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조끼와 남색 조끼가 섞여 있을 때 아름답다

노동사회

빨간 조끼와 남색 조끼가 섞여 있을 때 아름답다

편집국 0 3,864 2013.05.17 09:58

 


sjbek_01.jpg지금 시각은 새벽 2시33분. 어제는 저녁 9시에 집에 들어왔다. 간만에 일찍 들어온 셈이다. 뉴스를 보다 잠깐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번쩍 떴다. 몇 시지? 2시다. 잠을 더 청해 봐야 시간만 죽이는 것 같아 바로 세수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글을 써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아마도 너무 쉽게 승낙을 해버렸나 보다.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빨리감기를 하고 있는 비디오의 화면처럼 몇몇 장면이 스쳐가지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그래, 우선 무미건조하고 자동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전북지부 현대자동차전주비정규직지회!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곳의 정식명칭이다. 이름부터가 참 길다. 

비 오는 날 소주 한잔과 눈물, ‘하연투’의 건설

·2004년 9월 하청연대투쟁위원회(하연투) 출범. 노조 건설을 위한 공개활동 시작. 
·2005년 2월23일 오후 5시, 230여명의 조합원과 100여명의 원청노조 간부와 조합원 그리고 지역동지들의 지지와 엄호 속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엔진부 교육실에서 지회 설립총회 개최. 
·3월16일 임단협 1차 교섭부터, 4월14일 5차 교섭까지 회사측은 한번도 참석하지 않음. 당연히 교섭 결렬. 
·현재는 원·하청 공동투쟁(출근투쟁, 집회 등)을 끊임없이 배치하고 실천하고 있음. 여러 매체를 통해 비정규직철폐투쟁의 모범으로 일컬어짐.
 

이것이 현대차 전주공장의 원·하청 공동투쟁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게다. 이 모든 게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았음은 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라면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이제까지의 과정 속에는 비정규 동지들의 한과 설움, 노력이 묻어 있고 정규직 노조의 간부와 조합원들의 고뇌가 숨어 있다.

며칠 전, 전주 코아 백화점 앞에서 ‘비정규직 개악안 저지 결의대회’가 열렸다. 집회가 끝나고 몇 명의 간부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 한 동지가 갑자기 멈춰 서서, 

“저기 교회 하나 보이죠? 저 곳이 우리가 처음 만나서 현장을 조직하자고 모인 곳입니다.”
라며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아주 낡고 오래된 교회를 가리켰다. 
“저 교회에 아시는 분 계셨어요?” 
내가 무심코 말을 건넸다. 지회장님이 대답을 거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처음에 우리가 이거 준비한다고 모였을 때 돈이 없기도 하고 여럿이다 보니 어디 가는 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차 마시러 다방으로 갈 수도 없고. 또 우리가 정식 노조가 아니니까 어디 반겨줄 만한 곳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생각하다 찾은 곳이 저기예요. 그 날, 그러니까 처음 모인 날, 캬, 하필이면 비가 오네. 모여서 소주 한잔하는데, 얼마나 우리 신세가 처량해 보이던지…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날 날씨가 묘하게 우리 신세랑 맞아 떨어져서 더 결의가 생겼는지도 몰라.”
지회장님이 농담반진담반 섞어서 말씀을 하고 특유의 웃음으로 넘긴다.

“조직 만들었다고, 하청 것들이 눈에 뵈는 게 없나” 

작년 9월경이다. 당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도 비정규직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불법파견 진정을 내놓은 상태였다. 이걸 계기로 뭔가 힘있게 하긴 해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비정규직 동지들과 정규직 동지들간의 고민이 오고 갔다. 그러한 논의 과정을 통해 회사도 대충 눈치로 알고 있는데 숨겨봐야 뭐 하겠냐, 차라리 공세적인 전술로 가자는 결정을 했다. 그래서 ‘하청연대투쟁위원회(하연투)’라는 현장조직을 건설하며 공개적으로 회원을 모집했고, 200여명으로 출발하여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하연투의 체계는 노동조합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시간 날 때마다 현장순회도 하고, 활동을 담은 유인물도 내고, 매일 저녁이면 사람 만나기 위해 약속잡고, 교육도 배치하고, 투쟁도 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동지들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모범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원·하청 공동투쟁이 모범적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계속 직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원·하청 노동자들 사이에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작년에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차별철폐주간사업’을 진행했다. 마지막 날 연극공연을 했는데, 하연투 동지들이 많이 갔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서는 원·하청 노동자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총 파업도 아니고 비정규직차별철폐주간사업 때문에 잔업을 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퇴근하는 것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여러 말들이 오갔다.

