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노동운동

노동사회

필리핀의 노동운동

편집국 0 4,240 2013.05.17 09:11

 


swpark_01.jpg20세기 필리핀 노동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필리핀의 노동운동 또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경제적 노동운동에 머물지 않고 사회주의 계급운동, 민족운동, 민주주의운동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정치적 노동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좌파 사회주의 진영과 우파 보수 진영, 투쟁적이고 강경한 노선과 온건한 타협주의 노선, 반체제 민주노동단체와 관제 어용노동단체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이어져왔다. 

필리핀 노동운동, 복잡한 변화와 복합적인 내부갈등

또한 시대적 국면에 따라 어떤 시기에는 노동운동이 반식민지 또는 반미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하고, 어떤 시기에는 반체제, 반독재 민주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등 그 성격이 복잡하게 변화해 왔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갈등적인 성격, 그리고 이에 기인하는 필리핀 노동운동 각 진영 내부의 분열주의와 분파 간 투쟁이,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는 필리핀 노동운동을 매우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필리핀 노동운동 내부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체 역량을 훼손시키는 심각한 결함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필리핀의 노동운동을 사회주의 계급운동, 민족주의운동 및 민주운동의 복합적 성격이 시대적 국면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양태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하여 분석하고자 하며, 이를 크게 아래의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1) 태동기(19세기 말~1929년), (2) 성숙기(1930~1945년), (3) 전후(戰後) 초기(1945~1965년), (4) 마르코스 집권기(1966~86년), (5) ‘피플파워’ 혁명 이후 시기(1986년~현재). 

이 중에서 1929년까지의 태동기는 필리핀 노동운동이 첫 걸음마를 내딛던 시기이자, 사회주의 사상이 필리핀 노동운동에 처음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인 성숙기는 필리핀공산당이 창설되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좌파 운동세력이 필리핀 노동운동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하던 시기로, 노동운동이 사회주의 계급운동과 더불어 반미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던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인 전후 초기에는 미군과 필리핀 정부에 의해 좌파 사회운동이 크게 탄압을 받던 시기이며, 네 번째 시기인 마르코스 집권기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란 큰 틀 속으로 모든 사회운동이 결집되던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피플파워 혁명에 의해 마르코스 체제가 붕괴된 이후 오늘날까지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 서로 다른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다양한 노동운동이 서로 공존하며 경쟁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반식민지 민족운동으로서의 시작

필리핀에서 최초의 노동운동은 19세기말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반식민지 민족독립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92년 보니파시오(Bonifacio)가 조직한 반 스페인 독립운동 단체인 까띠뿌난(Katipunan)의 주된 구성원들이 바로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뒤에 아기날도(E. Aguinaldo) 혁명군의 주축을 이룬 것도 이들 노동자들이었다.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이처럼 처음부터 반식민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좌파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 계급운동의 성격도 띠었다. 필리핀 최초의 사회주의 이론가는 델로스 레이예스(De los Reyes)로 그는 1902년 1월 필리핀 최초의 산별노조라 할 수 있는 필리핀인쇄노동조합연합(UIF)과 노조연맹인 민주노동자연합(UOD)을 결성한다. UIF에는 인쇄업에 종사하는 많은 노조와 길드가 참여하였으며, UOD는 인쇄업뿐만 아니라 담배공장의 노동자와 재봉사, 제화공, 목수, 공예업자, 이발사 등 여타 산업의 노동자들도 포함되었다. 델로스 레이예스는 오늘날 ‘필리핀 노동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필리핀 노동운동이 이처럼 반식민지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자 미국 식민지 당국은 이에 대해 탄압과 회유 양면 정책으로 적극 대처하기 시작한다. 델로스 레이예스는 수 차례에 걸쳐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02년 8월 체포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UOD를 이끌던 고메스(D. Gomez)마저 식민지당국에 의해 체포되자, UOD로부터 15만명에 달하는 노조원들이 탈퇴하는 등 필리핀의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노동운동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새로이 등장한 것이 식민지 당국의 후원을 힘입어 탄생한, 이른바 ‘황색노조(yellow union)’들이었다. 당시 필리핀 총독인 태프트(W. H. Taft)는 필리핀의 노동운동을 노사관계와 타협주의의 틀 내에 제한하되, 이 틀 내에서 운용되는 노조에 대해서는 적극 후원하는 온정주의적 정책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필리핀노동자연합(UTF) 등의 온건 노조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미국 식민지 시대 초기 필리핀에서는 사탕수수, 코코넛 등 수출농산물 재배가 활발하였고, 담배, 설탕 등 농산물 가공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관계로 이들 산업에 종사하는 산업노동자, 농업노동자, 그리고 운수, 해상, 부두노동자 등 노동자단체가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 필리핀 노동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는 에반젤리스따(C. Evangelista)인데, 그의 이름이 필리핀 노동운동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6년 새로이 재건된 UIF의 사무총장이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1919년 당시 상원의장이던 케손(M. Quezon)을 단장으로 하는 필리핀 독립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다녀오게 되는데, 이 여행에서 에반젤리스따는 미국의 사회주의 계급운동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이후 필리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며, 미국 여행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더욱 더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운동으로 전환하게 하였다. 

