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노동조합의 싱크탱크 한스 베컬러 재단

노동사회

독일 노동조합의 싱크탱크 한스 베컬러 재단

admin 0 4,386 2013.05.12 05:19

새해 들어 민주노총이 정책연구원을 개소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노동운동의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민주노조진영의 정책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연구센터가 필요하다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들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하 노동조합은 매년 당면한 투쟁사업 때문에 연구센터의 설립일정을 늦추게 되었다. 더욱이 기본재정으로 사용되는 기금마련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이러한 지체현상은 수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늦었지만 올해에 비로소 민주노총의 싱크탱크로서 정책연구원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반가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제대로 된 정책연구원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기에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이 있겠지만, 민주노총이 노동운동의 현재적 과제와 노동조합의 미래전망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고민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이 글은 독일노총과 산하 산별노조들의 싱크탱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한스 베컬러 재단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먼저 전후 독일노동조합운동의 연구정책사업을 선구적으로 이끌어온 한스 베컬러 재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한스 베컬러 재단의 조직과 활동

한스 베컬러 재단(Hans Boeckler Stiftung)은 독일노총의 지원기관(Foerderungswerk)이면서 비영리목적의 공익재단(Stiftung)이다. 이 재단은 독일노총 1대 위원장이었던 한스 베컬러의 뜻을 기리고 노동조합의 중장기적 과제에 내용적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현재의 한스 베컬러 재단은 1976년 공동결정법(Mitbestimmungsgesetz)이 연방의회에서 통과되고 난 후, 각 기업의 경영감독회(Aufsichtrat)에 참가하는 노동자대표들의 실무역량을 지원하고 노동조합의 연구정책역량을 보다 더 충실화하기 위해서 1977년 한스 베컬러 협회(Hans Boeckler Gesellschaft)와 공동결정 재단(Stiftung Mitbestimmung)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5년 독일노총 산하에 있던 경제사회과학연구소(WSI)가 연구부서로 통합되었다.

한스 베컬러 재단의 규약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비영리사업으로 한정하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기여하는 목적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재단은 공동결정제도의 발전과 확산, 연구사업 및 정책역량에 대한 지원 그리고 장학사업을 통한 진보적 연구자의 발굴을 주요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활동영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동결정제도에 참가하는 이들을 교육하고 조언함으로써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보다 발전시키려고 한다. 한스 베컬러 재단은 독일사회에서 공동결정이란 노동자가 다른 이해집단과 함께 노동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가능성과 권리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재단은 공동결정제도가 기업 및 행정관청에서 제대로 실현되는데 필요한 모든 서비스(법률상담, 훈련 및 교육, 조언 등)를 실무적인 차원에서 제공한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공동결정지원부서’에서 담당하고 이 부서는 다시 기술, 숙련, 인사 및 복지, 노동 및 환경보호 등의 4실로 나뉘어져 있다. 

*************************************************************************************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
독일 노동법에서 경영조직법(Betriebsverfassungsgesetz) 상의 공동결정 및 경영참가 제도는 단체협약법의 협약 자율과 함께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사업장과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들의 공동결정은 독일 사회질서의 중요한 근간이다. 

경영감독회 내에서의 공동결정은 기업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경영감독회는 기업과 관련된 모든 사항에 대해 광범위하게 정보를 요구하며, 기업은 대형 투자나 합리화조치 같은 중요한 결정할 경우 경영감독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경영감독회는 기업이사진의 구성원을 지정하며, 다시 해임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노동법상의 제도를 넘어서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공동결정제도는 사업장 단위에서 근로조건의 결정뿐만 아니라 남녀평등 실현, 실업문제 해결, 소비자보호 및 환경보호 등 활동의 영역이 매우 넓다.
*************************************************************************************


둘째, 재단은 연구사업을 지원하거나 정책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노동세계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연구지원부서’가 이러한 활동을 담당하고 외부연구자와 연구기관을 섭외하거나 그들이 연구프로젝트를 직접 조직하기도 한다. 2002년 현재 재단이 지원하고자 하는 연구주제는 크게 ‘노동사회의 전망’, ‘구조변동 - 혁신과 고용’, ‘전환기에 선 공동결정제도 - 노동에서의 연대성’, ‘공공부문의 현대화’, ‘사회복지국가의 미래’로 나누어져 있다. 위의 주제와 관련된 연구계획서를 재단이 선임하는 전문가그룹에서 평가하고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한다. 연구결과는 일반적으로 공개적인 토론을 거치고 난 후 출간된다. 

