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과 성장

노동사회

유신독재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과 성장

편집국 0 11,288 2013.05.17 09:12

1970년 새해는 곳곳에 폭설이 내리고 서울 기온이 영하 20도 20분까지 내려갈 만큼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왔습니다. ‘대망의 70년대'는 이렇게 혹한 속에서 출발했어요. 그리고 몇십년만의 이 매서운 추위처럼 박정희정권은 엄혹한 독재의 길로 내닫기 시작합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60년대 말 닥쳐온 위기를 강압적인 조치들을 통해 막으려 하였죠. 그러나 사태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독재정치와 경제개발의 음지에 묻혀있던 모순들이 드러나고 노동쟁의와 사회적 저항은 더욱 거세졌어요. 게다가 미국의 베트남전쟁에서의 패퇴와 ‘닉슨 독트린' 선언을 계기로 냉전체제의 최전방인 한반도에 긴장완화 요구가 밀어닥쳤습니다. 이같은 변화들은 냉전안보논리와 경제개발로 정권유지의 정당성을 삼아왔던 박정희 정권에게는 권력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위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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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8월에 발생한 전국해상노조 조선공사지부 파업엔 최초로 긴급조정권이 발동되었다.   - 출처: 한국노총 ]

혹한 속에 출발한 ‘대망의 70년대’ 

이에 대해 박정희정권은 보다 폭력적이고 직접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박정권은 국가안보의 강화를 내세워 통제를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연장을 획책하였죠. 그리고 외국자본을 더 많이 끌어들이고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자본축적의 위기를 해결해주고자 하였습니다.  1971년 12월6일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이은 12월27일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공포는 이같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위기타개를 위한 폭력적 조치들이었고 이를 집대성하여 완결한 것이 1973년부터 출범한 유신독재체제였어요.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요건인 3권 분립을 철저히 무시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원천적으로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노동기본권을 봉쇄하고 자본에 대한 각종 특혜를 통해 자본축적의 기반을 확고하게 보장해 주었죠. 유신체제의 이러한 특성은 출범 후 곧바로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73년 8월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 후, 10월2일 서울문리대 학생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유신반대투쟁은 전국 각 대학과 지식인, 종교계, 언론계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주화투쟁은 아홉 차례의 긴급조치와 휴교, 제적, 해직, 투옥, 사형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유신반대투쟁은 재야민주화세력을 형성하면서 유신체제의 동반자로 침묵을 지켜 오던 야당까지도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 농민의 저항도 격화하였죠. 

1979년 들어 유신독재체제의 위기는 폭발점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제2차 석유파동에 따라 경제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가운데 8월에는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이에 항의하는 야당을 야만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이에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중항쟁이 폭발하고 권력 정상부에는 대립과 분열이 야기되었습니다. 마침내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되고 18년 간의 박정희 1인독재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의 친위세력인 신군부는 12월12일 쿠데타를 감행하여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1980년에 들어서자 정치판은 권력쟁탈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안개정국의 혼란을 깨고 나선 것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었죠. 대학생들은 처음 학원민주화투쟁에서 시작하였다가 5월 들어서는 거리로 뛰쳐나와 유신세력 타도, 계엄 즉각 철폐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대행진’에 돌입하였습니다. 대학생들의 시위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5월15일 서울역 대규모 집회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죠. 또한 노동자들은 노조결성,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어용간부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에 걸쳐 법률상의 제약을 뛰어 넘어 전개되었으며 사북사태처럼 공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죠. 

