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공동결정제도 개혁 논의에 대한 한국보수언론의 왜곡

노동사회

독일공동결정제도 개혁 논의에 대한 한국보수언론의 왜곡

편집국 0 4,031 2013.05.17 09:43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어느 지인이 우리나라 중앙일간지의 인터넷 사이트를 알려주며, “이 기사가 과연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신문사 산업부의 최 아무개 기자가 쓴, “독일 노동계의 책임감”이라는 제목의 <기자수첩>이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고, 내 눈을 의심하면서 정황파악에 나섰다. 그리고는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근래에 들어 독일에서는 기존의 사회·경제제도 변경과 관련한 논쟁이 심심찮게 일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재계나 보수야당 일각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극히 주관적인 견해들이, 마치 가장 객관적인 사실인양 보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보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 아무개 기자의 ‘공동결정제도 개혁’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지적 없이 넘어간다면 제2, 제3의 왜곡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에, 애독하는 『노동사회』의 지면을 빌어 이에 대해 한 마디하고자 한다.    

독일 노동관계에 대한 반복되는 왜곡   

요즘 독일에서는 노동법 개정이 한창 논의되고 있으며, 그것은 독일노조의 경영참여를 제한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재의 좌파정부는 이를 위해 그동안 노조의 경영참여를 보장해 온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 자체를 축소하겠다고 나섰으며, 경제난의 상황에서 더이상 노조가 간섭하는 기업운영을 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결단을 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에 대해서 독일의 노조가 찬성을 하며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나섰는데, (최 기자가 보기에) 이러한 모습은 강경투쟁 위주의 한국의 노동운동과 비교했을 때 참으로 책임감 있고 성숙한 감동적인 노동문화이다. 

최 기자의 기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위의 문단과 같다. 결국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독일에 와서 보니 근래에 들어 ‘동네북’처럼 심한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투쟁지향적 관행은 쓴 소리를 들어 마땅하며, 한국의 노조들도 독일의 동료들처럼 책임감 있게 강경투쟁을 자제하며 정부와 재계가 하자는 대로 잘 따르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최 기자의 이러한 분석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기사에서 다룬 객관적인 사실 자체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다. 둘째, 최 기자는 맥락과 배경을 무시한 채 왜곡된 사실로부터 왜곡된 함의를 도출하고 있다. 문제의 기사 원문을 구체적으로 인용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

슈뢰더 총리는 이달 초 현행 노동법 개정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 야당 출신 원로 정치인을 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노조의 경영참여를 제한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대외적으로는 유럽연합이 가장 친노조적인 독일의 노동법 개정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체제 속에서 현행 독일 노동법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슈뢰더 총리가 공동결정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그것을 위해서 야당의 원로 정치인을 수장으로 임명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위원회를 추진한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그 야당의 원로 정치인은 75세의 법학교수 비덴코프(Biedenkopf)이며, 그는 기민당(CDU) 소속으로 지난 1990년대 초부터 오랫동안 작센(Sachsen)주의 주지사(Ministerpresident)를 지낸 바 있다. 

그런데 최 기자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비덴코프는 1960년대 말에 이미 독일 정부가 구성했던 또 다른 ‘공동결정제도 위원회’를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당시 “근로자를 위한 공동결정법”을 기업감사회에 적용한 장본인이며, 공동결정제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그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부분의 독일언론에서는 그가 재계와 노동계 모두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임을 강조하고, 이 일을 위한 적임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가 이끌 위원회가 공동결정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강화하는 데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4월7일자 『Rheinischer Merkur』의 기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공동결정제도 개혁의 진짜 배경

한편, “슈뢰더 총리는 … 노조의 경영참여를 제한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는 최 기자의 지적은 전혀 사실 무근이다. 노조의 경영참여를 제한하자고 하는 소리는 사민당이 아니라 독일 재계의 일각과 야당의 신자유주의 성향 정치가들의 주장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재계와 보수야당은 기존에 독일의 경제민주주의의 여러 가지 제도들에 대해서 공격을 가했고, 공동결정제도는 그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됐던 사항이었다. 

사용자 단체인 BDA와  경제인 연합단체인 BDI는 작년에 이미 ‘공동결정개혁위원회(Kommission Mitbestimmung)’의 설립을 제안하며 노조의 경영간섭을 제한하자고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노조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흐지부지된 바 있으며, 또한 사민당과 노동조합은 공동결정제도에 대한 신자유주의 세력의 비판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독일의 상당수 기업가들조차도 공동결정제도가 산업평화를 이루고 경영의 안정화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하며 그 폐지를 반대하고 있기도 하다. 즉,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노동조합만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슈뢰더 총리가 독일의 공동결정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노조의 경영참여를 제한하겠다는 취지가 절대 아니며, 공동결정법을 폐지하겠다는 것 또한 아니다. 개정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는 핵심적인 고민과 동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점차 유럽화하고 있는 기업환경 속에서 어떻게 독일의 기존 공동결정제도와 근로자 참여시스템을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으로 유지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동안 유럽에서 주요 다국적 기업들간의 제휴와 합병이 발생할 때마다 독일만의 독특한 제도인 공동결정제도의 적용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왔다. 작년 독일 정부는 근로자, 경영평의회, 노동조합의 협력구도 속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해 온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를 유럽화의 맥락 안에서도 작동시키게 하기 위하여 유럽연합 내에서 많은 정치, 외교상의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따라서 슈뢰더의 이번 조치는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를 유럽화, 세계화의 맥락에 더욱 적절하게 적응시키면서 그러한 노력을 보다 공세적이고 견고하게 하겠다는 취지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공동결정제도 개혁의 또 다른 주안점은 그동안 기업(Unternehmen)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져 온 이 제도를 어떻게 작업장(Betrieb) 수준에까지 확대하여 노동평의회(Betriebsrat)에서도 그 주체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편, 이번 조치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다소간의 비합리적인 요소와 관행을 담게 된 공동결정제도에 대한 ‘중립적인 맥락’에서의 합리화 조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업감사회의 설치의무가 모기업과 자기업 모두에게 이루어지면서 그 기능이 중복이 되는 양상에 대해서 이를 새롭게 정리해서 제도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동결정제도 개정의 배경이 되는 공동결정제도의 유럽화, 제도의 작업장 수준으로 확대, 중복되는 감사회 정비 등의 주제는 “노동조합의 경영참여를 제한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오, 놀라워라! 성숙한 독일 노조?

