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사회운동성 회복해야

노동사회

노동운동, 사회운동성 회복해야

admin 0 3,508 2013.05.07 06:36

민주노총이 지난 1년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내놓은 '사회변혁적 조합주의' 발전전략은 노조가 내놓은 최초의 종합적 청사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노동운동을 사회개혁투쟁 차원에서 전개하려 한 점 역시도 시점에서 정당하고 필요한 문제제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개 노동조합이 이러한 '강령' 수준의 발전방안을 실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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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률 10%의 노동조합운동이 1300만 노동자를 계급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가? 사진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공동집회 장면  ▷ 매일노동뉴스 ]

구체적인 논의가 생략된 민주노총 발전전략 

지금까지 한국에서 사회운동 이론 혹은 노선은 실제 활동과 언제나 괴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말하자면 운동 구호는 대체로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지향을 갖고 있었지만 실천은 자유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다. 민주노총의 발전방안이 제기한 '사회화'를 지향하는 이념은 한국의 노조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높은 미래상을 설정해 놓고 있다. 만약 실행할 수 없거나 구체적인 정책과 연결되지 않은 이념이 제시될 경우 필연적으로 내부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구성원들이 결합된 노조를 마치 정당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낳은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조가 이념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최고 강령이 너무 분명해서 최소단위의 연대나 투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운동의 노선과 이념은 투쟁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어야지 주어진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기아사태나 대우사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혹은 그 과정에서 노조의 가용한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등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서 현재의 정책 노선을 설정하고, 그것과 장기적인 목표와의 연관성 혹은 괴리를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번 민주노총의 발전안은 많은 중간 논의가 생략된 채 결론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발전 안이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한국 정치사회의 특성과 노동운동의 위상에 대한 논의를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한국의 사회운동이나 사회과학이 그러했듯이 이 발전안 역시 서구 사회과학의 이론들을 건조하게 그냥 이식해 놓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한편 이 안은 그간의 노동운동을 정리·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 역사가 없는 발전안은 철학적 논의나 아이디어 모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려는 민주노총의 안이라면 당연히 한국사회의 현재 조건과 개혁방안,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한 입장과 시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점이 생략된 것이 이 발전 안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 안이 연구자들과 공동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노동운동권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나름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사정에 맞는 대안을 만들어야

브라질과 더불어 한국은 2차대전 후 산업화된 후발자본주의 중에서 산업노동자의 인구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노동운동이 20세기 후반 후발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운동 특징과 미래를 집약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한국 사례는 유럽의 과거가 아니라 유럽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산업화를 겪은 나라들의 미래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한국은 동시대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더욱 직접 노출되어 있으므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나 후발자본주의 국가 모두가 처한 현실을 나름대로 공유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노동운동은 이러한 두 가지 큰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21세기 노동운동의 미래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를 던져줄 수 있는 사례이자 운동노선 혹은 이론의 실험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의 운동가나 사회과학자들은 우리 문제를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19세기의 유럽, 20세기의 러시아나 유럽, 20세기 중반의 유럽 미국 일본의 사례와 그러한 경험들을 반영하는 이론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기웃거렸다. 물론 뒤늦은 자본주의화를 겪은 나라서도 앞선 경험을 한 나라들의 사례가 타산지석이 된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학과 기업경영 이론 등이 그러하듯이 노동관련 이론이나 노선 역시 특수에 매개되지 않는 보편주의에 사로잡혀서 우리 노동자의 처지와 조건, 노동자 의식을 고려하여 그에 바탕을 둔 이론과 노선을 아직 개발하지 못하였으며, 우리보다 뒤늦은 나라에게 가르쳐줄 내용을 더더욱 갖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제력이나 노동자 처지에서는 한국 노동자들이 동시대의 다른 후발국가보다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론이나 노선에 관한 한 100% 수입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노동운동이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있는 세계적인 국면 속에서 무슨 뾰족한 이론이나 대안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이 무슨 특별한 노선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인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운동이 자본의 세계적 가치실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강력한 노동운동만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담보이며, 사회적 형평성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이 처한 정치·경제·문화적 현실 조건 속에서 어떠한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 없고, 그것을 둘러싼 논쟁도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가족이기주의를 대변하는 기업별노조체제

