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환 연구실장, 노동사회연구소·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 토론회서 밝혀
지난해 말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다. 제13장 ‘무역과 지속가능한 발전’ 협정에 따라 양국은 “1998년 작업장에서의 기본원칙 및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선언과 그 후속조치”를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ILO 핵심협약 8개를 비준한 반면 한국은 4개를 비준하고 있는 데 머물러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개선 의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인 청사진을 마련할 때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가 23일 오후 서울 중구 바비엥2 교육센터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우회로?(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노동 기준 관련 내용 및 이행 평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노력사항' 앞세워 비준 회피
이날 토론회 발제를 맡은 이주환 연구소 연구실장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정책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실장은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ILO' 또는 '국제노동기구'로 검색하면 2013년 1월부터 현재까지 두 건이 검색되는데, 모두 ILO 핵심협약 비준과 무관했다”며 “새누리당의 논평과 성명에서는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해 8월 ILO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국내법을 거론하며 “당분간 비준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유럽연합 FTA 협정문에 명시된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해서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항이지 강제사항은 아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실장은 “정부·사용자·노동자의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 노력사항인데, 한국 정부가 이를 핵심협약 비준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야당과 노동계의 대응에도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올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국제노동계와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 실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공론장의 이슈로서 충분히 부각됐지만, 법·제도적 틀 변화를 전제로 하는 노사정 사회적 대화는 아직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기 청사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어디에 요구해야 할지, 국내법을 정비해야 한다면 어떤 법부터 어느 정도 수준으로 손을 봐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실장은 “노동계가 ILO 제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제소 이후’ 청사진이 없다”며 “정부의 의지, 장기적인 청사진 및 다른 제도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연구, 노동기본권에 대한 시민교육 활성화에 기반을 두고 사회적 대화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영혼(?) 없는 보고서
ILO 권고에 대한 정부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소연 변호사(법무법인 보다)는 “ILO가 20가지 이상의 개별권고를 통해 노조원의 이름을 직접 언급해 가며 구금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는데 정부가 이행한 경우가 없다”며 “한국 정부는 형식적인 보고서 제출의무는 잘 지키면서도 중요한 답변을 회피하거나, 권고 내용을 실질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한국과 유럽연합의 협정에 따라 시민사회포럼에서 2012년부터 해마다 ILO 핵심협약 비준 등 노동기준을 논의했지만 사용자들의 반대와 한국 정부의 소극성이 맞물리면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제노동기준을 적용하거나 노동관계법을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각종 FTA에 포함된 노동조합은 실제로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데, 위반으로 분쟁 절차에 들어가려면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하기 때문”이라며 “투자자-국가제소 제도를 통해 기업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