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노동사회

노동운동은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admin 0 3,261 2013.05.0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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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를 만나 노동운동에 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노동운동이 사회적 고립을 벗어나 정치세력화에 성공하는 것은 노동운동은 물론 한국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그는 말한다.

때: 2001.2.28(수)
곳: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대담: 윤효원 『노동사회』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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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_01_2.jpg1988년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라는 책을 내셨는데, 연구활동의 첫 작업으로 노동운동을 선택한 특별한 동기가 있는 지 궁금합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로 집필한 것입니다. 주제는 1970년대 한국의 국가·자본·노동 관계입니다. 박정희 암살로 초래된 유신체제의 해체와 종말은 한 시대의 마감이었고, 해외에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국가주도형 산업화모델, 즉 개발독재모델을 한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노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경제성장과 산업화로 많은 발전과 성과가 있었지만, 그 대가로 노동자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식 산업화의 어두운 측면을 보자는 문제의식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운동 선배세대 가운데 박사 논문을 쓸 당시 노동현장을 발로 뛰셨던 교수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논문을 쓰실 당시의 일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게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당시는 80년 8월 정화조치 직후였습니다. 여러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안기부와 경찰이 늘 감시하던 시절이라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중요한 노조가 있던 작업장에는 안기부 감시망이 있고, 회사 출입구에서 조합장 면회 신청을 하면 그 정보가 그대로 경찰에게 넘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김금수 선생이나 이원보 소장을 비롯해 천영세 씨, 김문수 씨, 김승호 씨, 장명국 씨도 만났고, 노총 산하 산별노조 본부를 많이 방문했습니다.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이 제대로 모여 있지 않아 연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산별노조 본부조차도 사업보고서가 비어있는 게 많았지요. 그 때 역삼동 자동차노련이 자료를 많이 보관하고 있어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지고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해 여러 수준에서 노동운동가들의 참여가 이뤄졌더라면 유능했던 분들이 중요한 위치에서 큰 역할을 하고 계실텐데, 그렇지 못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분들이 운동을 떠나는 것도 안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따로 흩어져 있는 모습도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분들이 열매를 맛보았으면 합니다. 무임승차자들(free riders)이 투쟁의 성과물을 가져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교수님의 연구 주제인 70년대 국가·자본·노동의 관계와 현재의 3자 관계를 비교할 때, 특징적인 변화는 무엇입니까.

제가 책에서 다룬 시기는 80년 5월 쿠데타와 8월 정화조치까지인데 그 뒤로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박정희 유신체제 붕괴이후 신군부의 권위주의가 등장했고, 87년 민주화가 이뤄져 민간정부가 출범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고, 지속된 경제발전과 산업화로 고도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국제관계에서도 탈냉전이 진행되었고, 97년 말 IMF 위기를 맞았습니다. 여러 수준에서 굉장한 변화가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국가·자본·노동 관계의 변화를 반성적으로 고찰할 때, 불행히도 권위주의 개발독재 시기의 그것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여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권위주의 시절의 억압적·강권적 측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던 법이 개정되는 등 노동운동을 규제했던 법·제도적 제약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는 첫째로 노동문제를 보는 국가의 인식이 권위주의 시절과 비교할 때 거의 변하지 않았고, 둘째로 시민사회가 노동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강하며, 다음으로 노동운동 주체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성장에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침해받는 기업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경제정책의 결정자들과 관리들 역시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을 민주적 정치체제의 사회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정책결정과정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인식 수준도 마찬가집니다. 여전히 노동이 정치세력화에 실패하고 있으며, 노동의 참여가 정치적 수준에서 막혀 있습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의 실정과 '국민의 정부'를 천명한 김대중 정부의 개혁부진으로 민주화운동세력,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냉소가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고 계십니까.

한국 민주주의는 외양적인 틀과 제도는 다 갖추었습니다. 이 측면에서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아요. 하지만, 민주주의의 작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큽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남에 따라 일반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현상입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 1순위는 낙후된 정당체제입니다. 운영과 구조에서 비민주적인 정당들이 지역경쟁구도 위에 걸터앉아 '정책 경쟁'이 아닌 '정권 쟁탈'에 사활을 거는 극한적 정치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정당체제가 사회경제적 이해와 갈등을 제대로 대변하는 구조로 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우리 현실입니다. 

