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경향신문의 <세상읽기>에 월 1회 게제되는 칼럼의 10월 9일(금)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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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노동시간, 너무 길거나 너무 짧거나
-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안녕하세요. ○○택배 배송원 ○○○입니다. 고객님의 택배(‘경비실’)에 ‘22시28분’에 배송되었습니다. 소중한 상품을 찾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달 코로나19에 명절 특수까지 겹쳐 늘어난 물량에 늦은 시간까지 일하던 택배기사님이 보낸 문자다. 아마도 아침 7시부터 시작한 일은 밤 11시가 넘어 끝났을 것이다. 끼니도 거른 채 하루 14시간 가깝게 일하다보니, “힘들어 죽겠다!”는 말은 업계에서 낯선 말이 아니다. 로켓 배송이나 크런치 모드와 같은 직업 특성이 반영된 업계 용어는 이제 낯설지 않다.
오랜 숙제처럼 저임금 영세사업장은 장시간 노동이 발생하는 곳이다. 특수고용과 플랫폼노동자들은 한 건, 한 건이 소득과 연결되다 보니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울·불안장애나 스트레스 등 만성적 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병원조차 가지 못한다. 그만큼 장시간 노동은 어느새 턱 밑으로 다가와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IT게임, 영화방송, 물류배송배달, 방문판매, 설치수리, 웹 디자이너, 경비 업무는 지난 몇 년 사이 과로사가 나타난 직업들이다. 1주일 52시간 이상 상한제가 시행되고 있음에도 아직도 141만명이 장시간 노동에 놓여 있다.
장시간 노동의 그늘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초단시간 고용도 심각한 상황이다. 커피전문점, 멀티플렉스 극장,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부터 도서관 사서, 학교예술강사, 초등돌봄, 아이돌보미 업무까지 사회 곳곳에서 초단시간 고용계약이 이루어진다. 초단시간은 ‘4주 동안의 근로시간이 평균적으로 1주 15시간 미만’을 의미하는데 무려 335만명이다. 문제는 지난 10년 사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정부의 재정지원 일자리사업이 확대되면서 공공행정과 보건복지 분야에서 초단시간 고용이 55만명이나 된다.
기업들은 적절한 수요와 공급에 맞춘 탄력적이고 유연한 고용이 매력적일 것이다. 주휴수당은 물론이고 사회보험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니 비용절감 효과도 있다. 초단시간 고용의 확산은 긍정성보다 부정성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고용의 질 하락을 막을 수 없다. 이미 고용보험이나 유급휴가 그리고 교육훈련 등을 적용받지 못하는 초단시간 노동자가 10명 중 7명이다. 보호를 받아야 할 취약노동자들이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사회보험과 휴일휴가 등은 일하는 시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그럼에도 일부 논자들은 더 많은 일자리와 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시간제 확대를 강조한다. 정말 그럴까. 초단시간은 여성(68만9000명), 청년(21만4000명), 고령(53만2명), 이혼·사별(27만7000명), 중졸(41만2000명), 저임금(59만명)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소득 향상은 매년 법정최저임금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사회안전망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한 곳에서 “명함을 받고,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꼈다!”는 말에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이미 파편화되고 불평등한 노동시간은 취약층에 집중된 지 오래다.
정책은 상상력이다. ‘택배 없는 날’ ‘동네 편의점 하루 쉬기’ ‘대형마트 주1회 의무휴점제’와 같은 아이디어가 대표적이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과로사방지법’과 ‘최소생활노동시간제’ 같은 사회계약을 논의하는 것은 어떨까. 장시간 노동의 기준은 48시간으로, 법정 노동시간은 35시간으로 재설계하는 것은 어떤가. 주당 최소 15시간 계약을 보장하는 ‘최소생활노동시간’(Living Hours)과 같은 새로운 규칙은 어떤가 등등.
포스트 코로나 과제는 시간의 재구성을 통한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불평등한 시간을 평등한 시간으로 바꾸는 것, 바로 ‘시간의 정치’는 그 시작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