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노동조합 정치학

노동사회

전환기의 노동조합 정치학

편집국 0 3,154 2013.05.1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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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Contemporary Politics Vol. 8. No. 2, 2002 에 실린 “The politics of trade unions in transition: the case of the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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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인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은 계급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남아공에서 노조 이데올로기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다소 복잡한 형태로 남아있다. 1980년대, 독립적인 노조들은 인종차별(Apartheid) 정부와의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는 지역사회와 정치조직 간의 연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노조회의(COSATU; 이하 코사투),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및 남아공공산당 간의 삼자연합(Tripartite Alliance; 이하 연합)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를 통해 노조운동 내에서 민족해방주의 경향이 퇴조하고, 보다 많은 사회주의 담론이 자리하게 된다. 한편으로 ‘연합’은 당대의 집권정당들과의 밀접한 연계를 이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노사관계와 관련된 입법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노동계에 우호적인 조직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는 독립적 정체성의 약화를 낳기도 했다. 이 논문은 코사투(COSATU) 회원조직에 대한 전국적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남아공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적 스펙트럼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한다.  

정치 그리고 노조

노조에게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조의 힘은 조직율과 교섭테이블 혹은 정치영역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제1세계 국가들에서 노조와 정치정당의 공조관계는 해악적 결과를 낳았다. 특정한 정당에 대한 노조의 지지(예를 들어, 영국의 노동당이나 미국의 민주당)는 특정한 선호에 기초하기 보다는 정치적 대안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신자유주의적 정치의제가 확산되고, 많은 경우 노조가 자신만의 실행 가능한 대안에 대해 합의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남아공, 남한과 같은 수많은 이행기 경제체제 내에서 노조는 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노조는 대중적 지지와 함께 제1세계 국가들의 노조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헤게모니를 가진 신자유주의의 ‘타락’에 대해 응집적으로 대응하고 정치영역이 정상화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COSATU의 ANC 및 남아공공산당과의 삼자연합에 대한 노조조직들의 기대와 의견, 현장 요구와 기대의 성격, 그리고 향후 새로운 노동 주도적 정치정당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추적한다.

배경: 후기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노조 이데올로기 

1970년대 초기 학생운동가들과 전직 노조간부들의 활동으로 여러 노동자 상담소(advice bureaux)가 남아공의 주요한 도시지역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상담소의 활동으로 인해, 주로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된 많은 수의 새로운 노조인 ‘독립’ 노조가 연이어 결성되었다. 물론 이보다 먼저, 남아프리카노조협의회(SACTU)의 주도 아래서 아프리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했던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환경과, 현장조직 건설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970년대 후반까지, 독립노조는 많은 남아프리카 작업장에서 확고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80년까지 대부분의 노조는 남아프리카노조연합(FOSATU)과 남아프리카노조평의회(CUSA) 등 두 개의 연맹으로 통합된다. 결국, 지루한 통합 논의 끝에 1985년 총연맹 성격의 코사투가 결성되었다. 코사투는 남아프리카노조연합(FOSATU)의 노조들과 과거 남아프리카노조평의회(CUSA) 산하에 있던 노조들뿐만 아니라, 조직화되지 않은 많은 ‘지역 노조들’, 가장 주요하게는 남아프리카노조연맹(SAAWU)을 포함했다. 국가적 억압의 증가(통일민주전선(UDF)의 불법화를 포함하여)에 맞서, 코사투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해 원칙적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던 와중에 코사투는 노동운동 이념으로서 사회운동적 역할을 채택했으며, 사회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목적과 조직방식을 가진 작업장 조직들을 규합했다. 이는 한편으로 노조의 조직적 힘의 증가와 그 역할의 제도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아프리카인들을 배제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코사투로 조직되었던 노조와 각종 조직들은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 것은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된 것으로, 정치조직은 현장의 조직구조를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전의 FOSATU가 명확히 했듯이, ‘노동자주의자들(workerists)’은 조직화를 포기하는 대가로 대중정치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족적 노조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이러한 입장은 부분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조직화가 취약했기 때문에 국가 억압에 의해 60년대 초기 소멸해야만 했던 SACTU의 초기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남아공 현장에 대한 SACTU의 세력 확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 현장으로부터 ‘노조 지도자를 재생산’할 능력이 없었고, 잘 정비된 정치조직처럼 노동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FOSATU의 서기관인 조 포스터는 FOSATU가 항상 정치적이지만, 다른 이해관계에 의해 포섭되는 노동자계급을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포스터는 파업이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되지 않는다는 점과 노동자 통제를 증진시킬 조직의 건설이 필요했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사실상의 정치적 배제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된 정부의 ‘개혁’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 1983년 발생한 대중봉기 이후 점차 힘을 잃어갔다. 1985년 3월, PEBCO(엘리자베스항만 흑인시민조직)가 주도한 엘리자베스항만 파업(stayaway)은, FOSATU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OSATU 조합원들의 광범위한 참여로 진행되었다. 국가 억압의 증가와 이런 여러 사건들의 발생으로 인해 FOSATU에 속한 노조들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시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85년 초, 통일민주전선(당시 불법단체였던 ANC와 연계를 가진 공동체 조직들의 연합)과 완전한 제휴관계는 아니라 할지라도 협력하게 된다. 

