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포기 없이 조세개혁 없다

노동사회

기득권 포기 없이 조세개혁 없다

편집국 0 3,401 2013.05.17 09:39

2005년 1월1일부터 섬유 수입쿼터제도가 폐지되면서 섬유와 의류 산업분야에서 무역 장벽이 제거됐다. 이에 따라 중국산 의류가 미국 시장으로 봇물 터지듯이 밀려 들어왔고, 미국의 의류시장 가격은 폭락했다. 그 결과 불과 2개월 동안 14개의 미국 의류제조업체가 도산했다. 미국 섬유산업연합회는 이런 사태가 위안화를 고정하여 운용하는 중국 정부의 ‘불공정 무역행위’로 인하여 발생한다며, 미국 정부에게 ‘세이프가드조치(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중국은 세이프가드조치가 발동되면 불공정 무역행위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맞대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 정부로서도 위안화 문제를 제외하면 자국의 섬유산업을 도와 줄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이러한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무역자유화는 우리가 예상하였던 것보다 산업과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훨씬 크다. 

다자간 무역확대를 추구하는 ‘세계화’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회보다는 위기를 제공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국은 선진국들이 무역확대를 주장하는 금융과 보험, 통신 및 교육 등의 서비스산업과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지 못하며, 개발도상국이 무역확대를 주장하는 섬유와 의류 그리고 농수산물 분야에서도 비교우위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자국산업의 보호를 위해 활용하던 수입 관세와 몇몇 수입제한조치마저도 운용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한국 정부가 공들여 성장시킨 제조업분야에서도 자본가들에게 국내에 생산기지를 둘 것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화에 따른 변화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일자리 없는 성장’과 ‘노동시장 양극화’ 등 불안정한 고용과 빈곤의 확대 경험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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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대학에서 조세정책에 대한 거리투표를 실시하고 있는 모습  - 출처: 오마이뉴스 ]

IMF 경제위기와 한국 조세정책의 변화

무역이란 서로에게 이익이 돼야 진행되므로, 다자간 무역확대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회사가 유망한 제품을 개발하면 세계시장을 바라보고 비즈니스를 전개할 수 있다. 아울러 좋은 제품이 값싸게 수입되어 국민의 소비효용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적응력이다. 지표상으로 보면 현재 한국의 수출은 호조를 보이고 있는 반면 내수경기는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2004년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2003년보다 9% 상승한 70.3%을 기록했다. 이는 경쟁국인 대만(89.6%) 보다는 낮지만 미국(19.5%)이나 일본(21.8%) 등 선진국에 비해 크게 높고 중국(70.0%)과는 비슷한 수준이다. 이러한 수치와 경향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히 말해, 한국사회에서 세계화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쪽이 내수분야라는 것이다. 즉,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인 내수 침체 속에서 빈부격차, 실업률, 카드빚 문제 등이 점점 확대되고 있고, 이렇게 세계화가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이후부터 4년여 남짓한 기간동안 정부는 세계화로 파생되는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기 위하여 재정정책과 감세정책, 그리고 조세감면정책을 폭넓게 운용해 왔다. 예산의 조기집행, 특별소비세 인하, 법인세율과 소득세율의 인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조세감면 등이 정부의 주도로 반복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는 조세정책을 개혁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과거 제도를 보완·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러 실제로는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실효성 없는 정부정책

이러한 정부의 실책 중에서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한국기업의 대외경쟁력 약화와 해외 투자유입의 감소가 강력한 세금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을 여과 없이 수용한 점이다. 법인세율 인하와 소득세율 인하를, 마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묘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에 현혹되어 다른 곳에서 적절한 처방을 마련하지 않고 세율인하에만 기대다가 시간과 재정을 낭비한 것이다. 

둘째, 세계화의 그늘에 갇힌 계층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방화, 지역특화, 지역균형발전 등에서 소외 계층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발견했지만 국가 재정의 지방이전에는 지극히 인색했다. 이러한 면에서 이슈가 되었던 ‘지역균형발전 전략’은 사실상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는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조세개혁 프로그램도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세제와 세정을 운용하는 당국이 영세자영업자와 일용근로자 등 우리사회에서 공적 부조를 받아야 할 대상의 소득파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사회안전망 제도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정부가 내세우는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의 구호는 비과세?감면 그리고 과세제외 혜택을 받는 계층에게 그 기득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해야 실현 가능한데,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니 에너지세와 부가가치세 등이 슬금슬금 올라가고 조세 중에서 간접세의 비중이 너무 높아졌다. 

이러한 정책들을 세계화에 의해 양성된 음지를 없애는 대책으로 채택했다고 주장한다면 농담을 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된 조세정책을 제대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며 어떤 고민이 필요한가. 첫째, 대기업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집중성장방식은 한계에 달했음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적인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한류열풍’으로 나타나는 한국 드라마의 폭발적인 수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도 지역문화나 전통에 기반하여 특화산업을 일으킬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국세 지방이전과 서민경제특별회계 도입

그렇게 지역사회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지방이전을 과감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현행 교부세, 양여금, 보조금 등 중앙정부 주도의 배분방식을 지양하고 ‘공동세 방식’(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일정한 배분방식에 의하여 배분하는 제도)을 폭넓게 도입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산의 세금 부담 적정성을 연구하여야 한다. 나아가 강남과 과천 등 한국의 대표적인 부촌이 재정 면에서 누리는 혜택이 잘못된 조세제도에 있는 것이 아닌지, 또는 이들 부촌이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조세수출로 향유하는 이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연구되어야 한다.   

