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하나가 돼야 이긴다. 민주노총·한국노총 갈라져 있어서는 안 된다. 정규직·비정규직 갈라져선 안 된다. 1천만 노동자 중 10만명만 서울광장에 모여서 하루만 집에 가지 말고 투쟁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노동자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가 살아생전 노동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당부했던 말은 "뭉쳐야 이긴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반면 노동계는 지리멸렬한 요즘, 고인의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30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이소선 어머니 5주기를 맞아 열린 '이소선 어머니 삶과 정신' 토론회에서는 "뭉쳐야 살고, 그래야 이긴다"는 고인의 바람과는 멀어지고 있는 노동현실을 자성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결과 일상적 연대로 위기의 노동운동의 새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는 전태일재단·한국노동사회연구소·청년유니온이 주최하고 <매일노동뉴스>가 후원했다.
좌절·분노로 가득찬 노동현장, 길은 어디에
이날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운동'을 주제로 발제에 나선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인간해방, 노동해방이라는 전태일의 오랜 꿈과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에도 오늘날 노동현장은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며 "70년부터 최근까지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절실한 요구를 내놓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말했다. 전태일과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포악한 70년대보다 최근 노동자들의 죽음이 훨씬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이 이사장은 "그럼에도 노동운동은 이념, 조직률, 조직형태, 연대, 지도력, 투쟁전략·전술, 정치세력화 등 운동의 핵심원리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채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처지에서 힘겨워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집회 현장마다 '단결'과 '투쟁' 구호가 나부끼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권력과 자본의 분할통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이 이사장의 진단이다.
그는 "최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연대의 영역을 넓히려 노력하고 제조·공공부문노조의 공동투쟁이나 조직적 연대가 구체화하는 경향이 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 이해관계로 치고 들어오는 자본의 이간전술에는 여전히 취약하고, 노동자 내부에도 성별·고용형태별·기업규모별 차별과 격차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 이사장은 "단순히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간 통합뿐만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남녀 간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까지 포괄해 통합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규직은 먹고 계약직은 못 먹은 아이스크림
토론자로 나선 가사노동·청년·여성·양대 노총·전문가들은 이원보 이사장이 화두로 제기한 노동시장·노동운동 현황과 문제에 대해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의견들을 제시했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가사노동자들은 전업주부였다가 뒤늦게 생활전선에 뛰어든 중고령 경력단절 여성들이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재외동포까지 대거 진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사노동자의 절대다수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이주·여성이지만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최 대표는 "사실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도 가사노동자 문제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조직화 우선순위에서도 늘 뒤로 밀리고 있다"며 "양대 노총도 무슨 사건이 터지고 나서 연대하지 말고, 일상적인 연대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도 생활 속 연대를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소선 여사가 강조한 '노동의 단결'은 '서로 다름' 속에서 빛나는 것이지만 많은 경우 노동운동은 '서로 다름'을 '구호'로만 통합하고 있다"고 꼬집어 말했다. 김 위원장은 청년유니온 조합원에게 전해 들었던 '아이스크림 사건'을 일례로 들었다.
"이 조합원이 계약직으로 있는 회사의 노조에서 사업장을 방문해 아이스크림을 돌렸는데, 같은 공간에 있던 계약직들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주지 않았다. 이 조합원에게는 정규직과의 임금격차보다 이날 정규직들과 함께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더 큰 상처로 남았다."
김 위원장은 "노동운동의 안과 밖의 불일치를 보여 주는 사례"라며 "연대와 단결은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을 더 넓게 끌어안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지현 여성노조 위원장은 "이소선 어머니는 민주노총·한국노총·정규직·비정규직 따지지 말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말해 현장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인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정규직 고용을 지키기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는다거나 정규직 근로조건만 개선하느라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이나 열악한 근로조건은 뒷전에 두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나 위원장은 "노동자는 원래 혼자서는 힘이 없고 함께 모여야 힘이 생기는, 그래서 태생적으로 단결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전태일 열사 50주기 '2020년 양대 노총 통합' 선언하자"
토론자들의 문제 인식에 대해 양대 노총의 시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승철 민주노총 사무부총장은 이소선 여사가 남긴 가르침의 핵심을 '낮게, 함께, 옳게'라고 규정했다. 이 사무부총장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의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해결하지 않으면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도 밝지 않다"며 "이 싸움을 이기기 위해 조직된 노동자와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가 한목소리를 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민간과 공공, 제조업과 서비스업 노동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하는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옳게'의 중요성"이라며 "적절한 타협과 거래를 통해 순간을 모면하려는 유혹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지, 어머니께서 주신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식 한국노총 사무처장은 양대 노총의 통합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밝혔다. 이 사무처장은 "노동운동의 도덕성·정당성·대표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며 "전태일 열사 50주기가 되는 2020년을 목표로 양대 노총이 통합을 지향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공동사업을 벌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로 임금인상이나 사내복지 개선에 중심축이 쏠려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획기적 전환을 주문했다. 배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운동 위기 극복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대기업 공공부문과 민간 중소기업 간 격차, 남녀 간 격차라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며 "기업별로 주로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가입하도록 돼 있는 폐쇄적인 내부자들의 문호를 활짝 개방해 더 많은 외부자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할 것인가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노조운동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