다시 최 기자의 글로 돌아가자. 그는 앞에 인용한 문단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놀라운 점은 독일 노조의 반응이었다. 한국 같으면 벌써 격렬한 전국적 반대집회를 열어 '노동자를 배신한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노조는 '노조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겠다'는 설명과 함께 '법 개정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일단 기초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노조의 반응 역시 잘못 해석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독일의 노동조합, 특히 화학노조(IG BCE)의 의장인 슈몰트(Schmoldt)는 공동결정제도의 개혁을 위한 위원회 건립과 논의의 본격화에 대해 찬성을 하고 나섰다. 월간지 『Mitbestimmung』 2005년 4월호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났는데, 이에 따르면 노조 입장에서도 공동결정제도의 합리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결코 경영참가 제한 수용과는 무관하다. 
  
근래에 들어 독일의 유수의 대기업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경험하면서 구조조정에 돌입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는 시장의 상황을 잘못 예측하면서 벌어진 실패한 경영의 산물로, 이에 대해 일부 독일언론은 경영감사회에 참가하고 있는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묻곤 했다. 물론 감사회 내에서 노조가 수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으며, 기업의 중요한 전략적 선택에 노조의 개입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노조는 기업의 경영실패에 대해서 자신들의 책임이 결정적이지 않다고 항변해 왔다. 즉, 최 기자의 ‘추측’과는 달리 노조 스스로 공동결정제도를 경영실패의 핵심적인 이유로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도의 폐지나 축소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독일 공동결정제도 전문가인 정치학자 마틴 회프너(Martin H?pner) 박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 추진되고 있는 공동결정제도 개혁을 독일 노조가 지지하고 나선 데에는 나름대로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한다. 독일의 여당인 사회민주당(SPD)은 『아젠다 2010』 등 신자유주의적인 내용의 개혁안을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지지층으로부터 기반을 상실하며, 주정부 선거들에서 잇따라 참패를 거듭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내년에 있을 연방정부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재집권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독일 노조는 공동결정제도를 심하게 비판하는 기민당 정권에서보다는, 그래도 공동결정제도를 끌어안고 가려는 사민당 정권 하에서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낫다고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이번 개혁에 대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를 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독일을 배워야 할 건 정부와 사용자

최 기자는 한국의 노조와 독일의 노조를 무리하게 비교하면서 우리라면 ‘정권타도’를 외쳤을 것이나 독일의 노조는 대조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독일의 노조가 책임감을 지니는 것은 국가와 자본이 독일의 노조를 책임 있는 주체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독일의 노조가 누리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사회적인 인정과 권리 부여가 매우 제한적이며, 그러한 상태에서 노조에게 책임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한국의 노조는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노동자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착취하도록 하는 ‘허구적인 책임’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민주화 운동의 핵심 주체가 되어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어 세계적으로 떳떳한 민주국가가 되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노동운동의 권리를 속박하면서 책임만을 지우려는 논리를 계속해서 내세우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처럼 독일 노동조합이 누리는 높은 수준의 권리는 숨긴 채 그들의 책임 있는 태도만을 가리키며, 한국 노조에게도 똑같이 책임만을 요구하는 것은 구시대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강경 투쟁 위주의 노조운동이 자리잡고 있는 한국현실을 감안하면 독일의 성숙한 노동문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실 이는 지난 수 년 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나도 똑같이 느꼈던 바이다. 한국의 노조가 ‘강경투쟁’을 택하는 것은 일부가 진단하듯이 어쩌면 지난 시절의 관성에서 연유하는 바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인정이 낮으며 경제·사회제도 운영에 노조의 참여가 차단되어 있는 것이 한국 노조운동으로 하여금 여전히 ‘투쟁’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이유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노조의 권리를 제약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권리의 확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일의 노조들이 법과 제도의 개혁을 위해 한국처럼 강경투쟁을 벌일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하는 여러 가지 제도들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사회를 꾸려나가는 중심에서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지난 세기 동안 독일 노동운동이 투쟁을 통해 일구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관행과 문화의 면모를 놓고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쉽게 자기 편견을 나열하는 최 기자의 짧은 <기자수첩>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