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진한 ‘사회적’ 『노동사회』가 돼주길

노동사회

더 진한 ‘사회적’ 『노동사회』가 돼주길

편집국 0 2,622 2013.05.17 10:17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출범할 때였다. 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의 이름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놓고 식구들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것을 기억한다. 다행히 연구소 이름을 정하는 까다로운 숙제가 해결된 터라 결론은 비교적 쉽게 내려졌다. 창립 당시에는 ‘노동사회연구’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노동사회(Labour & Society)』로 이름을 바꿨다. 

그 후 몇 년 뒤 고려대학교 강수돌 교수가 생태적 관점에서 ‘노동사회 극복’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가 언급한 노동중독의 위험이 잠재된 ‘노동사회’ 개념이 연구소의 잡지 이름과 같았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다. 

다시 첫 마음으로, 노동‘사회’에 주목했으면 

원래 기억은 나중에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초창기부터 나는 연구소 명칭에서 ‘사회’라는 단어에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굳이 ‘사회주의(soicalism)’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적(social)’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것은 연구소가 생산할 정책과 이론, 담론들이 노동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 예컨대 경제와 사회정책 등의 폭넓은 의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리고 이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행된 ‘사회개혁 투쟁’ ‘사회운동적 노동운동’, ‘사회적 대화’ 등등의 논의에는 모두 이와 유사한 종류의 ‘사회’ 개념이 녹아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노동사회』의 영어 명칭은 공식적으로 ‘Labour & Society(노동과 사회)’이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Social Labour(사회적 노동)’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단순히 ‘Labour Society’였다면 그것은 ‘노동계’를 가리키는 단어와 동의어일 것이고, 이것은 노동조합이나 노동단체 등 이른바 ‘노동판’ 사람들의 모둠을 지칭할 뿐이다. 그러나 ‘노동사회’는 전체 사회의 문제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또한 노동문제를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슈로 확장시켜 나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월간 『노동사회』가 ‘제100호 발간’을 맞으면서 이 ‘사회’라는 개념에 다시 한번 주목했으면 한다. 

첫째, 개인간의 경쟁을 자원분배의 최적 해법이라고 믿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달리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은 공동체 내부의 연대와 공리를 훨씬 더 중시한다.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억압하지 안 되, 공존을 방해하는 편협한 이기주의를 걸러낼 수 있는 지혜를 키워나가는데 『노동사회』가 더 많은 도움을 줬으면 한다. 

둘째, 노동계 내부의 협소한 이해를 극복하면서 사회적 책임과 신뢰를 중시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최근에 와서야 불거진 노동계의 각종 비리 사건들은 그 자체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 뿐 아니라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결함으로도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노동사회』는 노동조합운동의 사회비판을 두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노동조합비판을 한발 앞서 노동운동가들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셋째, 사회권의 가치를 더욱 넓고 높게 주창하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지난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의 비정규법안에 대해 근본적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했을 때, 노동계는 일제히 환영과 지지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독립적 국가기관인 인권위원회가 왜 민감한 노동문제에 대해 굳이 입장을 밝히고 나섰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이번 결정은 그동안 국가권력에 의한 개인의 자유권 침해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인권위가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징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노동사회』는 이처럼 운동으로서 ‘노동’뿐만 아니라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의 위상을 제대로 세워주기 바란다. 

때론 메마른 분노 적시는 인간의 감동을 

정신 없이 일을 하다보면 가끔 ‘운동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인지, ‘삶을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힘들 때 튀어나오는 푸념일수도 있지만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노동운동 언저리에 있다 보면, 살갑고 다정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매번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시시비비를 따지게 되는 메마른 일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힘없는 노동자들이 강자에 맞서 단결하는 과정은 뜨겁고 감동적이다. 굴복을 강요하는 자본과 권력을 이겨낼 수 있는 끈질긴 연대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영웅적 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항상 승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일상적인 전투를 감당해낼 수 있는 휴머니즘의 철학과 미래에 대한 낙천적인 정서가 동시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노동사회』가 문화와 교양을 통해 이런 일을 대신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문화와 교양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이거나 주제분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동사회』가 연구소의 공식발간물인 만큼 연구 성과와 이론적 내용을 담은 글들이 잡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한 분석을 담고 있는 『노동사회』의 논문 행간에서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깊고 따뜻한 통찰을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한다. 때로 현장 노동자의 글과 이야기를 통해서 살아있는 정책과 대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끔씩이라도 한 개인의 문제를 통해 군중과 세계의 ‘진실’을 읽을 수 있는 감동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이것은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중단 없이 10년을 전진해온 『노동사회』의 오기와 저력을 믿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0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