이러한 연구지원부서와는 조직적으로 독립적이지만, 운영상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경제사회과학연구소(WSI)’가 재단 산하에 존재한다. 이 연구소는 주로 노동자 친화적인 관점에서 경제, 노동시장, 구조정책에서부터 사회, 임단협 그리고 공동결정정책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이론적 연구는 물론, 노동자의 실천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사회의 발전과 정치권의 의사결정이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자적 대안마련이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중점연구는 ‘지구화과정에서 경제변동과 고용’, ‘사회양극화, 집단적 보장 그리고 개인주의화’ 그리고 ‘노사관계와 임단협정책’이다. 첫 번째 연구영역은 다시 ‘완전고용정책의 기초’, ‘지구화의 정치경제학’, ‘지구화된 경제에서 조절영역’이라는 핵심과제로 나누어진다. 두 번째 연구영역은 ‘고용관계의 다원화’, ‘사회보장의 미래’, ‘시간정책’으로 구성된다. 세 번째 연구영역은 ‘기업구조조정’, ‘노사관계와 노조의 조직화’, ‘임단협 체계의 미래’ 그리고 ‘노사관계의 유럽화’라는 중점과제로 나누어져 있다. 한편 이 연구소는 부설기관으로 ‘협약보관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지금까지 체결된 모든 임단협과 기업협정들을 녹취하고 이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에 기초하여 매년 『WSI-협약교본』을 발행하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장학제도와 안정적 재정운영

셋째, 대학생의 학업과 박사과정의 논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재원은 모두 연방교육부가 지원하고 재단은 장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권리를 정부로부터 위임받는다. 2002년 현재 석사과정 1,300명, 박사과정 300명이 이러한 혜택을 보고 있다. 한스 베컬러 재단의 장학생 선정기준은 일차적으로 모든 학문분야를 막론하고 해당 학생이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물론 학업수행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 책임감이 어느 정도인가도 중요한 판단근거가 된다. 

특히 이러한 장학제도의 혜택 중 일정한 부분은 대학교육을 받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도록 정해놓고 있다. 이는 사회적 장벽에 의해서 제약되고 있는 교육기회를 노동자들에게 보다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재단의 장학사업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한편 약 250명의 대학교수들이 ‘재단신임교수’로서 장학생을 추천하거나 선발과정에 참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많은 경우 학문, 노동세계, 그리고 노동조합을 연결하는 다양한 연구프로젝트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한스 베컬러 재단은 안정적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재단의 기본재정은 크게 세 가지로 충당된다. 첫째, 공동결정법이 적용되는 모든 기업 및 관공서의 경영감독회에 참석하는 노동자대표들이 받게되는 사례금(Tantiemen)이 재단에 기부된다. 경영감독회에 참석하는 노동자대표들은 노조간부거나 해당 기업의 사업장평의회 위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의 경영감독회 위원직은 겸직에 해당하는 것이고, 본직에 상응하는 월급을 실제로 받고 있다. 그래서 1979년 3월7일 독일노총 연방위원회는 경영감독회의 노동자대표의 사례금 전부, 그리고 노동이사의 월급과 노조가 운영하는 기업의 경영진 수입의 일부를 한스 베컬러 재단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러한 기부금은 2002년 현재 2천4백만 8천 유로에 상당하고, 전체 재단 예산 3천8백만 7천 유로의 64%에 해당한다. 이 돈은 연구사업의 지원, 경제사회과학연구소 운영 및 공동결정제도의 실무지원 및 노동자교육에 주로 사용된다. 

둘째, 매년 약 1천만 유로정도를 연방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학업지원과 논문지원과 같은 장학사업에 드는 재원은 100% 연방교육부의 돈으로 충당되지만, 장학생의 선발권은 재단의 독자적인 권한에 속한다. 