"노동의 참여가 정치적 수준에서 막혀 있다"는 앞의 지적과 연결되는 말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정치개혁의 핵심은 노동운동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이 정치권에 진입하여 기존 정당체제의 틀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균열이 너무 크거나 깊으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듭니다. 사회경제적 갈등을 생사투쟁이 아닌 양보, 타협, 대화로 풀어갈 때 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균열구조를 완화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며, 그 중심에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반공냉전 논리가 사라져야 합니다. 물론 지금 남북 사이에 탈냉전이 가속화되면서 나아지고 있지만, 오랜 동안 분단구조가 유지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단히 경직되어 있습니다. 이게 완화되지 않고서는 민주적인 경쟁과 규칙이 자리잡기 어려워요. 

이런 제약이 가로막고 있어 한국의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구색은 갖추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경제적 위기에 부닥칠 때 민주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김영삼 정부의 특징을 "구체제와의 고도의 연속성, 특히 국가-자본간의 강력한 보수적 정치연합과 이를 뒷받침하는 성장 중심의 발전주의 이념의 지속"이라고 지적하신 교수님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집권 3년을 맞이한 김대중 정부 역시 구체제와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고, 노동을 배제한 경제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와 다른 점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집권 3년을 맞은 현정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노동의 입장에서는 김영삼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정부 역시 "국가·자본·중산층 연합"으로 보입니다만.

외양적으로 볼 때, 현정부가 국정운영에서 노동을 배제하는 정책을 쓴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다고 봅니다. 김영삼 정부까지는 권위주의의 연장선에서 기능했지만, 김대중 정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정부 성격 문제와 관련해서는 IMF 위기라는 엄청난 충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MF 위기는 97년 11월 김영삼 정부 말기에 초래되어 김대중 정부 탄생에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만, IMF관리체제로 인해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와 시장의 효율성이 경제운영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가 될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경영에서도 시장원리가 보편화되는 체제인데,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과 조건에서 IMF의 개혁 패키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경제정책의 방향이 국가개입에서 시장원리 중심으로 '격변적 전환'을 겪게 되고, 노동은 가장 큰 타격을 받고 희생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 집단이 국가정책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노동의 입장에서 볼 때, 현정부의 성격이 이전 정부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내용적으로 정부의 성격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여전히 국가로부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권위주의 국가 시절의 강권적 탄압에 저항하는 처지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점에서 현 상황은 노동운동에 심각한 제약이고 난관입니다. 

김대중 정부 역시 IMF 위기의 '피해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측면을 배제할 수 없지요. 사실 신자유주의 정책은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도입했지만, 전폭적·급진적(radical)으로 급격하고 과격하게 관철된 것은 IMF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입니다. 사실 김대중 정부는 가장 대중적이고 민중과 가까운 정권인데 불행하게도 국제관계에서의 충격 때문에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긴장관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이자 불행한 일입니다. 

현정부의 노동정책과 관련해서 관심을 끌었던 게 노사정위원회였고, 출범 초기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형해화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노사정 3자 관계의 바람직한 틀로 '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liberal corporatism)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협력체제의 제도화는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노사정위원회는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노동의 동의를 구하려 만든, 제도적 개선을 위한 고안물이라 할 수 있어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하는 문제들을 노동의 동의를 얻어 관철시켜 사회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물론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기능하는 한편, 노동이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만, 후자의 성격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정책참여기구가 발전했습니다. 이를 두고 코포라티즘이라 하지요. 한국과의 차이점은 유럽의 경우 이들 기구들이 복지정책을 주로 다뤘는데 반해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기구였다는 점입니다. 정부·사용자·노동의 대표들이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유럽의 코포라티즘과 비슷했지만, 노동자 대표가 노동조직 전체를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고, 노조 조직률이 대단히 낮으며, 노동자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계급적 참여'가 아닌 '대표만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이 힘을 얻기가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사정기구의 기능적 목적과 노동자 참여간의 조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전자의 성격, 즉 정부 정책의 관철만 시도되니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이 혁신과 전환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을 고집하면서 낡은 이념적 편향을 버리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변화에 뒤쳐져 뒷북만 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는 '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이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interview_02_2.jpg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게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부와 자본이 노동을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노동의 정책결정과정 참여를 인정하며, 노동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화하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의 힘 역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합니다. 

