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1일부터 2월23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글로벌 네트워크 아태지역 세미나와 국제노동자교육협회 회의에 참석하였다.
방콕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밤 8시를 막 넘긴 시간,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자마자 후텁지근한 태국의 밤 열기가 나를 맞았다. 최대한 얇은 겨울옷을 입고 왔지만 20도는 넘음직한 기온에 에어컨을 튼 택시 안에서조차 땀이 비오듯 흘렀다. 공항에는 지난번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 태국민주노조연맹 소속 몽콜 씨가 일부러 마중을 나와 주었다.
다음날 9시부터 시작된 세미나 일정은 대단히 빡빡했다. 첫날 시작된 세미나는 글로벌 네트워크(Global Network)의 지역 세미나였다. 아시아 각국에서 참석한 지역 대표들과 태국 노조 대표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악영향에 대한 비디오 상영을 시작으로 세미나는 시작되었다.
협의체에서 행동하는 네트워크로
‘글로벌 네트워크’(Global Network)는 브뤼셀에 있는 솔리다르(SOLIDAR)와 국제노동자교육협회(IFWEA)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 코디네이터들의 발의로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아태지역의 경우 홍콩, 한국을 비롯해 7개국의 노동단체(NGO)들이 참여하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노동조합과 노동단체가 함께 세미나와 스터디서클을 통해 조직화 캠페인을 벌이거나 세계화와 관련된 사회경제적 상황, 노동권 향상을 위해 전략을 논의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번에 개최된 제3차 지역회의에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국제노동자교육협회가 칸쿤에서 열린 제5차 WTO 각료회담의 결과와 여파에 대하여 지역차원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토론하는 한편 세계화에 대한 노동자 교육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노동조합과 노동단체(NGO)와의 협력을 어떻게 강화할지에 대한 미래 계획을 논의하였다.
칸쿤 회담에 대한 설명과 평가,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보고와 평가,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세계적인 이슈와 지역차원의 이슈를 어떻게 결합하여 활동할 것인지도 화두로 떠올랐다. 특히 글로벌 네트워크의 역할이 단순히 문서를 만들어내는 협의체 조직이 아니라 실제 행동하는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한편 발제 이후에 질문자로 나선 태국 여성 노동자는 발언을 통해 20년전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며 도대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간절한 호소로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오후까지 이어진 토론에서 글로벌 네트워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첫째 교육을 조직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다른 그룹에서 성공한 사례의 경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정부에 탄압에 맞서 대항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넷째 노동권을 강화하는데 더욱 앞장서야 한다. 다섯째, 노동운동의 정치력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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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리다르
유럽을 활동무대로 사회적, 경제 정의를 추구하는 국제 비정부 기구인 솔리다르(SOLIDAR)는 1951년 독일에서 ‘International Workers Aid’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1995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브뤼셀로 이전하여 1996년 국제비영리협회로 등록하였다. 회원은 EU국가들을 중심으로 25명 정회원과 7개의 가맹조직이 있으며, 국제자유노련(ICFTU)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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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만난 전태일
오후 그룹토론을 마치고 호텔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태국노동박물관(Thai Labor Museum)을 방문했다. 자동차가 정신없이 달리는 큰 길 옆에 위치한 노동박물관은 철도연맹의 부지에 에버트재단의 후원으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정면에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는 노동자의 동상이 서있는 박물관의 내부는 몇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널찍하고 잘 꾸며져 있었다. 우리나라 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농경시대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궁색하지만 작은 화면의 비디오가 각 방마다 설치되어 안내 역할을 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의 참상을 담은 모형관, 트럭 노동자들의 모습, 특히 70년대 복싱 선수들의 사진과 소품이 눈길을 끌었다. 돈을 벌기 위해 복싱을 했으므로 그들도 당연히 노동자라는 설명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 졌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다음 전시실부터 이어졌다. 1992년 “피의 5월 사건”이라고 쓰여진 글씨 아래에는 착검한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에 의해 웃옷이 모두 벗겨진 채 꿇어 엎드려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커다란 사진 아래에는 당시 사라진 노조 지도자의 하얀 석고상이 놓여 있었다. 안내자는 아직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다른 방으로 발길을 옮기자 보통 가게에서도 볼 수 있는 인형들이 놓여 있는 방에 불타다만 플라스틱 박스들과 여러 장의 사진들이 겹쳐 있었다. 바로 십여년전 태국의 인형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공장의 모형과 타다만 자재, 그리고 인형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 다음 전시실에서는 귀에 익은 노동가가 들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디오에는 한국 노동자들의 거리 행진 모습과 홍콩, 대만, 태국 노동자들의 집회와 행진 모습이 나왔다.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얼굴상과 더불어 각국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 그리고 태국 인형 공장의 화재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울부짖는 유가족들, 손을 하늘로 치켜든 채 흰 천에 감겨 있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주검이 생생하게 비디오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아픔을 달래는 진혼의 노래가 자막과 함께 흘러나왔다. 마침 그곳에서 나를 안내하던 여성은 자신이 그 여성그룹의 멥버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는데 어느새 비디오를 보면서 그도 나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동자는 왜 하나여야 하는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박제된 박물관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교육장인 셈이다.