필자는 한국 노동운동이 일차적으로는 기업별 노동운동의 청산과 노동자의 정치사회세력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 입지가 점점 더 축소될 것이라는 점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한국 노동운동은 87년 대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의 건설, 그리고 지노협 및 전노협과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한국 노동운동이 60년대 이후 산업화된 국가의 노동운동 중 그 선두에 서서 놀라운 조직력과 전투성을 보여준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대략 90년 무렵에 일단락되었다. 그 시점을 계기로 하여 사용자·정부·국내의 정치역학, 한국경제와 세계경제 상황은 급격히 변하였다. 

그런데 한국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행태, 즉 '전투적 경제주의'는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90년대는 단위노조 차원의 단체교섭을 특징으로 하는 탈정치적 기업별 노조의 착근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동자의 투쟁 성과는 모두 단위노조에게만 축적되었고, 일부만이 전노협과 민주노총으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향상, 노동자 내부에서의 분절화 심화, 정치세력화의 실패로 집약되는데 거시적으로 보면 노동자들이 점차 한국자본주의의 틀 내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이유는 90년대 이후의 급격한 상황변화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87년 이전에 이미 정착된 자본주의 한국사회의 이익대표 구조, 혹은 노동이 정치·경제·사회 내에서 처한 위치에 의한 것이다. 즉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은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일환이며, 자본의 생산은 세계 자본주의와 일국의 정치체제, 그리고 사회문화체제와 결합되어 있다. 즉 현상적으로 보면 노동은 경제의 일부분이자, 사회정치적 문제인데, 노동조합이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노동 혹은 노동운동이 처한 위치는 거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의 분단이라는 상황은 단순히 정치적 조건만이 아니라 자본의 폭력적 지배, 가족·개인복지·체제, 즉 노동자의 강압적인 개인화와 사회적 분리의 체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는 봉쇄되어 있는 한편, 교육을 통한 개인적 상승의 길, 가족과 연고를 통한 시장 완충기제는 격려되고 강화되었다. 기업별 노조라는 것은 바로 '강제된 노사협조주의', '강제된 국가충성주의', 및 '허용된 경제주의', '가족주의 이익표출체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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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대적인 노사관계'는 '계급투쟁'으로만 볼 수 없으며, 크게 보아 노동이 배제된 정치경제질서에서 노동자들이 반사적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사진은 철도민영화 문제를 논의중인 노사정위원회  ▷ 매일노동뉴스 ]

적대적인 노사관계=투쟁성?

우리는 정신과 사상에서 완전한 복종상태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이 87년 직후 이러한 '한국식 이익표출체제'에 대한 인식에 쉽게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한계는 상당한 투쟁 경험과 국가/자본과의 접촉 경험이 축적되었던 90년대 초 정도가 되면 이미 충분히 자각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 노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한국식 자본축적/지배/이익표출체제가 갖는 성격을 직시하고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기보다는 '방어적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운동이론가들은 방어과정의 투쟁성을 계급투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장 특히 대규모 사업장의 '적대적인 노사관계'는 '계급투쟁'으로만 볼 수 없으며, 크게 보아 노동이 배제된 정치경제질서에서 노동자들이 반사적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개별 전투는 치열했고 때로 노동자들이 승리하기도 했으나 자본/노동의 역학에서 노동세력 일반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정치 국면에서 노동세력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렀다. 97년 총파업이 약간의 진전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그 성과가 결집되는 과정을 보면 87년에 만들어진 노자관계의 정치·경제·사회적 틀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질수록 개별 노동조합 혹은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기적 이익 혹은 경제적 보상밖에 없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운동은 점차 연대를 포기한 대가로 물질적 보상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한번 길들여진 운동 관성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그 쪽으로 몰고 갔다. 그리하여 힘있는 대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의 경우 언제나 투쟁 구호는 요란하였으나 결과는 조합원들의 임금과 복지 향상으로만 축적되었으며, 결국 한국 노동운동은 점차 '노동조합운동'으로 왜소화되기 시작하였다. 대규모 사업장 개별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는 크게 향상되었으나 그것은 다수의 주변 노동자와 해고된 동료들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큰 틀에서 보면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자본의 운동 체제에 흡수되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고려해야 

