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엔진 복원과 분배·성장의 선순환

노동사회

성장엔진 복원과 분배·성장의 선순환

admin 0 3,891 2013.05.12 08:04

상장과 분배가 상충관계에 있는 것인지 조화 가능한 것인지에 관한 논쟁은 자유와 평등에 관한 논쟁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이 고전적인 논쟁거리에 대해 상식적인 대답은 성장과 분배는 언제나 함께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이냐 분배냐, 그것이 문제로다

분배가 성장의 조건이 되는 측면부터 보자. 상호 협력하는 두 기업 간의 관계에 있어 한 기업이 기술을 혁신하고 값싼 원자재나 생산수단을 제공하면 다른 기업은 그 덕을 볼 것이다. 반면 원청기업인 한 기업이 하청기업의 납품단가를 한없이 낮추어 다 뺏어가 버리고 기술투자를 할 여력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원청기업도 손해를 볼 것이다. 한편 이 두 기업의 노동자는 핵심적인 구매자이므로 무조건 임금을 깎으려고만 든다면 급기야 최종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줄어 기업의 투자와 성장이 위축된다. 반대로 지나친임금의 상승은 기업의 투자여력을 삭감하므로 이 또한 성장에 저해요인이 된다. 요컨대 적절한 분배는 결코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거시적 미시적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적절한 분배가 사회를 안정시키고 갈등비용을 낮추어 성장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사회적 차원도 자주 지적된다. 사회적으로 볼 때 분배의 차원은 단지 노사간에 국한되지 않고 소득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남녀간, 대기업-중소기업간 등등 다양하다. 이러한 영역에서 사회적 불만은 정치를 불안정하게 한다. 이런 일은 성장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억제하기 십상이다. 흔히 지적하는 남미경제의 문제가 이런 맥락 속에 있다. 남미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란 지나친 분배위주 정책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분배 무시 정책이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과 성장억제를 야기한 극단적인 경우이다.

거꾸로 성장 없이는 분배도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파이가 커져야 분배할 것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상투적인 답변말고도, 우리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성장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고인 물이 썩듯이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성장의 엔진이 꺼지려고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당장 폐지할 수 없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씨를 살려야 한다.

한국경제 위기 과도한 분배정책 탓?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투자가 아주 부진하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국내 기업은 단지 국내의 기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기업과 경쟁한다. 그러므로 투자를 통해 기업을 확장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산업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원래 수준도 유지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장이냐'는 질문이 항상 제기되었지만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은 성장이라는 물결을 편승하면서 무언가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점점 더 많이 추구할 수는 있으되 그것을 부정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경제가 과연 위기인가? 위기론을 '조장'하는 측의 의도가 불순한 점은 분명 있으나 이대로 그냥 간다면 위기가 올 것이라는 진단은 옳다고 본다. 물론 그 위기의 본질을 두고 '분배론자들이 정권을 잡고 분배위주 정책을 시행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분명 잘못이다. 언제 우리나라가 성장지상주의를 벗어나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분배정책을 시행해 보기라도 했는가? 그러나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시스템 차원에서 치유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공감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보수언론에서는 최근 수년간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에 이상이 발생한 문제를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과연 과도한 몫을 노동자가 가져가서 투자가 안 되고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가? 우선 거시적인 자료로 보아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피용자 보수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변화를 통해 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996년도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8%에 이르렀던 피용자 보수가 2000년에는 43%, 2003년에는 44.2%에 머물고 있다. 이는 고용비중이 상대적으로 줄고 자본장비율이 증가한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노동자들이 전체 파이에서 가져가는 몫이 줄어들고 것을 내포한다. 같은 일을 보다 적은 수의 노동자가 높은 강도로 처리하고 있을 수도 있고, 평균적으로 노동자 보수가 감소한 영향일 수도 있다. 특히 비정규직의 증대로 전체적으로 보수율이 감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건 결코 과도한 분배정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문제가 있는 건 성장엔진 자체

성장엔진의 이상, 고용창출능력의 현저한 감소가 지금 한국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이 이차적으로 분배를 악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총수요를 억제하여 성장을 억제하고 또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 '분배구조가 성장에 불리하게 돌아가서 그것이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논의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잘못된 분배가 성장정체의 근본원인이라는 주장, 따라서 분배를 개선하여 성장을 자극하자는 주장도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성장은 그 자체 독자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을 올바로 찾아야 한다.