이처럼 필리핀 노동운동 제1기는 좌파와 우파, 강경노선과 온건노선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진행되는 가운데 필리핀 노동운동의 틀이 서서히 형성되어 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 식민지당국의 탄압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필리핀의 노동운동이 국가 억압에 대한 내성을 키우고, 그 생존역량을 조금씩 강화시켜 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좌파와 우파, 강경노선과 온건노선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그 대립은 폭력적이고 전면적인 대결은 아니었다. 두 진영은 화학적인 결합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물리적 공존은 가능했다. 

필리핀공산당 창설과 사회주의 색채의 강화 

이와 달리 제2기(1930~45년)는 1930년 필리핀공산당의 창설을 계기로 하여 좌파 사회주의 노선이 그 색채를 더욱 뚜렷이 하면서, 사회주의 계급운동과 반식민지 민족운동으로서 투쟁적인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부상하던 시기라 하겠다. 그리고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타협주의적 노동운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생기게 되었고, 두 진영 간 대립이 더욱 격렬해졌다.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1930년 필리핀공산당 창설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에반젤리스따는 1929년 6월에 KAP란 노동운동단체를 구성하는데 이는 (1)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2) 식민지배와 외국인의 침탈로부터 필리핀을 해방하며, (3) 노동자의 정치권력을 수립하고, (4)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소련을 방어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 KAP가 모태가 되어 탄생한 것이 필리핀어 약자인 PKP(Partido Komunista ng Pilipinas)로 잘 알려진 필리핀공산당이다. PKP는 1930년 8월26일 창설되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교리에 충실하고 앞서 언급한 KAP의 강령을 그대로 준수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고 지주 및 교회의 토지를 몰수 분배하는 것을 조직운용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필리핀공산당(PKP)은 창설 직후부터 미 식민지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1931년 5월1일에는 PKP의 주요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일제 검거가 실시되어 24명이 체포ㆍ투옥되었으며, 1932년에는 대법원이 PKP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많은 좌파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당국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거나 때로는 PKP와 절연하는 등 조직 역량이 크게 약화되었다. PKP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32년 필리핀사회당(SPP)과 노동자총연합(AMT)이 설립되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추스르게 되는데, 아바드 산토스(P. Abad Santos)와 타룩(L. Taruc)이 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일본이 마침내 필리핀을 침공했다. 일본의 침공이 시작되자 PKP 지도부는 즉시 회합을 갖고 항일 게릴라전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2년 1월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들 PKP의 지도부를 체포·구금한 일이었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에반젤리스따는 체포 직후 처형되었다. 

일본점령군에 체포되지 않은 PKP 및 진보적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은 마닐라를 탈출하여 마닐라 북부의 중부루손 지역으로 잠입해 들어가 게릴라 전쟁을 개시한다. 이들은 헉(Huk) 또는 헉발라합(Hukbalahap)이라 줄여 부르는 ‘항일인민군’을 조직하였는데, 이는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타룩이 Huk의 실질적인 지도부라 할 수 있는 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은 정교한 군사조직을 갖추고 대일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갔으며, 특히 탈락, 팜팡가, 누에바에시하, 불라칸 주(州) 등을 장악하였다.

