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출신 변호사로 살아가기

노동사회

운동권 출신 변호사로 살아가기

편집국 0 3,420 2013.05.17 09:45

30대의 나이, 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 이른바 우리사회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소위 386세대의 지표들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인구분포에서 넓은 층을 형성하고 있고, 어느 세대보다 치열한 대학시절을 보냈던 그들이 어느덧 40대로 접어들고 있다. 『노동사회』가 이번 달에 만난 독자 역시 40줄에 접어든 ‘386’ 윤영규(41) 변호사다.

학생운동과 인천지역에서의 경험

“운이 좋았던 건지, 전면에 나서질 않아서인지 82학번으로 입학해서 4년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 후에 수배와 구속을 당했지만 87년 민주화 열풍을 타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죠. 힘들었지만 신명나게 운동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던 건지 돌아보면….”

짧은 옥살이 아닌 옥살이를 마친 후 그는 당시 대부분의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인천 부평공단 ‘마찌꼬바’에 새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중산층 가정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그에겐 새로운 생활이 굉장한 고역이었다.

“당시엔 인천에 많은 분들이 현장에 투신해 있었고,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보일러 하청공장에 취업을 했죠. 첫 철야작업을 마치고 퇴근을 하는데 지하철을 타고서 2~3시간을 정신없이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을 몇 번이나 지나쳐 버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현장생활에 잘 적응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갈등했죠. 그 뒤로 목재공장 등을 거쳐 ‘한국노동연구소’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2년여의 현장생활을 하다 ‘한국노동연구소’로 옮겨 조합결성 지원과 노동상담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활동들은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하지만, 특히 몇 달에 걸친 준비로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세워내는 일에서 얻는 보람은 남달랐다.

인(仁)은 곧 측은지심(惻隱之心)

“지금생각하면 후회도 많이 남습니다. 생산적인 이념투쟁이 없었고, 보다 발전적이고 효율적인 운동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의무감처럼 개인보다는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됐죠. 운동과 크게 관계 맺지 못하고 살고있는 지금도 부족하지만 개인보다 한발 나아간 공익적 책임감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변호사를 시작하면서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물러서 있는 상태지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의 좌우명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의식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인간의 척도라는 마음가짐으로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법의 지팡이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일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