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노동 존중' 의미를 오염시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작성: 박영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지난해 5월 임기를 마무리한 문재인 정부의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발표한 120대 국정과제 중 고용노동부 소관 일곱 가지 과제의 중분류 묶음 이름이다. ‘노동 존중 사회 실현’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63번째 과제명이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새로 집권한 정부는 전임 정부가 사용했던 개념과 용어를 재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법이다. 특히 국정과제에 사용되는 언어에는 그 정부가 중시하는 가치가 함축되어 표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정권 연장에 성공한 단임 대통령들도 전임 정부와 용어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념과 노선을 중시하는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당의 정부가 사용한 ‘노동 존중’이라는 용어를 재활용했다. 왜 그랬을까?
‘노동 존중 사회’를 재활용한 윤석열 정부
노동 존중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에는 산업재해 예방, 공정한 노사관계 구축, 상생의 노동시장 구축, 고용안전망의 지속성 제고 등이 각각 하나씩 굵은 글씨의 국정과제로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검찰의 부부장 검사가 고용노동부에 파견됐다. 그 뒤로 노조의 불법행위를 엄단하겠다는 법치주의 선언과 조치가 잇따랐다. 나아가 주 52시간을 넘는 장시간 노동에 대한 노사 자율의 선택권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지속 가능한 고용보험을 위해 실업자의 실업급여 반복수급을 제한하고 급여 하한을 더 삭감하겠다고 나오고 있다.
정부가 ‘건설노조의 비리를 엄단하겠다’고 나온 뒤에 비노조원들의 취업이 더 쉬워지고 그들의 실제 일당이 훨씬 더 올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검경의 수사로 노조들의 힘을 뺀 뒤에 건설업체의 담합과 중대재해가 더 늘어나지 않을지 걱정되기만 할 뿐이다. 한때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사단체가 간여하는 실업보험기구의 절차를 간소화해서 실업자들에게 원스톱 급여를 제공하겠다는 식의 구상은 할 줄 몰라도 결국 가장 아랫단의 힘없는 실업자를 더 옥죄는 것이 ‘노조 엄단 노동 존중’의 결론이라고 하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노동계 인사 발탁도 본질 가리는 포장일뿐
윤석열 정부의 인사 철학에도 이 같은 정신이 느껴진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은 한국노총 출신 김영주 의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에 이정식 한국노총 전 사무처장을 발탁했다. 하지만 두 정부의 장관 인사에서 공통점은 이것뿐이다. 가장 최근의 차관 인사에서도 넓은 의미의 노동계 출신인 이성희 차관이 임명됐지만 이를 노동 존중이나 친노동의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다. 노동계 출신 인사를 내세워 한 겹 포장만 두른 뒤에 연일 대통령을 칭송하고 맹종하는 허깨비 장관으로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장·차관들의 말에서도 노동 존중은 사어(死語)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정식 장관의 취임사에는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라도 구구절절 들어가 있었지만, 1년여 뒤에 임명된 이성희 차관의 최근 취임사에는 훨씬 더 짧은 길이에도 ‘법치주의’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등장할 뿐 ‘노동 존중’은 한 번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점점 더 줄어드는 일자리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던 제조업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아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들을 위해 일하겠노라고 공언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 일은 대부분 기업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노조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언사를 멈추지 않았다.
대중을 속이고 자신의 잘못에도 눈감고 싶은 욕망
이 같은 방식의 정치행태를 두고 ‘이중언어(Double Speak)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정 성향의 정치인들이 종종 실제 의도나 정책의 본질을 숨긴 채, 기업과 부유한 계층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마치 하층계급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식의 언어 전술로 연막작전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서 그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다수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더 큰 기득권 집단의 이익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집착하는 포퓰리즘 정치와 한 몸이 되기도 한다.
언어를 제 맘대로 쓰거나 그 의미를 오염시켜 진실을 호도하거나 최소한 분간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권력자는 숨겨진 정책적 의도를 더 쉽게 관철할 수 있다. 현 정부는 대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감세를 추진하면서 노동 존중을 표방하고 노조가 이권 카르텔의 주범이라고 계속 선전하면, 대중의 일정 부분은 자신들에게 동조하게 된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방식이 먹혀 들어가는데 노조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이유로 전도된 언어사용과 그들 편에서 진실과 거짓 자체를 분간 못 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스스로 눈감으려는 행태를 용인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