다음으로, 그 연원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지류는 작업장 투쟁은 민족해방 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980년대, 이 노선은 이스턴 케이프에서 특히 강한 지지자를 확보했던 남아프리카연합노동자노조(SAAWU)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났다. SAAWU는 ‘비정상적 사회에서 정상적 노조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직접적으로 통일민주전선(UDF)에 가입했다. 그러나 SAAWU는 상대정파라 할 수 있는 FOSATU에 비해, 사실상 취약한 현장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억압에 저항할 능력 또한 취약했다. 1985년이 되자 SAAWU는 다시 타협적인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1985년 코사투의 탄생은 이들 두 개의 서로 다른 노조주의 철학이 화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타협은 모든 회원 노조가 민주적 노동운동에 대한 약속, 그리고 일상적인 노조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 안에서, 물론 이것이 정치 투쟁에 종속되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때때로 견해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은 남아있었다. 코사투의 두 번째 전국총회에서, ANC의 자유헌장(Freedom Charter)에 대한 반대로서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이 가지는 상대적 중요성 및 해방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 문제를 둘러싸고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가장 극명하게는, FOSATU에 뿌리를 두고 있던 남아프리카금속노동자전국노조가 노동자 헌장과 ‘사회주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지도의 문제는, 정치적 참여에 있어 ‘노동자 소비에트(Worker Soviet)’를 발전시키고자 했던 고전적인 노동자주의자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한 내부 압박이 반영된 것이었다.

전국광산노조와 같은 여타 노조들은 자유헌장을 일차적으로 강조하였으며, 이는 ANC와의 연합이라는 정치적 전통을 상징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헌장은 최소한의 요구만을 담고 있으며, 보다 광범위한 사회변혁투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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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헌장(Freedom charter)
자유헌장은 1955년 6월, ANC와 그 연합조직의 대표 그룹이었던 클립타운 민중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헌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남아프리카 민중들은 이 나라와 전 세계가 남아프리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흑인과 백인 모두의 것이며, 정부는 민주의 의지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정당하게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헌장은, 주요한 예로서 ‘토양 아래에 있는 광물자원, 은행과 독점산업은 전체 민주의 소유로 전환될 것이다’와 같은 몇몇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ANC에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확고하게 위임했으며, 국가 경제 구조를 급진적으로 변경시키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헌장은 ANC가 남아공에서 불법화된 조직이었을 시기 동안에 상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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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및 그 이후의 논쟁들