둘째, ‘남아도는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정부가 책임질 필요가 있다. 다자간 무역 확대를 골자로 한 세계화의 협상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보장되는 반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외면될 공산이 크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유휴 노동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개별 국가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지금 정부가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고는 있으나, 무너진 서민경제의 축을 살리지 않는다면 큰 효과를 바라기 어렵다. 

여성의 사회진출에 따른 가사노동 분야와 고령화로 인한 실버산업분야 등이 이러한 잉여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는 곳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이 시장들은 개인들의 프라이버시에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는 곳이라 개별 자본의 힘만으로 활성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가 가사노동과 실버산업에 종사할 노동력의 공급과 교육, 자격관리 등을 체계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 ‘서민경제특별회계’를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서민경제특별세’의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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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구제금융 이후 다국적기업들의 '조세쇼핑'에 의한 횡포가 빈발하고 있다.   - 출처: 오마이뉴스 ]

다국적기업 ‘조세쇼핑’을 금지해야

셋째, 생산수단으로서 ‘기계’의 소유구조에 대하여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생산방식이 자본과 노동의 결합방식이었다면 이는 점점 자본과 기계의 결합방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산된 과실은 노동을 배제하고 자본에게 배분되며 자본은 이를 이용하여 다시 기계를 구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기계란 인간의 창조물이고 따지고 보면 사회 전체가 연구비를 지원하여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개발한 연구자들도 대개의 경우 인류를 위하여 공동으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기계의 소유권을 자본에게 한정하는 것은 지극히 불평등하다. 자본가가 기계를 살 수 있게 된 자본력도 사실 노동과 협력하여 축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사회는 기계의 소유권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사회적 분배구조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넷째, 다국적기업의 ‘조세쇼핑’을 방지하고 이런 파렴치한 행위가 국내기업에 전염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다국적기업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생산기지를 골라 생산요소를 마음먹은 대로 이동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생산된 제품 역시 세계 어디든지 내다 팔 수가 있다. 따라서 기업이 빠져나가길 바라지 않는 정부는 다국적기업의 비위를 맞추려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떠나가지 못하도록 매달리고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조세감면이 경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다국적기업이 이를 악용하여 조세를 면제 또는 감면받는 행위를 ‘조세쇼핑’이라 한다.     

조세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쓰는 마지막 수단인데, 이것마저 다국적기업의 주주가 빨아들인다면 빈곤이 점차 확대되어 감당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국내기업들에게도 이러한 조세쇼핑의 행태가 빠르게 전염되고 있으므로 다국적기업의 조세쇼핑이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계조세감면규제를위한협약(가칭)’을 만들어 다자간 협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소득파악·사회안전망·기부문화  

다섯째, 정부의 ‘넓은 세원 낮은 세율’ 정책에 간접세가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수차례 조세개혁을 추진하면서 기존 비과세?감면 그리고 과세제외 항목들의 폐지를 희망하여 왔다. 양도세비과세나 상장주식양도차익과세제외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기득권층이 이를 포기할 리 만무하다. 결국 결과적을 봤을 때 기득권층의 불만을 뚫고 갈 용기가 없었던 정부는 처음부터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과제를 추진한 셈이고, 이 과정에서 애꿎은 에너지세와 부가세만 슬금슬금 올라갔다.

조세개혁이란 기존에 특혜를 받았던 사람이 이를 포기하도록 하고 이 재원으로 새로운 수요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다. 기존의 특권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뤄지는 것이 무슨 ‘조세개혁’인가? 정부주도로 특혜를 포기하게 할 수 없다면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고 조세부과의 원칙을 정한 다음, 국민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더 이상 손쉬운 방법이라고 간접세를 올려서는 안 된다.

여섯째,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하여 서민계층의 소득파악을 정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세제와 세정라인은 조세부과의 경제성에 주로 관심이 가있고, 정말 어렵고 중요한 과제인 소득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2국세청을 만들어 소득파악임무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추진 중인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의 차질 없는 집행을 주문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기부문화 확산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는 자국산업의 보호나 전통문화의 보존마저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양지와 음지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즉, 방치하면 엄청나게 불평등한 사회로 간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조세와 재정을 적극적으로 혁신하여야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민간이 채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기부문화’이다. 평생 모은 돈을 사회를 위하여 기부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고, 사회는 그러한 노력에 대해서 이름 석자를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단체도 더 능동적이어야

이상에서 세계화시대 한국조세정책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미국의 섬유시장이 중국산 섬유에게 일거에 점령당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세계화의 위력은 가히 메가톤 급이다. 따라서 과거의 조세운용만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하는 관료들의 안이한 사고로 이 어려운 난제를 헤쳐갈 수 있을지 매우 걱정된다. 경제계 역시 너무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시민사회단체들도 조세문제에 관해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나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세문제는 모두가 기득권을 버려야 개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정책도 일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을 사회개혁을 바라는 세력들은 더욱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