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투쟁사업장에서 맞이하는 구로동맹파업 20주년

노동사회

장기투쟁사업장에서 맞이하는 구로동맹파업 20주년

편집국 0 3,374 2013.05.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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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중들은 지금까지 엄혹한 암흑시대 긴 역사의 터널을 뚫고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민중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노림수와 수탈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식은 조금 변한 것 같으나 지배구조는 그대로입니다.”

-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자료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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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moon_01.jpg20세기의 전태일들은 21세기에도……

어느 순간부터 장기투쟁사업장이라고 불리는 사업장들이 매년 똑같은 이름으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몇 년이 지나도 별반 다르지 않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민주노총 집회장에서, 개별사업장 집회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가끔은 연대주점이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맞대게 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말았다. 어쩌다 몇몇 사업장의 이름은 빠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지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반대로 사용주들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의 원초적인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30여년의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이 분신을 했고, 민중들이 학살을 당했고, 대규모 민주화 운동도 했고, 노동자 대투쟁도 거쳤고, 민주주의도 확장되었고, 그 사이 국민소득도 수십배가 늘었다는데, 도대체 왜 노동자들의 삶은 이토록 팍팍한 걸까. 

그런데 정말로 속상하는 것은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씩 투쟁하고 있는 이들 노동자들의 주장이 정말로 별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노동자들의 요구가 그리 대단한 것이겠냐마는,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부당노동행위와 노조탄압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을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본을 댔지만, 우리의 노동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 하나 생산할 수 없으니, 적어도 이러한 사실만이라도 인정하라는 것이다. 

잘살아 보자면서 농민들 조지고 노동자들 허리 졸라매면서 몇 십년을 그렇게 후려치더니, 툭하면 레파토리 바꿔가며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들만 되풀이한다. 경제가 어려우니 조금 참고, 선진국 문턱이니 조금 더 참고, 경제위기니까 당연히 참아야되고, 세계화 시대 뒤쳐지지 않으려면 또 참아야 된단다. 그러는 사이 20세기 전태일이 21세기에도 살고 있고, 군사정부에서 민주정부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국가권력의 폭력은 바뀐 게 없다. 파업 며칠 했다고 2천여명의 노동자들을 짜른 1980년대나, 수천명씩 무더기로 정리해고를 자행하는 2000년대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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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텍알시디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불인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출처:매일노동뉴스 ]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형식은 조금 변한 것 같으나 지배구조는 그대로”인 현실 앞에서, 그때도 싸웠고 지금도 싸움터로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가? 현실이 변했다면 20주년 행사는 말 그대로 기분좋은 기념행사가 되었을 것이다. 고단한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자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가 흑자를 냈으니 임금을 인상하라는 노동자들의 주장은 마땅한 법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시작한 임금협상투쟁이 4년을 넘기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자본측의 차별과 감시, 탄압으로 ‘적응장애’라는 집단 정신질환을 얻고, 근로복지공단은 자본측의 책임이 없다며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은 산재를 인정하라고 또 다른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20년 전 구로동맹파업의 주 무대였던 구로2공단 사거리에서 불과 10여분 떨어진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바뀌지 않는 현실을 하루하루 체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단 장기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도시의 주변부를 배회해야 하는 도시빈민들의 삶에서부터, 주기적인 해고와 저임금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명에 달하는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열사들의 주검 앞에서 ‘세기가 바뀌어도 왜 노동자들의 삶은 이 모양’이냐고 목놓아 통곡하던 일도 엊그제 일이다. 근로기준법 준수와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구속자를 석방하고, 노동법을 준수”하라는 구호 속에 20년이라는 세월의 변화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구로동맹파업 20주년 사업을 준비하면서 조직위원회는 많은 사업을 준비했다. 구로동맹파업의 전모를 발굴하는 사업에서부터, 여전히 변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을 알려내고자 하는 사업까지, 단순히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만 준비하지 않았다.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도 그러한 정신으로 참여했다. 남부지역 투쟁사업장들을 중심으로 도보순례가 있었고, 남부지역 노동열사 추도식도 있었다. 자전거 행진에도 참가했고, 다양한 전시회도 진행했고, 문화제 때는 연대주점도 함께 했다. 20여년 전 노동자들의 삶과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바뀐 것처럼 말하지만 바뀌지 않은 현실을 드러내고자 노력했고,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바꾸는 것은 우리 스스로임을 자각했다.

시급 몇 백원을 올리겠다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이 4년을 넘게 투쟁해야 하는 현실,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현실, 단지 여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십년을 일하던 직장에서 순식간에 쫓겨냐야 하는 현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현실, 온갖 욕설과 인격모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하는 현실,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해야 하는 현실,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현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야 하는 현실, 제발 있는 노동법이나마 제대로 지키라며 호소하는 현실, 1985년의 현실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기념사업 자료집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문구처럼 노동자들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실이 바꾸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한.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