그러나 학생과 노동자의 투쟁은 곧 신군부의 반격에 직면하였습니다. 5월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자 ‘천혜의 순간’을 맞은 신군부는 주저 없이 쿠데타를 단행했습니다. 신군부가 5월17일 밤 재야인사들과 학생대표들을 대량 검거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서울의 봄’은 막을 내리고 신군부의 잔혹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치열한 열망은 광주민중항쟁으로 분출하였습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972년부터 제2, 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공업화는 더욱 진전되었고 수출액도 급증하였으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9.6%에 이르게 되었죠. 그러나 경제성장은 여전히 외국돈을 들여와 저임금 노동력으로 가공하여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외채는 나날이 늘어났습니다. 1973년부터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지만 부실 과잉 중복투자 때문에 경제위기의 주범이 됐죠. 또 박정희 정권은 농촌과 중소 영세기업을 소외시키고 대기업 독점자본에 파격적인 재정 금융상의 특혜를 베풀었어요. 이를 통해 독점자본은 거대한 재벌을 형성하였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는 일상적인 것이 됐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처지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어요. 노동자들의 임금은 70년대 내내 최저생계비의 절반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었고 실질임금은 노동생산성 증가율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이처럼 1970년대 경제는 고도의 양적성장을 이룩하였지만 그것은 방대한 노동자의 한계 이하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노동자의 상대적 빈곤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갖는 이런 모순들은 1970년대 말 제2차 석유위기가 도래하자 모두 드러났습니다. 수출이 둔화하고 외채위기가 엄습하였고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저항이 폭발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은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하였던 거죠. 1980년 신군부의 5.17 쿠데타는 이 위기를 민중들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역사적 반동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한편 이러한 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임금노동자는 1970년 378만 6천명에서 1980년 648만 5천명으로 증가하였고, 생산직 노동자가 1980년에는 절반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대기업 노동자들도 증가하였고 18~29세 계층이 60%가까이 늘어났어요. 특히 여성의 경우는 24세미만 계층이 75.5%로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별로는 여성의 비중이 1970년 33.2%에서 70년대 말에는 40%대 까지 높아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성장으로부터 소외된 농촌경제의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든 이농인구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대공업으로 결집·조직되고 훈련·단련되면서 임금노동자계급의 기본적 속성을 굳혀 가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에 반비례하는 상대적 빈곤은 노동자들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지배권력은 노동운동을 직접 억압하였습니다. 1971년 12월27일 제정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이 법은 제9조 1항에서 “비상사태 하에서의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여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하며 이를 위반하면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였어요. 이로써 사실상 노동기본권은 봉쇄되었고 노동자들은 ‘일은 시키는 대로 품삯은 주는 대로’라는 임금노예의 암울한 우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와 정책 아래에서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숨쉬는 자유 이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중공업대기업의 남성노동자 위주의 사업장에서는 일제시대 이래 통용되어온 병영적 노동통제가 횡행하였습니다. 경공업부문의 수출지향적 가공산업 부문에서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최악의 노동조건과 사용자들과 남성 중간관리자들의 야만적인 인권유린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죠. 이에 대한 불만표시나 저항의 움직임에는 회사측과 권력기관으로부터 해고, 감시, 연행, 구속, 폭행 등 가차 없는 보복이 가해졌습니다. 때로는 상급노조까지 여기에 가세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을 가차 없이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축출하였으며 심지어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오랫동안 생존위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고도 경제성장의 황금시대, 그것은 노동자들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로 가득한 가혹한 인고의 세월이었죠.

wblee_02.jpg새로운 노동운동을 향한 ‘인간선언’의 불꽃, 전태일

1960년대 이래의 경제개발은 저임금과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기반으로 한 불균형 성장이었고 노동자들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대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질수록 더욱 가난해졌어요. 노동자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사회적 저항도 높아지고 있음에도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 경제개발이 위기에 봉착하자 또 다시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이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1970년 초 발효된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은 다가올 노동탄압의 신호탄이었죠. 그러나 노동운동의 총본산이라는 한국노총의 대응은 무력하기 그지없었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성장의 외곽지대에 소외된 채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막막한 상황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면서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을 불길 속에 던진 겁니다. 스무 살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환상에 젖어 있던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죠. 모임을 만들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관계당국에 진정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사용자들의 해고와 관계당국의 홀대, 무관심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전태일은 시위를 통해 요구조건을 밝히려 하다가 경찰이 막자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입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고도성장의 그늘아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호소할 수조차 없는 암흑과 같은 상황에 대한 ‘인간선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마침내 얼음처럼 굳고 차디찬 현실을 뚫고 불꽃이 되어” 사회 각 부문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던진 것이었죠.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급속도로 확산시켰어요. 사건이 나자 모든 신문, 잡지들은 과거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 취급했던 태도를 벗어나 노동자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눈을 돌려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그간의 경제성장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 안팎의 자본 특히 대자본을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폭로하였습니다. 전태일의 생활과 요구는 고도성장이라는 장밋빛 환상의 그늘 아래 수탈당하고 무시당해온 광범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대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노동조합운동의 허점을 고발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노동조합운동이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기구로만 존재하고 있었고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를 소외시켜 왔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넷째, 노동문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하는 계기를 이루게 됐습니다. 전태일이 몸을 불사르자 정치운동에 몰두해온 학생들은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항의시위에 나섰고 종교계와 지식인들은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스스로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다섯째, 노동자들이 자신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히 나서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노동자들은 자결을 위협수단으로 내세우기도 하였고 몇몇 노동자들은 실제 자기 목숨을 던지기도 하였어요. 1970년 11월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노조활동 보장을 요구한 분신자살 시도, 1971년 1월12일 광주 아시아자동차 노동자들의 노조결성 방해에 항의한 자결 선언, 2월2일에는 서울 한국회관 식당의 노동자 김차호가 프로판 가스통을 안고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하는 등의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또, 1971년 3월에는 서울 한영섬유 김진수가 사용자 측의 노동조합 탈퇴강요를 거부하다가 드라이버에 맞아 숨졌고, 1973년 12월19일에는 서울 조일철강사 노동자 최재형이 회사측의 노조결성 방해에 항의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1974년 2월22일에는 대구 대동신철공업사 노동자 정세달이 기업주의 횡포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습니다. 1978년 10월20일 서울 삼화운수 소속 시내버스 안내양 강이숙은 회사측의 지나친 몸수색에 항의하며 자결하였고, 11월3일에는 삼영정밀공업사 노동자 정귀한이 “사장님,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해 주십시오.”라는 유서를 써 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8월에는 YH무역노조간부 김경숙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했죠. 