한국의 지원으로 설립될 센터
박물관에 취해 있는 사이 박물관 내부에 마련된 회의실에서는 국제노동자교육협회 아태지역 회의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국제노동자교육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Workers' Education Association)는 1947년 창설되었으며, 노동자 교육에 관련된 각국 노동조합, 국제산별연맹, 노동자교육협회, 비정부기구(NGOs)들이 함께 모인 국제조직이다. IFWEA는 97년 가입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KLSI)를 비롯하여 53개국에 1백여개의 회원 조직을 갖고 있다. 아태지역은 유럽 다음으로 규모가 큰 편인데 16개 국가, 26개 조직을 포괄하고 있다. 2001년 필리핀, 2002년 방글라데시 다카, 2003년 홍콩에서 회의가 개최된바 있다.
회의는 지난해의 활동보고, 새롭게 가입을 원하는 조직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각국의 활동보고가 이어졌다. 태국의 노동정보서비스교육센터(CLIST)는 한국 노동운동가들의 재정 지원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훈련센터를 건립 중에 있는데 3월말 완공될 예정이라고 설명하면서 거듭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모두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다음 회의는 그곳에서 열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트렁크 잠자리에서 피어나는 노동운동
다음날은 노동정보서비스교육센터(CLIST)를 비롯한 민주노동동맹이 주최하는 세계무역기구가 타이 노동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동향이라는 국내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태국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공공부문 민영화의 심각성, 섬유?호텔부문에서 외국인투자 문제를 집중 거론하였다. 발제자는 태국은 1백년 전에 영국과 매우 불평등한 협약을 맺었는데, 세계무역기구와는 더 불평등한 협약을 맺고 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물론 세미나는 태국어로 진행되었고 잠깐씩 요약하여 전해주는 영어 통역으로는 어슴푸레하게 내용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세미나장에서 놀란 것은 참가자들의 진지함이었다. 15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준비된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세 시간 넘게 세미나가 지속되었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마디라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듣는 모습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주최측에 참가자들이 대부분 학생들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모두 노조활동가들이라는 대답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일부러 일요일을 선택하였던 것이고 호텔도 가장 저렴한 곳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세미나 이후에 진행된 일정도 잘 짜여져 있었다. 지난 1년 동안의 투쟁 사진들을 빔프로젝트로 시연하면서 당시 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소감을 듣는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동지적 연대를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색할수록 재미있는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촌극 연출은 웃음을 자아낸다. 모범 사업장에 대한 시상식,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태국어로 개사하여 율동을 하는 모습 속에서 태국 노동운동가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에 거는 기대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태국 노동운동은 9개의 노총으로 분열되어 있고 정권과 자본에 비해 노동조합은 너무 열악하고 척박한 실정이다. 그러나 승용차 트렁크를 개조하여 잠자리로 삼아 전국을 누비는 활동가의 성실함, 어려운 재정에도 교육훈련센터를 먼저 세우는 단호함, 혼을 담은 노동박물관을 자랑할 줄 아는 운동가들이 있는 한 태국 노동운동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참고 홈페이지
http://www.solidar.org/
http://www.globalnetwork-asia.org
http://www.ifw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