독립 이후, 친자본 노조들의 성장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미군이 다시 필리핀에 돌아왔다. 그 뒤 미국의 식민지배는 1946년 7월14일 공식적으로 끝을 맺고 필리핀은 독립을 하였다. 그러나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 로하스(M. Roxas, 1946~1948)에서부터 키리노(E. Quirino, 1948~1953)를 거쳐 막사이사이(R. Magsaysay, 1953~57) 및 가르시아(C. Garcia, 1957~61)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미군과 정부당국에 의해 철저하고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다. 전후 동아시아의 세계질서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 간의 대립으로 보고,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의 남진을 봉쇄하는 것을 전후 국제질서 운용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서태평양의 최일선 전진 기지였던 필리핀 군도에서 공산주의에 경도된 사회운동의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점령기간(1942~45년) 동안 헉(Huk)을 비롯한 좌파 사회운동 지도부는 미군과 필리핀 정부를 대신하여 적국인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1945년 2월 미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타룩 등 Huk의 지도부는 그간의 공훈에 대해 치하를 받기는커녕 미군에 의해 바로 체포ㆍ투옥되는 대접을 받았다. 이들과 더불어 다른 공산당 지도부도 모두 투옥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탄압에 항거하는 대규모 민중시위로 인해 미군은 그 후 이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전부 마닐라를 떠나 중부루손 산악지역으로 숨어 들어가서 반미ㆍ사회주의 혁명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 미군 군사고문단의 부추김을 받은 필리핀 정부군과 경찰은 공산당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거나 좌파적이라고 규정된 모든 노동단체와 그 지도부에 대해 가차없는 탄압을 가했다. 그 주된 타겟이 된 것이 바로 PKP, Huk, 그리고 노동기구회의(CLO) 등인데, CLO는 전후 최초로 나타난 대표적인 좌파 노동운동조직으로 1945년 7월에 결성되었으며 PKP 당원이었던 발고스(M. Balgos)와 카파도시아(G. Capadocia), 그리고 헤르난데스(A. Hernandez) 등이 주도하였다. CLO는 조직이 창립된 이후 1년 동안에 무려 49회의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이 파업에는 연인원 4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들 파업은 거의 대부분 성공적이었으며, 그 결과로 CLO에 가입한 노조원의 수는 크게 늘어나 초기의 1만명 수준에서 나중에는 10만명으로 불었다. 한편 비사야스 지역에는 호세 나바(Jose Nava)가 주도하는 필리핀노동자연맹(PWF)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단체에는 1946년 말까지 237개의 노조가 가입하였으며 총 7만명의 노동자가 가담하였다.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특히 키리노 대통령의 집권기 동안 큰 시련을 겪었다. 1951년 1~2월에는 좌파 노동운동의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의 체포가 이루졌다. 이때 CLO의 의장이었던 헤르난데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PWF의 의장이었던 호세 나바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CLO와 PWF는 모두 불법단체로 규정된다.

한편 이들 좌파 노동운동 단체들에 대응할 새로운 친자본적, 온건노조들이 조직됐다. 그런데, 이들 단체의 조직에는 정부당국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앞장을 섰다. 우선 전국노동조합총연맹(NACTU)이 1949년 정부에 의해 조직되었고, 그 총재를 당시 노동부장관이던 피게라스(Jose Figueras)가 맡았다. 그리고 NACTU에 가입하지 않은 노조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되고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한편 1950년에는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자유노동자연맹(FFW), 자유농민연맹(FFF) 등의 보수적인 노조연맹들이 조직되었다. 

이처럼 좌파 조직인 CLO 등은 파괴되고 대신에 새로운 친자본적 형태의 노조들이 생겨남으로 해서 1950년대 후반(막사이사이와 가르시아의 집권기)과 1960년대 전반(마카파갈 집권기, 1961~65)에는 민족주의적이거나 전투적인 노조가 발을 붙일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각 노조나 노조연맹들의 내부는 서로 다른 분파간 대립과 갈등, 각축으로 점철되는 등 이 시기 필리핀의 전반적인 노동운동의 역량은 크게 저하되었다.

마르코스의 독재와 ‘5월1일 운동’의 등장

마르코스(F. Marcos)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필리핀의 노동운동은 크게 성장하였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노동운동의 내적 역량이 강화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급진학생운동의 등장은 필리핀 노동운동의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만으로는 사회변혁에 성공하기 힘들고, 결국 노동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과 힘을 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각 위에 학생운동은 노동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노조연맹인 자유노동자운동(KASAMA)과 전국노동자연합(PAKMAP) 등이다. 이들 급진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호세 마리아 시손(Jose Ma. Sison)이 있었다. 