밑으로부터의 노동자 저항 격화

국가권력의 억압이 가중되어 오고 노동자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처럼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살라 저항투쟁의 불길을 당기고 노동운동의 전환을 요구하였습니다. 한국노총은 ‘신풍 정화운동’을 통해 전기를 마련할 것을 선언하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국가보위법 공포에 이어 등장한 유신독재체제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순응해 버렸습니다. 이를 한국노총은 국가이익우선주의를 전제로 한 실리위주의 운동기조라고 설명했습니다만, 노동기본권이 봉쇄된 상황에서 그것은 노사협조주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죠. 

이로부터 노동조합운동은 무력화하고 한국노총은 노동자들의 저항과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제세력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어요.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완강히 반발하였고 산별노조들은 국가권력의 비호를 배경으로 중앙집권적 조직체계를 내세워 산하조직의 저항을 억눌렀습니다. 결국 한국노총은 밑으로부터의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와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자기발전의 토대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노동운동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밑으로부터의 저항은 격화하였고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확산되었죠. 노동자들은 유신체제의 삼엄한 억압을 무릅쓰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 태업, 농성, 시위, 준법투쟁 등 다양한 전술을 개발·발전시키면서 생존권 보장과 인권탄압의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의 한 갈래가 노동조합 결성투쟁이었어요. 노동자들은 한계 이하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목숨을 건 노조 결성에 나섰죠. 노조원은 해마다 증가하여 1978년에 이미 100만명을 돌파하였습니다. 특히 섬유, 화학, 금속 등 제조업의 조직은 크게 증가하였고 독점재벌 기업에서도 과감한 조직결성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70년의 한국화이자제약과 아세아자동차, 1971년의 한영섬유, 1974년의 종근당제약·동아일보·한국일보·반도상사, 1975년의 세종호텔, 1977년의 삼성제약·인선사·미풍 등에서의 투쟁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의 개선과 조직수호를 위해서도 용감하게 노동쟁의를 벌였습니다. 파업, 농성, 시위 등 집단행동으로 발전한 노동쟁의, 정부와 자본가들은 이것을 노사분규라고 불렀습니다만, 노동쟁의는 삼엄한 유신체제 아래에서도 매년 늘어 1975~1979년간 연평균 109건에 이르렀죠. 이것은 합법적 쟁의가 가능했던 1966~71년의 파업건수인 66건의 7배를 훨씬 넘는 수준입니다. 노동자들은 작업거부와 농성 이외에 식사거부, 시위, 집단진정 등 다양한 투쟁전술을 구사하고 ‘준법운동’이라는 방식을 활용하기도 하였죠. 