정치조직이 합법화되고, 당대의 집권정당이었던 ANC와 다수의 소규모 정치 분파들 간의 전국단위 협상이 시작되자, 코사투의 정치적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즉, 코사투와 ANC 사이의 공조관계는 공식화되었으며, 정치적 우선성은 ANC에게 양도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ANC 및 남아프리카공산당(SACP)과의 삼자연합이 건설되면서 구체화되었다. 총선거 및 광역과 지방의회 선거는 ANC의 지휘아래 치루는 것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코사투는 ANC 의회 내에서 의원에 대한 공식적인 부문할당의 권리를 획득했으며, 전국 의회선거에서 ANC 후보 중 20명을 지명할 수 있었다(남아공은 변형된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지도부의 교차겸임이 인정되었는데, 즉 남아공공산당, ANC 및 코사투에서 한 개인이 동시에 고위직을 겸임할 수 있게 되었다. 총회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상당한 내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분리는 여러 다른 형태로 치환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희미해 졌으며, 오늘날 노동자주의자와 대중주의자 사이에 더 이상의 명확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처럼 노조 단위로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을 지라도, 두 개의 느슨한 의견그룹은 남아있다. 첫 번째는 삼자‘연합’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두는 입장으로 이들은 어떤 사회주의적 기획도 민족해방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두 번째는 종종 ‘초좌파(ultra leftists)’로 불리는 그룹으로 사회주의는 일차적 목표이며, 어떠한 타협도 ‘노동자계급의 혁명주의적 성격’을 배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조 효과성의 잣대라 할 수 있는 ‘조직화’ 전략을 통해, 노조는 과거의 사회운동적 역할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노조활동을 단순히 즉자적 투쟁을 통해 조합원들을 만족시키는 단순 활동에서, 사회정의에 대한 공동체 투쟁으로 변화시켰다. ‘조직화’ 전략의 성공에 핵심적인 요소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며, 경영자와 사회질서가 낳은 빈곤에 대한 정서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세계적 기준에서 볼 때, 코사투는 80년대의 정치적인 역할과 강력한 현장조직에 대한 역사적인 강조 양자로 인해 아직까지 역동적이고 효과적인 연합체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1994년 ANC정부의 집권은 코사투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코사투가 고유한 독립적인 정치적 전망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포함되었다. ANC와 코사투 사이의 긴장은 90년대 후반 정점에 도달하는데, 당시 ANC정부는 IMF와 세계은행의 처방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거시경제 정책을 점차적으로 시행했으며, 결국 ‘성장, 고용 및 재분배(GEAR)’라는 정책 의제로 구체화된다. 이는 보다 개입주의적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재건과 발전 프로그램(RDP)’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코사투의 1997년 총회에서는 ANC의 경제정책에 대한 명확한 비판 입장이 제출되었으며, 이는 남아공공산당(SACP)과의 직접적 유대를 강화하고 재정지원을 확대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ANC는 ‘입 다물고 있거나 연합에서 탈퇴’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로 인해 코사투는 일련의 비판을 철회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사투 총회의 저변에서 표출된 정서로 볼 때, 사회주의적 전망이 다양한 계층들 사이에 상당히 대중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1999년 선거까지 가는 과정에서 코사투는 ANC의 입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ANC가 ‘노동자계급과 빈민들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국면을 거치면서 코사투 내부에는 두 개의 느슨한 입장이 상존하게 된다. 첫 번째는 삼자‘연합’에 잔류를 희망하는 이들로, 이들은 ANC에 대한 조합원들의 지지를 지적하면서 삼자‘연합’이 실행할 수 있는 국가정책에 전략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에 주목했다. 현재 코사투는 ANC의 내부 조직에서 직접적인 발언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작업장 수준에서 전국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기업 및 정부와 전례없는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그런 구조가 가지는 권력, 상호보증 및 절차를 규정하는’ 다양한 포럼에 참석했다. 노조는 전환기 동안 조직 노동이 길들여지거나 오염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영향력은 삼자‘연합’ 내부에서 독립된 힘을 잃는 것 때문에 가능했다.

두 번째는 ‘초좌파’적 입장이다. 이들은 전통적 사회주의자들간의 느슨한 연맹 형태로 존재하며, ANC에 대한 기대를 철회한 자유주의적 분파와 ANC에 항상 적대적이었던 소규모의 보수적 노조 조합원들이 이들을 지지하고 있다. 다양한 멤버를 가진 이러한 광범위한 그룹들은 지배적 정당체제와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ANC의 참여가 가지는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삼자‘연합’은 ‘코사투가 ANC 및 정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효과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ANC에 대한 노조의 영향력은 점차 기울고 있다. ANC는 1999년 8월, 공공부문 교섭포럼의 최종적인 임금 협상과정에서 파업행위를 제한하고, 코사투의 공공부문 산하단체의 양보교섭을 모욕하는 등 입장을 확고히 했다. 게다가 코사투는 점차 진행되는 노동시장 탈규제에 제동을 걸기에는 힘이 없다는 것이 판명났다. 요약하자면, ‘삼자연합은 명백하게 남아공 내의 최대 노조연합을 침식하고, 약화시키고 모욕하고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삼자‘연합’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것은 폐기되어야 하며, 공산당(SACP)의 재건을 통해서든, 새로운 독립적 정치적 주체의 형식이든,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합관계와 종속관계