“하청 것들이 이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조직 만들었다고 정규직한테 달라 들어!”
“정규직 노조는 뭐하냐. 너희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냐, 정규직 노동자의 노조냐?”

이런 식의 비방이 원청 노조와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계속적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현장의 정서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회사측의 ‘장난질’이 일정정도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하청 동지들은 일부 원청 조합원들의 도발을 맞받지 않고 꾸준히 그들의 생각이 뀔 때를 기다렸고, 원청 노조도 계속적인 현장조합원 설득과 교육을 진행하여 이를 슬기롭게 잘 극복했다. 

이러한 사소한 갈등들은 계속 반복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복잡하지만, 작년 추석 연휴 마지막날에는 특근 문제와 관련하여 현장의 라인이 섰고, 이 때문에 또다시 원·하청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밖에도 현장에는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러저러한 일들이 계속 생겨났다. 그러나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갔을지도 모를 이러한 ‘사소한 갈등’들은 되려 원청 노조와 하청 동지들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호 믿음과 신뢰를 쌓아 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집들이’ 겸한 급박한 지회설립 논의 

그러던 어느 날, 김효찬 동지가 내게 전화를 했다. 
“저, 좀 급하게 한 번 만날 수 있어요?”
“예,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동지가 편한 시간으로 하죠.”
“오늘 저녁에 어때요?”
“예, 그럼 지역본부 근처에서 뵙죠.”
김효찬 동지의 짧고 굵은 목소리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며칠 전에 지회설립 수순을 차분히 논의하고 밟아가자고 했고, 어제도 원·하청 논의와 결정 속에서 풀어가자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온 터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 정규직, 비정규직, 금속노조 전북지부의 나까지 3주체가 모두 모였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지회설립을 당장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제시하는 날짜는 바로 코앞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2, 3주 정도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갑작스럽지만 준비해서 잘 만들어 봅시다.”

그 날 현장상황을 듣고 논의 끝에 주체들 모두 당장에 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회설립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각자 맡을 일을 나누었다. 나는 합숙을 제안했고 모두들 흔쾌히 승낙했다. 이 때가 실제 지회 설립총회가 이뤄지기 열흘 전 이었다. 

그리고 지회설립 4일전, 우리는 어느 아파트에 ‘아지트’를 차렸다. 현재 지회 산업안전부장을 맡고 있는 동지의 집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간 날이 이사온 지 하루 된 날이었다. 비밀이 새지 않게 연락을 했고, 지회설립준비위 동지들이 하나 둘 모였다. 어느새 20여명이 모였고, 우리는 거기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노동조합 준비위를 구성한다. 지회의 명칭은 가칭 현대자동차전주사내하청지회로 하고, 2005년 2월21일 오전부터 공개적으로 조합원 가입을 받아 23일에 지회설립총회를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합의사항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 아파트에서 3일간 지회설립을 위한 작전을 짰다.

우선 조합원 가입 목표는 300명이다. 이 숫자를 받으려면 개별적으로 하지말고 집단적으로 업체별 조회를 열어 그 자리에서 설명하고 바로 가입원서를 받는다. 무조건 ‘속도전’으로 한다. 우리가 장악하지 못한 업체는 간담회를 긴급히 배치해서 가입원서를 받는다. 첫날인 21일(월요일)에 가입원서를 다 받지 못하면 22일, 23일은 회사측의 방해로 받기 힘들 것이다. 어떤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모르니 비상연락망을 구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칙과 방법이 3일간의 논의 속에서 모두 결정되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공장 밖에서 노조를 설립하고 난 이후에 조합원을 공개적으로 받은 경우는 있어도, 이번 경우처럼 공장 안에서 조합설립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조합가입을 받은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사례는 없었지만, 목표한 300명을 모두 가입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총회장소 또한 노조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 회사의 엔진부 교육장이었다. 