이들 집단행동들은 대개가 제반 법률규정들을 거스르는 불법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임금 노동조건 개선과 관련한 대표적인 노동쟁의로서는 삼립식품(1973), 반도상사(1974), 삼원섬유(1976), 풍천화섬·대협·시그네틱스·방림방적(1977), 아리아악기·남영나일론(1978), 해태제과(1979) 등에서의 투쟁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노동조합 민주화 및 노조수호투쟁으로는 원풍모방(1972~75), 인천 동일방직에서의 투쟁(1976~78), 청계피복(1977)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표적인 예이며, 휴·폐업반대투쟁은 1979년 YH무역 노동자들의 일련의 활동과 신민당사 농성투쟁을 전형적인 예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동쟁의는 대부분 노조가 주도하였지만 노조가 없는 곳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어요.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주거권, 임금인상, 작업조건, 권리보장 등 다양하게 걸쳐 있었으며 대부분 법적 제약을 뛰어넘는 탈법적인 것이었고, 때로는 폭력적인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로는 1971년 광주단지 주민들의 시위, 베트남 파견기술자들의 대한항공(KAL)빌딩 방화·시위, 병원 간호사와 수련의 파동, 1973년 삼립식품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 1974년 울산 현대조선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1977년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 풍천화섬 노동자들의 추석날 시위 등을 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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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종교계는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성문밖 교회에서 문화공연 중인 노동자들   - 출처:한국노총 ]

노동운동의 확산: 지식인 및 종교계의 참여와 지원

우리나라에서 지식인이 노동운동을 지원하거나 참여한 것은 일제 때부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야학, 사상운동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적색노조, 교원노조, 신문사노조 등 직접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하기도 했던 거죠.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부터는 지식인의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과 참여는 거의 전무하였고 관심도 낮았습니다. 학생운동은 정치투쟁에 집중되어 있었고, 몇몇 지식인들만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일 정도였어요.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경제개발의 모순이 드러나고 노동자들의 저항이 격화하자 지식인들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의 분신이었죠. 

전태일의 분신에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은 노동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들은 노동문제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하고 농성, 실태조사, 추도회, 시위 등을 통해 노동문제의 해결을 요구했습니다. 이후 학생들은 중요한 노동자 투쟁에 대해 지지하고 각종 선언문과 성명서에서 노동기본권의 보장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노동운동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학생운동가들은 직접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야학, 교회운동, 민주노조의 지원, 노동현장에의 투신을 감행하였어요. 일부는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에 직접 들어가 전문 실무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움직임은 이후 학생운동 발전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됐죠.

이 밖에 지식인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연구와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을 지원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은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자각을 고취시키고 노동운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죠. 그러다가 고대 노동문제연구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유신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아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과 더불어 70년대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도시산업선교회(산선)와 가톨릭 노동청년회(가노청, JOC)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계였습니다. 이들 종교계의 목사, 신부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경험하고 권익옹호에 나서게 되었죠. 특히 한국노총이 유신체제에 눌려 무력해지자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을 높이는데 적극 나서고 노동자들의 밑으로부터의 저항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많은 노동자들은 의식을 깨우치고 권력과 자본의 억압 그리고 한국노총 및 산별노조의 무기력한 태도에 대해 대항하였어요. 그러자 독재정권과 한국노총은 위협을 느껴 종교계를 불순세력이라 하여 적대시한 나머지 목사와 신부들을 구속하고 자주적·민주적 노조들을 파괴하고 노동자들을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과 참여는 투철한 계급적 입장이 아니라 종교적 양심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유신독재체제 하의 암울한 상황을 뚫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힘으로 떨쳐 일어날 수 있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wblee_04.jpg민주화운동 주역으로의 치열한 발돋움

전태일의 분신 이후 유신독재정권의 직접적인 억압아래 노동자들의 저항이 지속되고 노동운동의 지형이 확대되는 변화 속에서 권력과 자본에 대한 일방적 종속, 그리고 한국노총에 대한 맹종을 거부하는 노동조합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민주노조’들로 원풍모방, 인천 동일방직,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타, 청계피복 등의 노조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들 민주노조는 대체로 섬유·의류·전자와 같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속해 있었고 조합원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970년대 전반기에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거나, 새로이 결성되는 두 가지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습니다. 이들 민주노조들은 결성과정과 일상활동, 투쟁과정에서 산선과 가노청 등 종교계와 지식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았죠. 

민주노조들은 조합원들로 소모임을 구성하고 이들 현장조직들을 토대로 조합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민주노조들은 다양한 교육활동을 벌였는데, 교육내용은 주로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의식과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들이었죠. 그리고 교육방법에 있어서는 강사의 강의 외에 토론, 노래, 율동, 연극, 촛불의식 등을 통해 의식화 교육에 주력하였습니다. 

