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기억으로 ‘역사’를 남겨야 한다

노동사회

노동자들의 기억으로 ‘역사’를 남겨야 한다

편집국 0 4,226 2013.05.17 09:27

“내 살아온 걸 말로하자면 열흘 밤새도 모자랄 거야.” 나이든 어르신들한테 흔히 듣는 이야기이다.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살아온 어르신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살아온 이야기 자체가 ‘소설’이다. 그리고 그 어르신이 여성일 경우에는 더 기구하고 사연이 많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되면서 천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백성들의 삶 하나하나가 거대한 흐름이다. 이 흐름이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혹은 거칠게, 혹은 부드럽게 굴러오면서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역사가 가진 자의 역사였고, 힘  있는 자의 역사였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네 부모님들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은, 그저 한순간의 넋두리요 한풀이에 불과했다. 노동자의 역사, 농민의 역사가 그렇게 ‘역사’가 아닌 넋두리로 잊혀져 왔다. 

흩어진 넋두리, 사라진 역사 

1997년, ‘87년 노동자대투쟁’이 10년째 되던 여름에 나는 ‘포스터 전시회’를 하고 싶었다. 포스터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그 안에 있는 그림과 카피들, 행사 내용까지 더하면 포스터 전시회가 훌륭한 역사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당시 민주노총 인천본부는 모아둔 포스터가 없었다(물론 우리 집에도). 인노협(인천지역노조협의회) 시절에 포스터 디자인을 전담했던 동지한테 인쇄된 포스터, 아니면 ‘대지작업’한 원판(당시는 지금처럼 매킨토시라는 디자인 전용 컴퓨터로 포스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모눈 대지에 원하는 크기와 서체로 카피를 붙이고 필요한 사진 등을 첨부한 작업지시서를 필름출력 가게로 보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이라도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이 동지가 조직사건으로 구속될 적에 안기부에서 모두 압수해갔단다. 결국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기억들로만 남고 포스터 전시회는 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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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노동자대투쟁  -출처: 성공회대 NGO자료실 ]

일본에는 노동역사박물관이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는 100년 전에 어느 사업장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썼던 머리띠나 유인물 같은 것들도 전시돼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멋있는 붓글씨로 ‘노동해방’이라고 써서 일일이 실크스크린으로 밀어서 만들었던 우리들의 머리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각종 집회 때마다 사용됐던 걸개그림도 남아있지 않다. 어디로 갔을까?  

북경의 모택동 기념관에는 중국공산당 창립 선언문, 결의문 등을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전시된 창립선언문이 회의를 거치면서 수정, 첨삭된 흔적이 남아있는 초안원본이라는 점이다. 전쟁까지 거치던 어렵던 시절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잘 보관하여 후대에 시청각 자료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숱한 유인물, 결의문 등을 작성하면서도 마치 낙서장처럼 첨삭된 초안은커녕 최종 채택한 문서조차 제대로 보관하고 있지 못한 나의, 우리의 일천한 역사의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지방선거가 끝난 뒤 백수가 됐다. 다니던 직장을 선거 직전 관둔 데다 민주노동당 인천시장 후보를 비롯해 7명 후보의 홍보물을 만들면서 -없는 돈으로 박박대며- 심신이 매우 지친 상태여서 모처럼 찾아온 자유를 즐기고자 했다. 그런데,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이고 제한적일지라도 미뤄놨던 숙제를 해야겠다 하던 차에 마침 기회가 주어졌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진행하는 1960~70년대 노동자들 생활을 기록, 발굴하는 3년 동안의 프로젝트에 비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 ‘마찌꼬바’ 노동자들을 아십니까 

