 형태 및 일터를 변화시킨다. 디지털경제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플랫폼 산업과 기존 산업과의 갈등이 나타날 수 있고 관련 분야에서 일자리의 감소나 질적 저하가 우려된다. 기술 발전이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기술 발전을 막는 러다이트운동이 답은 아니다.
디지털 경제가 양산하는 새로운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임금노동자들이 보장받고 있는 노동관계법과 사회보장제도 바깥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노동형태를 수용하면서도 이들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정책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영국은 노동당이 아닌 보수당 정부가 굿 워크플랜(Good Work Plan)을 통해 특수고용직노동자의 보호 방안을 내놓았다. 법제도를 통한 문제 해결이 만능은 아니지만 고용주의 의무를 강화하는 제도 도입은 시급하다. 문재인정부의 비정규직 보호 및 정규직 전환 대책은 공공부문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접근과 창의적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