ANC의 합법화로 인해, ANC는 남아공 흑인들의 대표체로서 그 역할을 재개하고, 불법화 당시의 지위를 재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여타의 정치주체는 점차 주변화 되었다. ANC는 정치권력을 획득하자, 실용주의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면서 다른 사회 그룹들과의 타협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흐름은 혼탁해진다. ANC는 광범위한 교파를 아우르는 교회의 역할을 자임했으며, 지방토호 엘리트에서 노조 지도자들에 이르는 다양한 이해단체를 아우르기에 이른다. 삼자‘연합’에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코사투 또한 자기 정체성의 심각한 혼란에 직면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논쟁들과는 별도로, 노조는 장기간의 타협으로 인해 ‘도덕성의 손실’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노조는 점차 다양한 산업에서 생산성 및 이윤배분(profit sharing)과 관련하여 사용자들과 복잡한 협상에 관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노조는 연기금 관리 과정에서 손쉽게 이득을 취하게 되고, 요하네스버그 증권거래소 내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후자는 ‘흑인 권력화’를 후원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기존의 금융주체들이 은밀한 도움을 제공한 결과였다. 또한 이로 인해 전직 노조관리들이 엄청난 규모의 개인적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가능성 없어 보이는 부의 창출이나 재분배보다는 투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각종 타협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과 함께, 전직 사무총장이었던 실로와(shilowa)와 같은 몇몇 코사투의 지도자들은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으며, 국가와 밀착된 아프리카 부르주아가 등장하게 된 내적 요인이 되었다.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대응으로 노조의 미시정치학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종종 인신공격의 형태를 띠었다. 이것의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경영진과 관련 노조간의 타협에 반대하며 나타난 노동자 내의 ‘혁명(rebel)’분파가 주도하는 많은 수의 주요한 파업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1990년의 메르세데스 벤츠 파업과 2000년 초의 폭스바겐 파업이 포함된다. 둘째, 분리 노조의 확산이다. 여기에는 다채롭게 이름 지어진 ‘선반기계(운송노조로부터 독립한) 및 마우스피스(남아프리카전국금속노조로부터 탈퇴한) 노조’가 포함된다. 다른 중요한 분리노조에는 화학산업노조에서 축출된 위원장이 설립한 석유화학일반연합노조와 남아프리카음식업연합노조(전 음식업연합노조) 등이 있다. 이러한 분리는 코사투의 ‘하나의 노조, 하나의 산업’ 정책의 한계와 현장 이해관계의 분리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분리노조도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조합원의 규모를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선반기계노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조합원을 포함하지만, 이들은 소규모 그룹의 이전 코사투 지도자들과 간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노조의 실천은 확실히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박탈감을 특히 강하게 느끼고, 이것을 현존 사회질서의 탓으로 생각한다면 사회적 노조주의(social unionism)를 위한 건전한 기초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코사투 총회에서의 다양한 의견에 반영되는 것처럼, 박탈감이 코사투의 조직적 문화 내에 깊게 삼투되어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민주화로 인해, 다년간의 내적 이데올로기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다. 

방법

이 글은 1998년 말 코사투 조합원을 대상으로 시행된 전국단위 조사에 근거하고 있다. 최종 응답자의 규모는 646명이었으며, 사전조사를 거쳐 컴퓨터로 처리되었다. 네 개의 지역이 선택된 후, 지역별 추출법에 따라 샘플링이 진행되었다. 이들 지역은 웨스턴 케이프, 이스턴 케이프, 크와줄루-나탈 및 가우텡 등 남아공의 9개주 중 4개 지역으로, 많은 수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대다수 주요산업이 위치하고 있다. 가우텡 주에서 34.7%, 크와줄루-나탈 주에서 19%, 이스턴 케이프 주에서 26.6%, 웨스턴 케이프 주에서 19.7%가 응답하였다. 이들 4개 지역의 각각에서 노조가 있는 개별사업장이 임의로 추출되었다. 코사투 지역사무실의 지원을 통해 개별 사업장에 접근하였으며, 개별 노동자에 대한 인터뷰가 수행되었다. 인터뷰 이후 광범위한 사전설문지가 작성되었으며, 완성된 질문지는 특정 지역에 배포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자료세트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이며, 서로 다른 연령, 성, 지역 혹은 부문사이에서 나타난 의견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조사결과