“한 3개월 밀렸지. 3개월…, 사장이 그때 돈을 그 못 주겠노라고 돈이 없어서 휴가 갔다오면 주겠노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휴가를 빨리 온다손 치더라도 6개월 이상 걸리는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구. 그 척, 자크라구 있어. 선반을 조이는 게 척이라구 있었어. 그 척이 그때는 국산이 없었어. 대게 인제 일제를 썼지. 그 척을 두개를 딱 빼 가지고, 저쪽 지금 용산 전자상가 그 부근인데, 그때는 개울이었어. 개울 뚝방 동네가 있었는데 거기 그 가게다 갖다놓고, 구멍가게다 갖다놓고 전화를 걸었지. 돈줘야 척 준다구. 그런데 어, 이 친구들이(마찌꼬바 사장이) 이 청파동 파출소에다 신고를 했어. (중략)

아, 그 파출소에서 보면 이게 나쁜 놈이지, 군대간다는 놈 월급을 안주고 제대하고 나서 휴가 와서 가져가라니까 준다는 게. 청파동 그 망하면 하루아침에 망하는 마찌꼬바에서 그 말두 안 되는, 띠어먹을 것 같다는데 감이 잡히는 거지. (중략) 

척이 두개니까 양쪽에다 이케(양팔 옆구리에 물건을 낀 시늉을 하면서) 들었어. 무거워 그거, 15킬로 이상. 딱 들구 가는데 아무소리 안 하구 갔으면 내가 그거 들구 가지. 이게 사장이 아이거 돈 뺏긴 거. 뺏긴 기분이야 띠어 먹어두 될 건데 줬지. (중략) 뒤통수에다 대구 이 개새끼 이눔의 새끼이이 뒤통수에다 대구 계속 욕을 하는 거야. 딱 보니까 택시가 여기서 오드라구. 그래서 에이씨 하구서 동그랗잖아. 신작로 바닥에다 던졌어. 또르륵 굴러가는 거야. 절루. 그걸 신경 안 쓰고 택시 딱 세웠어. 돈 받았으니까 택시비야 있지 어 그래서 청파동 다리 밑으로 해서 이쪽 남영동 쪽으로  나오면 그만이지.”
  

1962~63년경의 상황이다. 청파동 일대의 “상급자 욕설도 굉장히 험악”하고 근로조건도 형편없던 ‘마찌꼬바(소규모 공장)’에서 영장이 나오자 사장은 체불된 3개월치 임금을 떼어먹으려고 “휴가 나오면 준다”고 한다. 인정 많은 파출소장 덕분에 임금 받아내고 사장이 파출소장한테 줄 뇌물로 챙겼던 돈봉투까지 보너스로 받는 이야기가 통쾌하기까지 하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 당시 청파동 일대 마찌꼬바들이 늘어선 풍경까지 그려진다. 또 어떤 대목에서는 공장 내부의 풍경이 훤히 그려진다. 

그런데 이 청년노동자 군대 다녀와서 들어간 공장에서 또 체불 당한다. 그땐 동료 몇 명이서 노동부 가서 진정도 하는데 소용없었고 “술 먹고 깽판 쳐서” 체불임금을 받아낸다. 

답 : 그때 다 못 받았거든. 그래 나랑 동양원화라는데 들어간 사람이 그…, 그래서 막 영등포 노동부도 가고 그랬어. 진정하구 그랬거든.” 
문 : 그때 진정하는 게 흔치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가셨어요? 
답 : 아 그 방법두 몇이서 몰려갔어. 소문으로 그 그래서 몇이서 몰려갔어. 갔는데. 
문 : 그때 노동부 갔을 때 느낌은 어땠어요? 
답 : 뭐 그냥. 그러냐. 써라 그러구. 얼마 밀렸냐. 써라 그래서….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못 받았거든. 근데 그 나중에 내가 돈 받아가지구. 이 친구 못 받았어. 야 나 돈 받았어. 야 그런걸 니 혼자 가서 받으면 어떡 허냐 임마. 같이 가서 해야지. 야 혼자 가서 했는데 혼자 가서 받아야지 뭘 같이 가. 너두 가서 술 먹구 깽판 한 번 쳐. 그래 가지구서 그 사람들 지는 못 받았잖아. 그래서 내가 야 노동부가서 진정하는 거 다 헛 거, 다 땡깡 부리는 게 더 빨라~ 이씨.
 