어차피 노동집약적이거나 범용기술에 기초한 많은 산업은 아무리 임금을 낮추고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한다고 해도 중국과 단가 경쟁을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살길은 획기적인 투자의 증대 과정을 통한 산업기술의 업그레이드, 신산업의 개척, 이에 적절한 인력의 확충·훈련 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사회통합, 빈부격차해소, 농어촌대책, 10대성장산업 육성 등등 굵직굵직한 장기과제를 추진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도 못 나가는데 100보 앞을 미리 설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당장 기업투자의 활력이 살아나야 장기 과제도 추진력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산업 재편의 현실과 그 난맥상은 무엇인가? 무엇이 고투자와 그에 따른 산업기술의 업그레이드, 신산업의 개척, 이에 적절한 인력의 확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산업구조가 선진화 돼야

전체적인 산업 재편의 현황부터 보자. 서민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통부문의 변화부터 보자면 잘 알려져 있듯이 재래시장 상인들은 "IMF 때보다 더 살기가 어렵다"고 난리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OECD가입에 따른 유통시장 개방과 국내외 거대자본의 대규모 유통업 진출도 그 이유 중에 한 가지이다.

대형 할인점, 유통체인의 등장은 재래시장, 소규모 유통업자의 생존기반을 결정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으로 전자상거래의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을 정도로 팽창한 점, TV의 홈쇼핑 비중 증대 등 정보통신 혁명이라는 기술적 요인이 여기에 가세하였다. 과거처럼 길만 났다 하면 가게가 들어서는 구조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유통혁명'이 너무 급속하게 정부 정책을 통해 촉발됨으로써 서민의 생계기반을 와해시키고 그 결과 소득 분배 구조가 너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대형 유통업이나 온라인 거래망은 당연히 고용흡수력이 현저히 낮고 이는 실업의 문제를 야기한다.

제조업의 경우를 보자. 주지하듯이 90년대 중반이후 가장 급속하게 수도권을 중심으로 정보통신산업이 발전하였고 또한 수도권을 중심으로 관련 벤처산업이 성장하였다. 이 산업은 급속한 성장을 위해 고급 중간재·설비는 선진국에서, 저가 부품은 중국 등에서 조달하는 분업구조를 형성하여 국내 산업연관에 의한 동반성장에는 파급효과가 낮은 산업이다. 또한 고용유발효과도 낮다. 이는 결국 저고용에 의한 분배구조악화에 더해 지역간 불균형발전이라는 지역간 분배구조의 악화까지 초래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80년대부터 성장한 중화학공업은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방 산업이다. 97년 위기 이후 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재벌 등 대기업이 당시 입은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하면서, 이후 대대적인 업그레이드 투자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자동차 산업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전반적으로 정체하고 있으며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중국 등 후발국에 점점 더 자리를 내줄지 모른다는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벌써 많은 중소기업이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이 지금 채산성이 낮다고 포기하거나 계속 노동자의 고임금 탓을 하다가는 정말로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질지 모른다. 산업 투자를 활성화하여 구산업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신산업을 일으켜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고용창출을 통한 분배개선의 길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러면 기업과 관련된 서비스산업이 활기를 띨 것이고 서서히 서비스산업이 중심이 되는 선진형의 산업구조로 이행해갈 것이다.

성장엔진 복원을 위한 경제주체들의 역할

이렇게 IMF이후 급진 신자유주의정책에 의해 망가진 성장엔진을 되살리는 것이 모든 논의의 출발이라고 본다. 이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정부의 정책이다.