[표1]은 응답자의 정치적 성향을 설명한다. 절대다수가 ANC 연합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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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상의 응답자는 ‘연합’을 지지하는 것이 전국적 수준에서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표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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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부문과 서비스부문 노동자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이는 ‘연합’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다수에는 남아프리카전국금속노조(NUMSA) 및 코사투 산하 몇몇 대형 공공부문 노조의 상당수 규모 조합원이 포함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및 공공부문 공히 대다수 응답자는 ‘연합’ 내 잔류를 희망했다. 

응답자의 1/6 이하가 코사투는 중립적인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믿으며, 나머지는 제3의 정치정당과의 연합을 지지하는 이들과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희망하는 이들로 나누어 졌다.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 다수의 응답자는 ‘연합’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2004년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응답자는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통일된 의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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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에서 볼 수 있듯이, 독립적인 노동자정당에 대한 지지는 아주 적다. 흥미롭게도, ANC와의 유일 연합을 위해 공산당을 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이 나타나며,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코사투와 공산당 양자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견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유일한 연합대상자로 생각하는 코사투 조합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약간 더 많은 숫자가 독립적 노동자 정당을 희망했다.

대략 80%에 해당하는 응답자는 그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진심으로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ANC였다. 대다수는 정당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지지도 매우 좁은 의미의 권력위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응답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은 정기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정당이 그 지지자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하지 않을 경우, 응답자들은 그 정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표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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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서비스부문과 제조업부문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유사하게, 연령에 따른 차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투쟁 세대와 대투쟁 이후 세대 역시 이 점에 있어 동일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응답자의 성별 구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역적인 차이가 발견되었다. 웨스턴 케이프의 응답자들은 다른 지역 응답자들에 비해서 이에 대해 보다 강한 의견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대다수 다른 핵심적 질문에 대해 지역과 응답자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웨스턴 케이프에서 백인이 지배하던 민족당 지방정부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정당이 의회에서 그 지지자들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때, 일반적으로 항상 지지자들에게 의견을 물어야한다고 나타났다. 즉, 의원이 지지자들에게 의견을 물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와 관련하여 성별, 지역별, 연령별로 응답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응답자의 대략 2/3는 1994년과 1999년 선거에서 코사투의 ANC 후보자 명부에 대한 상원의원을 지명하고, 결국 의회에 보낸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믿었다.([표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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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흥미롭게도 코사투의 여성 조합원들은 이 점에 있어 약간 냉소적인 경향을 보인다.이는 웨스턴 케이프에서 특히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고, 상당한 자금을 민족당 지지를 위해 지출한 바 있는 남아프리카의류섬유노동조합(SACTWU)의 절대 다수 여성 조합원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코사투의 결정이 옳았다고 믿는 웨스턴 케이프지역 노동자 규모(62.2%)는 동일한 의견을 가진 가우텡 및 크와줄루-나탈지역 노동자에 비해(각각 74.6%와 71.5%) 다소 적었다. 결정의 타당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은 이스턴 케이프였다.(오직 58.8%만이 그것이 좋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이스턴 케이프는 남아공의 가장 빈곤한 지역이며, 트란스케이와 시스케이 부족의 이전 자치구를 재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경함한 바 있다. 더욱이, ANC는 트란스케이 부족의 이전 군사 독재자 반투 홀로미사가 인솔하는 통일민주운동으로 인해, 그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노동자들이 전국적 수준에서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는데 있어 의회가 가장 좋은 형식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응답자들은 다소 나누어지는 경향을 보였다.([표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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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자들은 전국단위의 정치적 요구를 심화시키는 데 있어서 의회는 가장 좋은 형식이라고 믿었다. 이는 진정한 다당제적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최근에야 시작되었다는 점과, 대중행동(무엇보다, stayaways-단기 지역적 파업이든 전국단위의 파업이든(통상 하루단위), 명백하게 표현된 정치적 요구를 위한 파업에 대해, 남아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의 기존 전통을 고려할 때, 아마도 놀라운 발견일 수 있다. 

