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좋고, 기분도 좋은 주말 오후 ‘범죄의 재구성’을 봤다. 왠지 수학적으로 느껴지는 수상한 제목의 이 영화는 1996년 실제 사기극을 토대로 만들어졌단다. 당좌수표의 발행 방식을 바꾼 계기가 된 이 ‘한국은행 사기 사건’은 아직 미해결이고, 덕분에 우리는 신문에서 “영화 개봉으로 긴장한 한국은행” 따위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영화배우=사기꾼?
사기 전과로 출소한지 한달된 최창혁(박신양)은 사기계의 거두 김 선생(백윤식)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토대로 5명의 사기꾼들을 모아서 한국은행을 상대로 한 50억 사기 사건을 벌인다. 최고의 떠벌이 얼매(이문식), 타고난 여자킬러 제비(박원상), 환상적인 위조 기술자 휘발유(김상호).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한 팀이 된 이 조직은 한탕에는 성공했지만, 얼매는 교통사고로 경찰에 잡히고, 제비는 치정사건에 얽혀 어이없게 죽고, 휘발유는 도박장에서 잡힌다. 그리고 최초 계획자 최창혁은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자동차사고로 죽고 만다. 그러면 50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자존심에 크게 상처입고, 금전적으로도 피해를 본 김 선생이 범인을 잡으러 나섰다. 동시에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도 추적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즐거움을 꼽자면 ‘사기꾼계’의 전문용어이다. ‘접시=사기’(접시는 사기로 만들어졌으니까), ‘영화배우=사기꾼’, ‘월급날=범죄 개시일’, ‘똥구멍=뒷거래’ 등 현장감 넘치는 단어들을 들을 수 있다. “내가 청진기 대면 진단 나와, 시추에이션 괜찮아”와 같은 대사들은 영화를 더 생동감있고, 현장감있게 만든다. 이 영화를 찍기 위해 2년 동안 현장을 돌며 시나리오를 써온 감독(최동훈)의 노고가 빛난다.
두 번째 즐거움은 생생한 배우들의 연기다. ‘약속’, ‘편지’ 등 최루성 멜로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박신양은 우려와 달리 자연스럽게 사기꾼 최창혁과 순박한 형 최창호 1인 2역을 소화해냈다. ‘장화홍련’에서 과장되고 냉정한 연기로 주목을 받은 염정아는 ‘투다이포’의 니콜 키드먼에 못지 않은 도발적인 춤 장면을 선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사기꾼계의 전설’이자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김선생 역의 백윤식이다. 연기경력 33년 만에 ‘지구를 지켜라’로 2003년 거의 모든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석권하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백윤식은 어떤 위기에도 침착하며 절대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투철한 직업윤리를 가진 이 인물을 매우 개성 넘치게 그려냈다. 이들 외에도 주·조연이 고루 조화를 이뤄 영화를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상식보다 탐욕이 크다”
“갱스터 영화가 도시의 불안을 먹고 자란 장르라면 사기극은 자본주의의 허영심이 키운 장르일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인공은 ‘돈’이다. 돈과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기꾼들은 돈의 유혹에 빠진 조연에 불과한 것이다. 김 선생의 정부인 서인경(염정아)은 김 선생과 최창혁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그 이유는 사랑이 아니고, 오로지 ‘내가 만질 수 있는 돈의 액수’ 때문이다. 돈 때문에 술집 마담을 꼬신 ‘제비’는 은행을 털어 큰돈을 만지자마자 여지없이 여자를 버린다. 그리고 가장 정직해야 할 사건수사 팀에도 이미 뇌물을 먹고 정보를 빼주는 형사가 있다. 수사반장(천호진)의 말대로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아침부터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면목이 없”다.
그래서일까? 내내 이런 저런 추리를 하게 만들며 한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와도 마치 사기를 당하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그건 이 땅에 살고 있는 누구나 사기꾼의 표적이 될 만큼의 탐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식보다 탐욕이 크다. 탐욕스런 사람, 세상을 모르는 사람, 세상을 너무 잘 아는 사람, 모두 우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