이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내가 금속노조 전주지부에 현대차전주비정규지회 설립총회에 관해 보고를 하자 지부의 동지들은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현대자본이 그 장소를 내주겠냐, 또 그렇게 설립신고도 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은 현장의 비정규직 동지들과 엄호·지지하는 정규직 동지들의 힘과 마음을 믿었다. 그래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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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지회와 함께 정문에서 출근투쟁을 실시하고 있는 현자노조 전주본부 노동자들   - 출처:현대자동차노동조합 전주본부 ]

설립총회 사수를 위한 전투가 시작되다

드디어 떨리는 첫 싸움의 순간이 왔다. 출근투쟁과 함께 노동조합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업체별 조회를 통해 조합가입원서를 받았다. 오전이 지나고 점심때쯤 되니까 가입자는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동지들은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회사의 반응이 어떤지, 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때까지 별 대응이 없다. 평상시에도 아주 시끄러운 정규직 노동조합의 게시판도 살펴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회사가 일부러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일까? 어떻게 나오려고 하는 걸까,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 저녁 합숙장소에 모여 하루 결과를 확인했다. 조합 가입자수는 250명이 넘었다. 모두들 예상 밖의 결과에 흥분된 상태였고, 웃음이 가득한 얼굴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300명이 뭐야, 목표를 500명으로 상향조정합시다.”
“그래, 이미 목표는 달성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더 가입 받읍시다.”
여러 동지들이 의견을 내놔서 목표를 높였다. 그리고 이튿날, 그 다음날도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뛰어다닌 결과 400여명이 가입원서를 제출했다.

어느 정규직 동지의 아름다운 눈물

드디어 지회 설립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계획을 짰고, 설립총회 조직으로 현장이 들썩였다. 회사의 방해도 예상됐다. 잔업이 없는 수요일이라 일부러 회식을 잡아서 조합원들의 마음을 흩뜨려 놓을 수도 있었다. 

오후 2시. 그러나 여기저기 파악하고 다녀봤지만 아직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좋다. 해볼만하다.’ 
나는 설립총회 자료를 복사하고, 투표용지도 만들었다. 갑자기 복사기가 고장나서 두 시간 정도 고생을 했지만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일이 끝나는 5시.
벌써 4시50분부터 건물 밖에는 총회에 참석하려고 온 동지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원청 노조의 빨간 조끼도 계속 눈에 띄고 부서 깃발도 보인다. 지역의 동지들도 현대차전주사내하청지회의 총회 사수를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5시가 넘자마자 업체별로 하청노동자들이 줄을 맞춰서 총회장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과 활기가 느껴졌다. 3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교육장이 가득 찼다. 바닥에 앉고도 자리가 모자라 밖에 서서 지켜보는 동지들도 많았다. 임시 사회자의 선거진행으로 3명의 임원이 선출되었다. 당선된 지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총회가 시작되었다.

“이제 현대자본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또 하나의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원칙을 가슴에 새기고 원·하청이 단결해서 비정규직이 철폐될 때까지 조합원동지들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나는 총회시간 내내 조합원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모두들, 모든 게 처음이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금속노조 김창한 위원장과 지역대표자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고 2시간에 걸친 총회는 끝이 났다. 총회가 끝나고 원·하청 노조와 축하하러 온 모든 동지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그 때 한 동지의 눈물을 보았다. 그는 원청노조의 간부였다. 그 눈물은 너무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비정규직 문제에 앞장서서 싸우고 고민하던 동지였고, 자신이 비정규직노동자라는 마음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동지였다. 이 동지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 인내와 노력, 고민과 결심이 없었다면 아마 비정규직지회는 설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자동차전주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고민과 계획은 모두 이 동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동지의 눈물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동지의 눈물은 나 자신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규·비정규 차이를 극복한 진짜노동자!

지회설립 이후에도 원·하청노동자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 출근투쟁과 본관 항의집회를 매주 함께 하며 추운 겨울을 보냈고, 매일 얼굴을 같이 보며 생활하고 있다. 비록 한쪽은 ‘빨간 조끼’이고 한쪽은 ‘남색 조끼’이지만 섞여 있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서로 색깔이 다른 조끼가 조합사무실에 섞여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극복한 진짜 노동자의 모습이 그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원·하청 노동자들 투쟁의 모범은 더욱더 확산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비정규직 차별철폐로 가는 지름길을 뚫을 것이라 확신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