1994년 이후 사회적 서비스가 실제로 실행되었던 것은 매우 미미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요 도시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취약한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해 핵심영역에서 구체적인 서비스가 존재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다. 1998년의 노동자 조사까지 응답자의 81% 이상이 전력공급의 영역에서 가시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믿으며, 53%는 그들의 식생활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며, 76%는 전화의 공급에서, 60%는 의료에서, 그리고 81%는 수도 공급에서 발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영역들은 기초적인 삶의 질에 대한 이슈이자, 가장 낮은 진척을 보였다고 인식되는 식생활의 문제를 제외할 경우, 현재 국가 자원의 재배치를 통해 즉각적인 복지혜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역이다. 농촌지역에서 사회서비스의 실행은 다소 제한되기는 하지만, 남아공처럼 빠르게 도시화되는 사회에서 핵심 도시 지역의 사회서비스는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결론

민주화로 인해 남아공의 노동조직은 다양한 측면에서 도전에 직면했다. ANC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코사투 노조들은 ANC와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삼자연합의 유지를 통해, 코사투는 과도한 탈규제정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개선시킬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할 것이며, 노조에게 광범위한 조직적 권리(핵심적으로는, 노동조직이 자립할 수 위치에 서는 것)를 확보해 주는 입법 단체를 보유할 수도 있다. 

삼자 연합에 대한 비판가들은 ANC가 고용손실에도 불구하고 민영화와 자유무역에 전념하는 노선을 통제하는데 있어 코사투가 무능하다는 점을 지적해 왔다.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자면, 지구적 구조조정은 오래된 사회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자본주의는 주변부에서 최악의 상황을 양산하고 있으며, 이행기 경제에서 새로운 형식의 계급투쟁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사투가 새로운 연합을 건설하고, 가장 취약한 계층을 대변하여 급진적 사회변혁 투쟁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잡았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남아공 정치지형 내에서 ANC의 주도적 위치는 확고부동하다는 점이 숙지되어야 한다. ANC는 전통적인 역사적 역할 및 기초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강조를 통해, 대다수 코사투 조합원의 지지를 향유하고 있다. 코사투 내부의 초좌파진영이 남아공전국금속노조 같은 몇몇 핵심 노조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제한된 계층만이 그들의 정치적 의제에 대해 지지를 보일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이는 높은 수준의 현장 전투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이러한 모순은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부재하다는 점을 반영하며, 이는 불만을 가진 노조지도자들이 새롭고, 더욱 급진적인, 정치적 주체를 건설하는 과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ANC 내부의 복잡한 내부 논쟁을 간과하고 있다. ANC는 극단적으로 넓은 이해 동맹을 계속 대변하고 있으며, 그 내부에서 노조가 사회서비스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를 위해 자신의 조직적 지지를 헌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코사투 조합원들이 정기적인 조사보고를 통한 책임규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ANC는 중단기적으로 코사투 조합원들의 지지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적인 실천에 대한 기대 없이 발행된 ‘공수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합’에 대한 지지는 현장 수준에서의 구체적 실천여부에 달려 있다. 코사투의 지도자들은 현행 정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으며, 이는 정부의 ‘성장, 고용 및 재분배적 거시경제전략(GEAR)’에서부터 무기구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진정한 노동자의 지지를 담보한 새로운 정치그룹의 형성은 엘리트가 주도하는 과정일 수 없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볼 때, 노조 주도의 정치정당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짐바브웨 유형의 시나리오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

분명 노조는 ANC가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거시경제정책을 견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영향력의 약화’를 반영하고 있다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합의를 창출하는데 있어 그들이 보인 무능력 때문일 수 있다. 코사투의 정체성은 여전히 민족해방투쟁의 추억에 그 토대를 두고 있으며, 어렴풋하게 정의된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방향성이 추가되었고, 후자는 사회주의 정치의 지구적 위기상황에 의해 점차 요원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연합체제가 직면한 난관은 자신의 진보적인 조직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그 핵심적 가치와 목적을 이행 이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재정의하는 과정을 통해 돌파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