민주노조들은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과 각종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단체행동을 통해 요구조건을 쟁취해 냄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하였어요. 이렇게 하여 형성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민주노조들은 끊임없이 가해지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상급조직의 탄압에 과감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거죠. 그 대표적인 예가 원풍모방지부의 노조민주화투쟁과 회사재건투쟁(1974), 청계피복지부의 노동교실 사수투쟁(1977년 9월), 동일방직인천지부의 1976년 이후 2년여에 걸친 처절한 조직수호투쟁(1976년 2월~78년 4월), 반도상사지부의 노조결성투쟁과 임금인상투쟁, YH무역지부의 폐업반대투쟁(1979년 8월) 등입니다. 이 같은 투쟁과정에서 민주노조들은 다양한 투쟁방법을 개발해 내고 자본과 권력의 횡포를 폭로하였죠. 

한편, 민주노조들의 이 같은 투쟁은 권력과 자본의 억압에 굴복한 한국노총과 산별노조에 위협요소가 되었어요. 그 때문에 상급노조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1976~78년의 동일방직인천지부사건은 국가권력과 자본, 상급노조의 3부 합작에 의해 획책된 노조파괴에 정면으로 대항한 전형적인 예였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조 간부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긴밀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한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의논하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였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에는 개별노조 차원을 넘어 연대투쟁, 정치투쟁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77년 7월10일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가스질식사에 항의하는 연대시위, 1978년 3월20일 기독교방송국 점거시위, 1978년 3월26일에는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등이 그 예들입니다. 

또한 민주노조들은 산별노조와 노총의 민주화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YH 노조는 섬유노조의 횡포에 정면으로 대항하였고, 콘트롤데이타노조는 금속노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이들은 1980년 5월13일 한국노총이 주관한 ‘노동기본권확보 전국 궐기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장을 장악하고 2일간의 농성을 이끌면서 한국노총의 각성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죠.

이와 같이 197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민주노조들은 정치권력·자본·상급노조의 탄압에 맞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습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대부분 종교세력의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권리의식 주체의식에 눈을 떠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인한 투쟁을 벌였어요. 민주노조들은 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적 역량을 구축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하였죠.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들은 권력과 자본의 탄압실태를 폭로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사회전반에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키고,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불씨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라는 ‘자유화’운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민주화운동의 폭을, 민주노조운동은,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민중운동의 선구가 됨으로써 대오를 확장시키고 ‘사회화’라는 새로운 차원을 추가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축적의 수호신이었던 유신체제에 끊임없이 타격을 가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붕궤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과 간부들은 시도 때도 없이 권력기관에 연행, 구속, 수배되거나 해고되기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어요. 이런 여파로 민주노조들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자본과 신군부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원풍모방노조를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계피복노조는 군사정권의 해산명령에 맞서 비합법조직으로 살아남아 격렬한 복구투쟁을 벌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새로운 노동운동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만, 70년대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과 노동운동의 폭발 

1980년에 접어들자 유신체제 이후의 권력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제는 제2차 석유파동과 세계적 대불황의 여파로 파탄의 위기에 휩싸였고 노동자들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자 자신의 요구를 분출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1980년 1월29일 서울 영광택시 운전기사들이 사납금 인상반대를 내세우고 승차거부에 나서면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3월부터 5월에 걸쳐 임금인상 시기에 접어들면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노동청은 5월1일까지 80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는데,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임금인상, 체불임금 청산, 휴폐업 및 해고반대, 어용노조 민주화, 노조결성, 해고자복직, 기타 노동조건 개선 등이었죠. 