1968년에는 그간 지속적인 정부의 탄압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거의 와해 상태에 놓여 있었던 필리핀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가 시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해 12월 열린 공산당 재건 당 대회에서 시손을 중심으로 한 모택동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공산당(CPP)이 창설됐다. 시손은 이 모택동주의적 신(新)CPP의 의장이 되며, 이 재건 공산당의 군사기구로 신인민군(NPA)이 조직된다. 이를 계기로 필리핀의 좌파 사회주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며, 그동안 활력을 잃었던 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이 CPP/NPA를 중심으로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는 CPP의 재건과 NPA의 활동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필리핀의 정치사회적 지평이 진보운동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것에 그 원인의 일단이 있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거의 4년 동안은 필리핀 노동운동에서 가장 암울했던 암흑기였다.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계엄정권은 공산당과 좌파 사회운동 단체의 지도자 및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지도자, 민족주의적 정치인, 반마르코스 야당 인사 등 5,000여명의 사람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였다. 

마르코스는 모든 종류의 파업을 전부 불법화하였으며, KASAMA, PAKMAP를 포함한 모든 진보적 노조들이 전부 불법화되었다. 진보적, 반마르코스적 노동운동을 어느 정도 정리한 마르코스 정부는 노동운동을 정부가 만든 틀 내로 순치시키고, 이를 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5년 12월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를 정부 주도로 결성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는 반독재 민주화를 주장하는 노동단체들이 새로이 결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전의 노동단체들과 달리 이들은 경제적 이슈뿐만 아니라 계엄정권 하의 인권 및 정치적 권리와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운동의 초점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국면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5월1일 운동(KMU)’이다. KMU는 1980년 5월1일 창설되었으며, 당시 10개의 노조연맹과 35개의 지역노조가 창설멤버로 참여하였다.

KMU 등이 처음부터 강경한 투쟁적 운동을 전개한 것과는 달리, TUCP는 온건 노선을 계속 고수하였다. 그러나 1983년 8월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guino Jr.)의 암살은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아키노의 암살 이후 노동운동 세력을 포함한 모든 반체제 민주운동세력과 마르코스 정권 사이의 적대적이고 폭력적 대립은 더욱 더 치열해졌다. 이 과정에서 TUCP 같은 온건적 노동단체들조차 마르코스 정권에 등을 돌리고 반체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swpark_02.jpg피플파워 이후 다양한 이념들의 분할공존

마침내 1986년 2월 ‘피플파워’ 혁명이 일어나고 마르코스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모든 노동운동 단체들을 포함한 민주운동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아 이 거대한 혁명을 성공시키긴 하였으나, 피플파워 혁명에 참여한 사회운동 세력들의 입장에는 미묘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KMU가 취한 태도이다. KMU나 순수 좌파 진보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와 그를 둘러싼 세력들은 결코 진보적 세력이 아니었으며, 필리핀의 기득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원하지 않는 보수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피플파워 혁명, 아키노와 그를 둘러싼 집단, 그리고 마르코스 이후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좌파 진영과 여타 진영 간 이러한 미묘한 견해 차이는 사실상 아키노와 라모스 시대,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필리핀의 노동운동의 구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필리핀 노동운동의 지평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다시 진보 대 보수의 전통적인 이념적 대립 구도로 돌아간다. 라모스 대통령 정권 하에서 새로이 필리핀노동자연대(BMP, 1995년), 필리핀전국노동연맹(NCLP, 1995년), 진보노동자동맹(APL, 1996년) 등 새로운 노조연합체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과 기존의 KMU, TUCP, FFW 등 다양한 노동단체들이 같이 공존하며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제 필리핀 노동운동은 과거의 민주화운동이나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은 약화되고, 그 대신 이념적 차이로 인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노동조합들이 혼재하여 활동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진보ㆍ보수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좌측에 위치하는 것은 역시 KMU이다. KMU는 여전히 모택동주의적 공산주의 정당인 CPP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KMU는 급진적 노선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자체 내에서도 불거져 나오면서 최근에 그 세력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편이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장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TUCP와 FFW이다. TUCP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출발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황색노조로서 설립 이후 현재까지 친정부적, 체제지향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KMU와 더불어 가장 많은 산하 조직과 조합원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의 가장 대표적인 노조연합체이다. FFW는 세 번째로 큰 노조연맹으로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전력을 갖고 있으며 이념적으로는 기독교 민주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 외에 이념적으로 중도에 속하는 많은 노동단체들이 있는데,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것은 그 중에서도 비교적 좌파적 입장에 속해 있는 BMP, APL, NCLP 등의 노동단체들이다. 오늘날 필리핀에서 이들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는 노조들과 그 연합체들은 과거 서로 격렬히 대립하고 갈등하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정책적인 면에서, 그리고 의회정치와 선거정치의 장에서 긍정적인 대결을 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9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