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동야(東野) 김금수 선생님을 보내며…
김금수(1937.12.25. ~ 2022.10.25.)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 해방 이듬해 농민들이 ‘농민에게 땅을 달라’며 시위하다 파출소에 잡혀가 맞는 것을 보며 사회의식을 키웠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암장>이라는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후 ‘민주민족청년동맹’ 등 진보적인 청년 단체에서 일 하다가 1964년 8월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1976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노총에서 일했다. 한국노총에서 해직된 후, 1986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전신인 ‘한국노동교육협회’를 만들어 노조 간부들에 대한 교육 활동을 했다. 1995년에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장,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그리고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을 역임했다. 끊임없이 연구와 토론, 저술 활동에 매진했으며 2020년에는 <세계노동운동사>를 완결했다. 상임고문으로서 혁명가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고인이 세상을 떠난 10월 25일 이재유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아래 글은 지난 10월 27일 있었던 추모의 밤 「동야 김금수 선생님, 당신을 기억합니다」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박중기 선생님께서 낭독하셨던 추모사를 옮긴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섭섭하네, 참으로 너무 허무하고 섭섭하네.
어릴 적 꿈이었던 통일의 역군이 되고자 한 맹세는 헛말이란 말인가.
우리가 만난 것은 70여 년이 훨씬 지났네. 1951년 낙동강물이 핏빛으로 물들던 때, 뚝마다 거리마다 피난민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찌를 때, 이수병과 더불어 우리는 삼총사처럼 행동하며 자란 것, 이후에 ‘암장’으로 성장했네. 함께 책 읽고 토론하며 밤을 새우고, 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던 젊음이 모두 다 세상을 떠나고 당신마저 갔으니 나는 어쩌란 말인가.
8.15 해방 후 이래저래 시끄럽더니, 전란으로 갈라진 나라는 종잡을 수 없어, 옳고 그름을 살필 줄 아는 똑똑이가 되자! 이승만 정부의 무능, 부패, 무법천지의 시기에 4.19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는 자유 토론이 가능한 공간을 확보하게 된 거지. 그때 부산에서의 경험을 살려 평화 통일의 꿈을 조직으로 엮어가던 자네를 기억하네. 민족민주청년동맹 중앙맹부 간사장을 맡았고, 각 지역 조직들의 전국 연합단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실무 책임자로 일하던 자네는 불철주야 사람들을 모으고, 평화통일의 꿈을 조직했지. 희망찬 날들이었어.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군인들의 쿠데타로 우리의 꿈은 꺾였어. 그리고 소위 ‘인혁당 사건’에 휩쓸리게 되었지. 혁신운동을 적대시하던 정보당국이 우리를 싹쓸이하듯 끌고 가 조직으로 엮어 ‘이적단체 인민혁명당’을 만들어 조작하고,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성공키 위해 그리고 시민들의 반대를 진압하기 위해 인혁당을 조작하여 이용하려했지.
출소 후, 자네는 사상범의 누명 때문에 복직이나 취직이 불가능해져 생활이 무척 어려웠던 시간도 있었지. 그런 시절에도 유연하고 여유를 잃지 않았지.
그 뒤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한국노총 기획실에서 일을 하며 노동운동의 현재 상황과 기초부터 전망까지 살필 수 있는 자네 평생의 길을 개척한 거야.
1975년 4월 19일, 줄줄이 엮어 열 두 시간 되지 않아 도예종, 이수병, 여정남 등 8인의 사형 집행을 강행했지. 단짝 이수병을 기억하며 자네는 자주 눈물짓곤 했지.
한국노총에서 10여 년, 그리고 새로운 노동운동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다듬어나가기 십 수 년, 민주노조를 설립하고 자유롭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위한 교육과 학습을 끊임없이 해온 자네가 지금의 민주노조의 기틀을 닦아냈지. 거목이 그렇듯, 가지가 길면 모순도 있는 법. 더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도 나는 참고로만 들었어. 이후 노동당까지 만들 수 있는 노조가 되었지. 항상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민주노총의 산파였고, 산별노조, 진보정당의 디딤돌이었어.
자네가 세우고 다듬어 온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후배들이 잘 발전시킬 것이며,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도 잘 될 것으로 믿고 있네. 자네가 평소에 존경하던 이재유 선생 기념사업회도 후배들이 생각한 바대로 잘 이끌어나갈 것으로 믿네.
한 몸처럼 지낸 70여 년 동안 자네 찡그리는 얼굴을 본 적이 없네. 험한 시대를 살며 세상에 해를 끼쳐본 적이 없고, 나와의 우의가 어긋나봄이 없는 친구야. 잘 가시오.
명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