노동운동의 이념적 방향이 사회주의나 맑시즘과는 무관해야 한다는 내용의 교수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틀과 시장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까.

사회주의나 맑스주의는 더 이상 현실성을 갖는 대안이론이 아닙니다. 실재했던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때문에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이론적으로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에 집착하는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수 폐쇄적 지도자 그룹의 내부 토론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이것들은 분파주의를 강화하고,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그 대안이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아닌 '어떤 자본주의냐'(which capitalism)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가 나라마다 다르듯이, 자본주의도 각국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큰 차이가 납니다. 영국과 미국, 유럽, 아시아의 자본주의가 다릅니다. 

자본주의에는 크게 두 방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장만능주의입니다. 영미식의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는 유럽·일본형이 있습니다. 유럽형은 민주적 국가가 사회복지와 공평한 분배를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유형입니다. 일본형은 개인주의적 구조보다는 공동체적 사회구조에 입각한 자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그 어느 것과도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두 모델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우리에 걸맞은 경제체제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실현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노동운동 지도부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말씀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노동운동이 현실에 기반한 전략전술을 구사해야 하고, 나아가 계급적 연대의 폭을 넓히고 보다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저는 노동자의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동계급(working class)은 제조업 중심의 생산직 노동자를 말합니다만, 이것은 '정보화'와 '유연성'이라는 특징을 갖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협소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집착한다면 노동운동이 '일하는 사람'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식인이나 고기술자같은 중산층들도 노동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내부구성이 크게 변하고 있고, 그 외연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범위는 크게 넓어지고 있는데 반해, 이들을 사회·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세력은 정당을 포함해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노동운동이 혁신과 전환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일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저항과 반대 중심의 전략전술을 고집하면서 낡은 이념적 편향을 버리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사회변화에 뒤쳐져 뒷북만 치는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작년 총선에서 민주노총 주도로 결성된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와 창원 을구에서 선전한 바 있으며, 울산 북구의 경우 조직내분이 없었으면 당선도 가능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정당이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현행의 소선거구제로는 노동자정당이 정치권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 정당명부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당은 추상적이고 이념지향적인 정강을 너무 내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당의 이념이나 정강이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대안과 정책을 개발하고 도덕적 리더십을 갖추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물론 계급연합 정당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히 해 당의 외연을 확장해야 하고, 현실 정치에서 제도적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능숙하고 세련된 협상기술을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기존 정당과의 연합 전술도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는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해 기성 정당과 연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세력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시대적 요구와 관련하여 한국 노동운동의 현 주소는 그리 희망적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조직률 10% 안팎의 기업별·정규직·대기업 노동자에 기반한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기는커녕 정치와 사회 수준에서는 물론 작업장 수준에서도 노동자계급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고요.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너무 서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원점에서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노동자정당의 성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게 제대로 안되면 노동운동이 이익집단으로 전락해 소속 직장이나 소집단을 대변하는 운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익집단식의 노조운동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노동운동을 옹호하는 게 점차 힘들어지는 분위기예요. 노동운동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한국정치의 개혁 여부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성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본궤도에 오르는데 있어 노동운동의 책무는 막중합니다. 

돌이켜 볼 때,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민주화 국면과 90년대 말 IMF 위기가 그것입니다. 민주화로 기존 정당체제가 새로운 형태로 바뀔 가능성이 커지면서 지역당 구조로 변동되어 갔는데, 노동운동이 그 틈을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또한 IMF 위기는 모든 집단과 계층에 엄청난 충격을 끼치면서 한국 사회에 총제적 균열을 일으켰는데, 노동운동은 이것도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두 기회를 모두 놓쳐버린 지금 상황은 더 열악한 게 사실입니다. 노동운동이 과거처럼 특정 이념에 기댈 여지는 이제 거의 없어졌습니다. 창의력, 유연성, 현실성을 갖고서 활로를 개척해나가야 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