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경제 망칠 노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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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창] 경제 망칠 노동개혁

노광표 5,125 2016.08.23 10:12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roh4013@hanmail.net)
 
 
푹푹 찌는 폭염 속에서 한 줄기 청량수를 기대했던 국민들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이야기다.
 
이번 경축사는 과거와 달리 남북관계, 통일 문제, 대일본 메시지보다는 국내 정치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임기 말 박근혜 정부의 핵심 열쇠말은 국민과 경제, 국가였다. 6800여자 분량의 경축사 중 국민이란 단어가 20회, 경제가 18회 그리고 국가와 대한민국이 각각 14회, 13회씩 언급됐다.
 
경축사를 관통한 것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계승과 발전이었다. 자랑스러운 조국을 비하하지 말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국가 발전에 함께 나서자는 호소였다.
 
대통령의 경축사에서 유신시절과 새마을운동을 떠올린 것은 왜일까. 근검, 성실 그리고 멸사봉공의 정신은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대통령의 말마따나 한국 경제의 성장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서는 안된다. 화려한 성장 뒤에 감추어진 빈부격차, 노동인권의 말살 그리고 배금주의는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성장과 효율의 논리가 공생과 연대의 원리를 억압할 때 국민들의 저항은 예외 없이 터져 나왔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이 그 역사적 징표이다. 대통령의 전근대적 경제 인식은 노동 문제에 그대로 투영된다. 인사만 회전문이 아니라 정책도 돌려막기다. 노사정 합의가 한국노총의 거부로 파탄 났고, 그 결과 노사정위원회는 개점휴업 상태이다. 정부·여당이 추진한 노동4법은 4·13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용도 폐기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개의치 않고 노동개혁을 다시 추진한다고 한다. 이름은 노동개혁이지만 실상은 노동개악이다. 개혁의 골갱이는 없어지고 쭉정이만 남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노동개혁의 무산 책임을 노동조합 탓으로 돌리며 점잖게 훈계한다.
 
“노동개혁은 미래세대를 위해, 경제 고용절벽을 막기 위해 한시도 미룰 수 없는 국가 생존의 과제이다. 기업주는 어려운 근로자의 형편을 헤아려 일자리를 지키는 데 힘을 쏟고, 대기업 노조를 비롯해 형편이 나은 근로자들은 청년과 비정규직 근로자를 위해 한 걸음 양보하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불황과 고용 위기의 상황에서 양보할 집단은 재벌대기업인가, 노동자들인가. 한국 노사관계는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대기업 오너들의 보수 총액을 보면 경제와 기업 위기 상황이 무색해 진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상반기 보수로만 23억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총 41억원을 받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8억원, 신영자 이사장은 13억원을 보수로 챙겼다. 이들은 모두 구조조정 기업이거나 검찰수사 대상자들이었다.
 
현 정부가 추진한 대표적인 노동개혁 정책 중 하나는 임금피크제 도입이었다. 정부와 재계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경우 31만명의 정규직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올 6월 말 기준 10대 그룹 상장사 직원 수는 지난해 말보다 거꾸로 4753명(0.7%) 줄어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노동개혁의 결과이다.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은 처음에는 파견노동 허용 및 비정규직 사용기간 4년 연장에서 이제는 대기업노조의 기득권 타파로 바뀌었다.
 
노동개혁의 종착점은 성과연봉제 등 임금체계 개편과 상시적 퇴출제 도입이다. 국회에서 법률 통과가 쉽지 않자 법도 무시한 채 가이드라인을 통해 정책을 추진한다. 진정 노사관계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후진적 경제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과 유지를 더 이상 기업에 맡겨 놓지 말고 정부가 앞장서 감독하고 규제해야 한다.
 
재벌체제와 수탈적 원·하청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한국 경제 공멸의 길이다. 정부 주도의 어설픈 노동개혁보다 더 시급한 것은 경제민주화이다.
 
 
*이 칼럼은 8월 23일자 경향신문(시론)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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