첫째, 금융시스템을 '주주가치 중시·단기이익극대화'로 가져간 결과 기업금융, 특히 지방금융과 중견기업 이하 기업의 금융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정부는 이를 되살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은행의 경우 정부정책에 편승하여 소비자에게 담보대출을 급격히 늘림으로써 자산버블을 발생시켜, 자산을 기준으로 한 분배구조를 극도로 악화시키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과다한 부채에 앉아 있는 소비자들의 소비여력 감소가 경기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다. 은행의 역할이 이런 식으로 흐르고 기업에 금융자원을 댈 대안적인 채널로서 주식시장이 제구실을 못하는 환경에서는 성장엔진이 다시 가동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둘째, 대기업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익률을 실현하고 있고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주로 외국의 투기적 펀드자본에 의한 경영권 불안정으로 좀처럼 투자를 하려 하지 않고 있다. 기업의 투명성, 책임성(사회적 책임성 포함)을 재고하는 것과 기업의 경영권 안정을 교환하는 일종의 빅딜을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외국의 단기적인 투기자본의 활동을 억제하는 정책(예를 들어 토빈세)을 시행하고 연기금, 종업원주식소유제도 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노동자를 포함하여 이해 당사자들이 기업경영의 감시자로 참여하는 방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의 경영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되, 경영권을 직접 위협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 정말 꺼질지도 모른다. 총수의 '황제경영권력'을 억제한답시고 -그것을 일거에 척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실제로는 기업의 확장과 활발한 투자를 억제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총수의 경영권력은 말하자면 정치적인 문제이다. 정치적으로 타결을 지어야 한다.

한편 노조는 성장엔진의 문제에 관해 일차적인 책임을 질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비정규직 문제에 관해서는 일정한 책임을 져야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신자유주의정책과 낮은 노조조직률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이 조직화를 하고 교섭력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이 조직화하지 않는다면 정규직의 양보는 자본의 몫을 늘릴 뿐 비정규직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급격한 기술변화, 산업 재편, 국제적 분업구조의 재편 등 최근 한국경제의 변화는 역사상 보기 드물게 급속한 것이다. 사람 짜르는 데 집중하는 노동유연성을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지만 기능적 유연성은 필요하며, 재훈련 등 지속적인 적응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노조가 기업과 국가의 재훈련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수명 다한 성장지상주의, 그 이후는?

파도가 거칠수록 배의 엔진은 힘차게 돌아가야 침몰하지 않고 전진한다. 우리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장의 엔진을 복원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의 창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장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그 자체로 분배를 개선하는 강력한 효과를 낳는다. 그러면서 한쪽에 집중된 성장이 아니라 지역간, 대기업-중소기업간, 노동계층간 고루 성장에 참여하고 그 열매를 공유하는 성장이 되어야 한다. 파도가 잔잔해지고 3∼5년 정도 경제가 순항하게 되면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탈락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과실이 돌아가는 보다 강력한 분배정책도 가능할 것이다.

한국 경제의 난맥상과 딜레마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아무런 준비와 안전장치를 마련하지도 않고 무모하게 성장지상주의를 내걸고 치닫는데서 발생했다. 과거 박정희식 동원체제는 분명히 그 수명을 다했고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전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는 모든 국민이 동원의 대상인 한에서 세계적으로 볼 때 분배구조가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옛날 이야기이다.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에게 너무도 급작스럽게 시장경쟁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짤라내고, 소수의 기업이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을 선점·독점하고 국민경제를 무시하면서 바깥으로 나도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주소이다. 그것이 한국판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다. 머리 꽤나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자식 유학 다 보내고 가정파괴를 불사하면서 기러기 아빠를 자처하고 있다.

함께 번영하는 시스템이 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성장과 분배의 선(善)순환'은 불가능하다. 성장 분배의 선순환이란 적어도 유기적인 국민경제가 존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서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 상대의 성장과 나의 성장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된다. 좁은 의미의 노사타협은 무력하며 오로지 '함께 번영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위한 국민경제 차원의 대타협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과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와중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신빈곤·절대빈곤에 대해서는 당장이라도 어떤 항목보다 재정을 우선 순위를 두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이 문제는 성장의 문제와 독립적인 분배 문제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