당시 상당한 정도의 기술을 익혀 큰 규모의 공장에 들어갈 때까지는 마찌꼬바를 전전하면서 임금을 떼어먹히고 이를 받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 상황에 노동부는 “헛 거”였다. 

사람 사는 이야기이니 임금 못 받아 징징거리고 술 먹고 깽판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70년대 초반 문래동 공장지대 이야기이다. 한 4~500명 규모의 비교적 큰 공장을 다닐 때 이야기이다.  

“그때 전기가 잘 나갔어. 그럼 어떤 경우에는 저기 아침에 갔는데 전기가 나갔어 (그런 땡잡은 날이) 그러면 주야 교대자 하구 같이 나가잖아. 주야교대자는 만날 수가 없어. 그럼 나가자마자 이제 술 먹으러 댕기면 문래동 거기서 뱅뱅뱅~ 어, 거기가 공장들 많았지. 술 한잔 먹구 하는 게 지금과 같이 (화투치는 시늉을 하며)뭐 이런 거 하는 게 아니라 순수했어. 윷윷, 윷놀이를 하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다른 공장 패거리들, 전기가 나가면 그 지역 전체가 나가는데 몰려나와 다른 공장 패들하고 시합이 붙는 거야. 윷놀이 시합. 그런 거야 
(둑방에서?) 아니 문래동 그 신작로지. 골목 이면도로. 구멍가게 있구. 그러면은 큰길에서 이면도로는 뭐 양은장사, 니역거 끄는 양은장사두 가다가 신도림에서 세워놓고 같이 놀구 막걸리 먹고 취해 갖고 한 개 팔았니 말았니 하는 그런 분위기지. 거 뭐 그야말로.”


이후로도 작업장 풍경, 산재사고, 노동조합 주동한 사람들이 알고 보니 브로커였던 이야기, 연애시절을 거쳐 어렵기만 한 신혼살림 이야기 등 박남수 선배 한 명의 이야기만 해도 무궁무진 하지만, 여기서 살짝 맛보기만 하고 끝낸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들이 모여서 우리 노동자들의 일과 사랑과 투쟁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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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 코리아스파이서 노조 부위원장 활동 중 1982년 해고 10년만에 대법 승소로 복직 후 같은 회사 노조위원장 역임. 2회에 걸쳐 부평구의회 의원활동 현재는 굴포천살리기 시민모임 집행위원장. 구술내용은 말투까지 그대로 옮겼다. 그 과정에서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틀린 용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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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여, 당신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87년 7·8·9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노동가요의 일부로 널리 불렸던 이 질문을 지금시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간부들에게 던지고 싶을 때가 많다. 우리 기억 속에 그리 멀지 않은 옛일인 87년 투쟁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내가 있는 부평의 GM대우자동차 간부들 중에도 찬란했던 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87년 투쟁의 와중에 노조를 결성하고 활발하게 활발했지만 중국으로 공장이전, 폐업 등을 거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완전한 망각의 늪으로 사라진 것 같다.   

노예들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종놈’의 기록도 거의 없다.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잘살아보세’가 국가적 구호였던 시절,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를 담보로 먹고살았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삶을 기록할 여유가 없었다. 또 ‘빨갱이’로 몰릴 각오를 하고 투쟁해야 했던 선배노동자들에게 기록은 수사기관에 ‘나 잡아가쇼’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쩌다 남겨진 유인물 등 공식기록도 중앙정보부(안기부)나 경찰에 압수되기 일쑤였다. 

우리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렵고 불행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한 선배노동자는 과거에는 어렵고 힘들어도 ‘꿈’을 가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꿈을 꿀 수 없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불행한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우리 노동자들의 역사를 모으고 기록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 노동조합이라는.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모아놓는 ‘노동자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제는 노동자 스스로 정리하는 ‘노동자의 역사’가 자료로 모아지고 기록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그리고 꿈을 꿔 본다. GM대우자동차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교육시간에 신진자동차에서 GMK,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그리고 현재 GM대우에 이르기까지, ‘우리 회사’ 선배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화려하진 않지만 투박한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는 날들을.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