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요코하마 단상/이주희

연구소의창

[연구소의 창] 요코하마 단상/이주희

구도희 16,360 2014.07.28 10:00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j.lee@ewha.ac.kr)
 
2014년 7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월드컵처럼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사회학대회가 열렸다. 무려 6,000명의 사회학자가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이 거대 학술대회의 주제는 불평등. 노동과정이론으로 유명한 마이클 뷰러워이(Burawoy) 교수가 세계사회학회(ISA)의 학회장이어서이다. 지나간 [연구소의 창]을 들여다보니, 노동현안에 대한 토론으로 이미 뜨겁게 달궈진 상태였다. 자칫 한가한 소리로 들릴까 걱정되었지만, 잠시 머리를 식힐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주일간 이국의 여름 바닷가에서 겪은 학회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대회는 전 세계 노동사회학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가이 스탠딩(Standing)의 ‘프리케어리어트(Precariat, 불안정 계급)’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착취’의 대상도 아닌, 노동시장에서 벗어난 이들. 적정한 소득과 집단적 대표성이 보장된다면 오히려 이들이 조직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노동의 본질을 구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스탠딩의 주장이 아직도 좀 낯설긴 하지만, 기본소득과 참여민주주의, 공공성의 확장과 같은 그의 대안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은 무척 반가운 변화였다. 
 
나는 ‘비평가를 만난 저자(Authors Meet Critics)’ 세션에서 고란 테어본(Therborn)이 2014년 발표한 신간,『불평등으로 인한 학살의 장』(Killing Fields of Inequality: Polity, 2014)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이 책은 빈곤 뿐 아니라 불평등으로 인한 격차 자체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까지 가져오는 엄청난 차이에 주목한다. 
 
자본주의화로 무척이나 불평등이 증가한 러시아와 우크레인에서는 1990년보다 2009년의 기대수명이 오히려 더 낮아졌다. 유사한 시기 자본주의국가 내에서도 소득에 따른 기대수명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소득분포 하위 20%의 남성은 상위 20%보다 12.5년 더 빨리 죽는다. 소득만이 문제가 아니다. 1990년대 네덜란드에서 유럽의 다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 비해 초등학교 교육만 받은 경우 10만 명 중 천 명에서 이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75살 이전에 더 많이 죽는다고 한다. 실업도 많은 사람을 죽인다. 실업자의 아내는 다른 기혼 여성보다 더 먼저 죽는다. 
 
불평등은 단지 가난한 사람과 부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오스카상을 수상한 배우는 수상하지 못한 경쟁자보다 3년 더 오래 산다. 노벨상을 탄 과학자는 일반 과학자보다 더 오래 산다. 이처럼 신분상의 불평등은 영화와 과학의 성지에 있는 사람의 수명마저 단축시킬 수 있다. 그렇다. 불평등으로 인해 사람은 더 빨리 죽을 뿐 아니라,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일도 매우 많이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위와 건강, 수명을 연결시키는 심신의 기제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매우 적다. 그렇게 많은 사회과학의 학문분야가 존재함에도, 또 사회과학 중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가장 관대한 입장을 보유하고 있는 사회학조차 그동안 불평등의 다차원성에 대해, 또 그것이 초래하는 끔직한 결과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학회 기간 내내 아프게 마음을 맴돌았다. 
 
테어본이 밝힌 주된 불평등의 기제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은 바로 거리두기(“distanciation”)이다. 부자와 빈자는 이제 서로 너무나 달라져서 서로를 잘 모른다. 가난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빨리 죽는가? 교육받은 부자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더 클 터이지만, 이미 오래 살 수 있는 그들은 그 해결책에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 이제 함께 배우지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는 이들은 서로에게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는 극소수의 엘리트에 해당하는 일만이 아니다. 입직구도 다르고, 자격조건도 다른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이들 간 이러한 무관심과 적대감을 조장하기 위한 사용자 전략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을 터이지만.
 
불평등을 테어본은 인간의 발전과 성취로 이룩한 가능성으로부터 배제된 상태로 본다. 노동시장의 2등 시민과 언더클래스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존감과 존엄,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심하게 제약받으며 살고 있다. 단순히 부자 부모를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비싼 값에 판매될 수 있는 적절한 재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차등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차별은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들을 재생산해내는 주된 기제가 된다. 
 
이렇듯 대규모 학회에서는 이제 교수가 된 대학원 시절의 동료, 그리고 옛 스승도 마주칠 수 있다. 제자들의 초청으로 7월 초 한국도 방문하였던 에릭 올린 라이트(Wright)의『리얼 유토피아』에 대한 발표는 한국 뿐 아니라 요코하마 세계 사회학대회에서도 많은 이목을 끌었다. 이 모든 불평등과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해 온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내부로부터 침식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공동체화(“commonification”)을 위한 다차원적인 노력이 필요한 바로 이 때, 
 
테어본 책의 마지막 글로 짧고 두서없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제 투쟁이 막 시작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편에 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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