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우리는 복지국가인가?
작성: 이주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코로나19로 복지국가가 흔들린다. 우리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사회적 보호망을 갖추고, 케인즈주의의 경험을 되살려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국민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던 서구 복지국가에서도 그런 지원이 노동시장의 내부자에게 집중되어 플랫폼 경제의 어두운 뒷면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작 우리는 K-방역의 성과에 눈멀어 재정 건전성이라는 애매한 늪을 빠져나오고 있지 못한데 말이다.
북유럽의 진보적 사회학자 고란 테어본(Goran Therborn)은 대부분의 일상적 국가 행위가 국민의 복리에 대한 서비스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만 복지국가로 분류될 수 있다는 이상적인 기준을 만든 바 있다. 물론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가끔은 객관적 지표나 이론적 근거는 모두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그저 내 맘대로의 잣대와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고 싶어진다. 내 기준은 걷기도 힘든 노쇠한 몸으로 자기 키를 훨씬 넘는 짐에 짓눌린 채 리어카를 끄는 노인이다. 차가 막힐 때마다 볼 수 있는 이 고통스러운 광경은, 복지지출이 늘어났든 말았든 나에게는 우리가 아직 복지국가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불과 얼마 전, 60년 동안이나 빈곤층을 옭아매온 생계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60년이나 기다렸는데도 아직도 예외가 남아, 자녀가 부자라면 서로 왕래나 도움이 없다 해도 수급자가 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기초연금을 받는 수급자의 경우 그 기초연금만큼 생계급여가 차감된다는 것이다. 기초연금의 보편성을 훼손하고 역진성을 강화하는 이런 제도를 바꾸려면 또다시 60년을 기다려야 하는가?
사회보험에만 한정해도 우리는 반쪽짜리 복지국가에 불과하다. 고용보험만 해도 가장 안정적인 정규직이 가장 많이 가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한 비정규직은 과반 이상이 미가입 상태이다. 비정규직의 가입률을 과반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전에는 전국민 고용보험은 화려한 수사에 그칠 우려가 있다. 다른 한편, 직역별로 나뉜 노령연금은 기존의 계층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보수주의적 특성을 가지며, 보편성을 가장 많이 획득한 전국민 의료보험조차 장기 혹은 희귀 질병자의 완전한 보호망이 되고 있지는 못하다.
사회서비스는 어떠한가? 그 양과 질에 대한 논란을 접어두고라도, 복지국가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많은 노동자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핵심적인 서비스가 아직도 민간에 맡겨져 제공되고 있다.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에 더해 폭언과 폭행, 성희롱에 노출된 많은 돌봄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어가야 할까. 현재의 복지국가모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기초한 암묵적 사회계약(“postwar settlement”)하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급변하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전형적으로 자영업화된 노동자에 대한 적절한 보호를 제공해 주는데 한계가 있다. 이는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이 이전보다 훨씬 더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하여, 이를 반영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이다.
기본소득이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무조건적인 현금 지급이라면, 기본서비스는 주택, 돌봄, 교육, 의료 등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무상, 혹은 무상에 가까운 서비스를 의미한다. 충분한 기본서비스는 기본소득을 상쇄할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의 지급액수가 낮더라도 기초적인 삶의 질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본서비스, 특히 돌봄과 보육과 같은 사회서비스와 교육서비스는 중산층 수준에 맞춘 보편적인 양육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저소득층 아동의 생애기회를 제고한다. 노동연령대의 시민에 대한 복지국가정책으로도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는 함께 제공되는 것이 맞다. 기본소득은 고용에 기반한 기존 복지국가가 핵심적인 노동시장의 내부자만 보호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자칫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영구화하고 저숙련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통해 노동력의 재교육과 숙련형성, 고용안정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자유만큼 일할 수 있는 자유도 중요하다.
그러니 기본소득과 보편적 사회서비스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는 한편, 국공립 보육시설 및 서비스의 대대적인 확충을 통해 여성의 일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면 좋겠다. 적절한 규모의 공공주택이 시민에 대한 기본서비스로 제공되고 평생교육에 대한 지원도 이루어졌으면 한다. 자, 이러한 완성된 복지국가로의 첫 걸음을 생계급여와 기초연금의 중복 수급을 허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고령층 대상 부분 기본소득으로의 발전을 전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