임금인상투쟁은 합법적 절차에 따르거나 준법투쟁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법률 제도상의 제약을 무시하는 탈법적 투쟁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탈법투쟁은 파업, 태업, 농성, 시위 등 매우 격렬한 양상을 보였으며, 경찰력과 정면 대결하기도 했죠. 이 같은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예년에 비해 높은 임금인상요구조건을 제시하여 강력한 투쟁력을 배경으로 대부분 관철시켰습니다. 체불임금청산을 둘러싼 투쟁 역시 농성 파업 시위형태로 벌어졌지만 그 절박성에 비해 격렬하거나 지속적이지 못했어요. 신규노조 결성도 활발하여 5월까지 8만명이 조직될 정도였습니다. 휴폐업 저지 및 해고반대투쟁 같은 경우 동명목재의 대규모 농성시위, 동일방직·원진레이온·호남전기 등에서도 해고자 복직요구를 내걸고 전개된 농성투쟁 등을 예로 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용노조민주화를 둘러싼 조합원들의 투쟁은, 독자적인 요구로 제기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요구조건과 함께 제시되어 전개되었습니다. 산별노조 수준에서는 섬유, 금속, 자동차노조 등에서 어용간부퇴진 요구가 거세게 나왔고, 사업장 단위에서도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죠. 이러한 노조민주화의 요구와 투쟁이 한국노총으로 확산되었고, 민주노조를 주축으로 한 노동자들은 1980년 5월13~14일 한국노총의 노동기본권확보 궐기대회장을 장악하고 어용노조간부들의 즉각 사퇴와 노동기본권 확보를 투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1980년 봄의 짧은 기간 동안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어요. 노동자들은 합법 탈법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요구를 관철하는데 유리하고 자신의 투쟁력에 알맞은 투쟁방식을 구사했습니다. 그럼으로써 1970년대 준법투쟁 위주의 소극적 방법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시키고 있었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법률로 묶여 있던 노동기본권을 사실상 쟁취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북 동원탄좌,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의 노동자들은 지역점거, 경찰력과의 직접적인 대결, 공장파괴와 방화 등 1970년대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투쟁들은 전국적으로 벌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의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한 양상을 보입니다. 이것은 1970년대 이래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한 기업의 성장과 함께, 이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계급이 성장한데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기업을 보호해왔던 정치권력의 억압이 약화하면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결과였죠. 이러한 양상은 노동운동의 중심이 1970년대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로부터 중화학공업의 남성노동자들로 옮겨가고 있음을 예시해주는 것이었어요. 

‘80년 봄’의 이러한 투쟁양상은 70년대에 잠재되어 축적된 역량의 폭발적 표현이었죠. 그럼에도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뚜렷한 방향성을 내보이지 못한 채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구내용이나 투쟁방식에 있어서도 경제적 차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또한 투쟁은 사업장 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산업별 또는 지역적인 연대로 발전하지 못하였죠. 1980년 봄 투쟁에서 나타난 노동운동의 이러한 특성은 노동자계급의 폭발적 에너지를 담보해낼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노동조합운동을 지배해온 어용적이고 허구적인 이념과 지도체계의 필연적 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밑으로부터 전체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지향을 담아낼 정도로 자주적인 운동주체역량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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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당폐업 철회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는 YH노조 조합원들  - 출처:한국노총 ]

1970년대, 전태일에서 김경숙의 죽음으로 이어진 10년 

폭압과 야만이 고도성장의 신화로 채색된 10년, 1970년대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국민 대다수의 기본권과 인권유린을 제물로 하여 대외 종속과 독점을 더 한층 심화시킨 독재권력과 자본의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황금의 시대는 다른 한편에 민중들에 의한 반역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은 방대한 무산대중을 만들어냈고 임금노동자를 사회구성원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하게 하였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대공업에 결집되어 조직·훈련·단련됨으로써 계급적 기본속성을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계이하의 저임금, 세계최장의 노동시간,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작업조건, 인권유린, 고용불안 속에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착취당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권력과 자본의 탄압에 굴복하여 극도로 무력해졌고 오히려 노동자들을 억압하기도 하였죠. 노동자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법률상의 제약을 뛰어넘어 스스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노동자들은 합법적인 쟁의가 가능했던 1960년대 보다 훨씬 더 많이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투쟁은 70년대 초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70년대 말 YH무역 김경숙 열사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참담한 처지와 투쟁은 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불러일으켰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운동의 지형을 모색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노조운동이었던 거죠. 

이와 같이 70년대 노동운동은 비록 잠재적이지만 더 큰 성장과 성숙을 위한 역량을 축적해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은 아직 자연발생적이고 분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어요. 또 광범한 노동자들의 계급적 자각을 바탕으로 보다 과학적 이념을 정립하거나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지속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였죠. 이것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민주노조운동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제의 해결은 신군부정권의 포악한 탄압 아래 민주노조들이 파괴됨으로써 또 다시 미루어 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 때문에 노동운동은 1980년대 중반 내내 숱한 모색의 실험대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마침내 1987년 노동자대항쟁을 분기점으로 새로운 지형을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