셋째, 그 외에 재단재산의 수익이나 독일노총과 각 산별노조가 매년 일정하게 내는 적립금 등이 재원으로 활용된다. 한편 한스 베컬러 재단의 운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비영리공익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공동결정제도의 기본정신이 이 재단에도 잘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재단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쿠라토리움은 물론, 재단의 실제적인 운영주체인 이사회에 독일노총, 산하 노조들, 기부자, 그리고 재단신임교수와 장학생의 대표자들이 참가하고 있고, 중요한 사안들을 공동으로 의사결정하고 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게 주는 시사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스 베컬러 재단은 독일노총의 지원기관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노동사회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마련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연구정책역량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독일사회의 발전모색과 미래지향적인 대안마련에 함께 하고자 하는 노동자 친화적인 예비연구자들의 양성기관으로서 공익재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수많은 학계인사와 연구자들이 대학시절부터 이 재단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 이론적 연구와 실천적 고민의 간극을 좁혀나가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한편 한스 베컬러 재단에 근무하는 현재 약 50여명에 이르는 박사급 전문가들이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활동에서부터 노동운동의 전략적인 대안마련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서 실천단위와의 협력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하거나 이를 직접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막 정책연구원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본격화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정책역량강화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독일 한스 베컬러 재단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기적으로 노동조합의 정책기획단위와의 공조 하에 연구정책능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하고, 이에 기반하여 노동친화적인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미약하나마 이미 어느 정도의 경험과 역량을 지닌 전문가그룹과 연구단위들이 민주노조진영에 존재한다. 문제는 이들간의 내용적 교류와 논의의 공식화를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부재하다는데 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은 정파적 지향과 조직적 관성에 기울어 가는 기존 노동연구그룹간 의사소통의 길을 열어주고, 그 수가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청년연구자들을 실천영역과 결합시켜줌으로써 진보적 연구역량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둘째, 정부에 의한 자금지원에 의존하기보다는 재정자립을 위한 산하 노동조합의 십시일반이 필요하다. 특히 노동조합의 연구정책역량과 관련된 사업은 가능한 한 독립적인 재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즉 정책연구원 사업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액수의 기금이 필수불가결하다. 이러한 기금조성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일정한 액수 이상의 노조적립금을 확보하고 있는 산하 노조를 중심으로 그 1%를 정책연구원기금에 기부하고, 이에 상응하여 해당 노조가 정책프로젝트를 발주할 때 혜택을 주는 방식을 잠정적으로 고려해볼 만 하다. 

셋째, 장기적으로 민주노총에서 정책연구원 외에 각 노동단체와 진보정치조직, 진보적 연구그룹 및 추모사업회 등을 네트워킹할 수 있는 공익재단을 추진해야 한다. 독일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한스 베컬러 협회가 공익재단으로, 더 나아가 노총 산하의 경제사회과학연구소가 한스 베컬러 재단으로 통합된 이유는 바로 노동조합의 연구정책역량을 단지 노동문제에만 한정하지 않고, 독일사회의 공론장에서 노동자의 관점과 대안을 일반대중들에게 제안하고 설득해야 할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노동조합은 기존의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기층 민중들과 적극적인 연대전략을 통해서 우리사회를 노동친화적인 사회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바로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가 서민전체, 더 나아가 공공의 이해와 요구로 각인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늦기 전에 머리에 투자를 하자

이러한 시사점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발전가능성은 노동조합운동의 구조환경적 조건보다는 산하 각 연맹 및 노조, 그리고 조합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주체적 혁신노력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판단된다. 조직력으로 표현되는 파업투쟁만이 모든 걸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는 이들에게 노동조합의 연구역량은 부차적인 문제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조합원 부조금과 노조 창립기념일 선물비보다 훨씬 적은 프로젝트지원비의 결정조차 대의원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우리노동조합운동의 현 상태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용자의 탄압, 정부의 무성의라는 외적 조건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이미 청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청년의 활력은 냉철한 이성과 만날 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늦기 전에 머리에 투자를 하자.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