결국 필자는 한국 노동운동이 90년대 초반이후 '전투적 경제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사회운동적 조합주의' 기조로 변화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은 반드시 신자유주의 조건이 강요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 노동자들의 생산과 재생산의 틀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미 출발부터 고도로 사회화되어 있었다. 즉 한국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의 물질적 보상과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가 고용되어 있는 기업의 양보능력보다는 한국경제 일반, 자본가 일반의 양보능력에 결정적으로 좌우되었으며, 노동자들이 자신을 집단적 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정치상황에 강력하게 규정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을 동료 혹은 이웃의 비노동자층에게 호소하여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국 사회의 문제해결방식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일제 시대 노동운동이 민족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행동하고, 국가주도의 성장을 겪는 후발국의 다수 노동자들이 언제나 국가와 자본에 대한 협조적 경향을 견지한 것은 그들이 민족과 국가에 기만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재생산이 민족과 국가 단위로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세계화는 민족과 국가간의 대립, 인종과 지역간의 차별, 성적인 억압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자본은 이러한 분열의 공간을 통해서 자기 실현을 하게 된다. 따라서 순수자본주의의 이념형 혹은 대단히 큰 경제규모를 갖는 세계 자본주의 종주국이 아닌 경우 노동운동은 조합원의 이익추구 운동, 혹은 노동자계급운동으로서 입지를 갖기가 어렵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노동운동이 표방했던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은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발국가의 자본-노동관계는 세계자본주의의 질서 속에 훨씬 깊게 편입되어 있고 국가가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민족·국가·시민사회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과 재생산의 조건, 투쟁과 조직화의 기회와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좌우한 조건변수였다. 남아공 노동운동이 민족민주혁명론(NDR)에 기초해 있는 것이나, 브라질의 노동운동이 지역운동 및 공동체 운동과 결합되어 있는 이유도 이러한 조건에 기인하고 있다. 

'사회운동적 조합주의' 

그런데 90년대 세계화 국면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을 사회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경제가 모든 사회영역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이제 노동자의 재생산은 주거·교육·소비 영역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오늘의 노동자란 바로 작업장에서 집합적 노동을 수행하는 일군의 집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서비스 산업이나 용역회사에 개별적으로 고용계약을 맺고 있으면서 자기 삶의 조건을 개별화된 것으로 인식하는 대다수의 노동층을 지칭한다. 이들 광범위한 노동층의 노동조건은 개별 기업가, 혹은 기업가 집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금융자본,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탈규제와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입법화를 추진하는 정책에 의해 더 좌우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더 확실하게 사회화되었으며, 노동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질서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조합의 중앙집중성 약화, 노동자의 개인주의화, 연대 기반의 약화는 노동운동의 종말이 아니라 그간의 세계자본주의의 기둥이었던 '노자협조체제'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노동이 사회화되었다는 것은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의 조건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노동자가 절대로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계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의 형태인 민족과 인종의 균열과 갈등, 소비자본주의의 논리와 정면대결하지 않고서는 생산과정에서의 틈 확보와 노동중독에서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노동자와 그 가족을 개별 경쟁 단위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교육체제와 정면대결하지 않고서는 그는 점점 더 돈을 많이 벌어서 자녀들의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방편으로 자발적인 '임금노예'를 선택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맥락에서 본다면,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를 극복하고 남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전망을 갖지 않고서는 다수 노동자를 죽음과 빈곤으로 몰아가는 '전쟁' 자본주의와 그것이 낳은 저복지/노동억압/시장만능주의를 극복할 길을 찾기 어렵고, 87년 민주화 이후 지배세력의 새로운 지배방식인 지역주의를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노동문제가 정치적 의제로 올라서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조합, '사회적 조직'으로 거듭나야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고 말하면 시민운동과의 연대, 혹은 노동운동을 시민운동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의 상은 오히려 오히려 그것이 비정규직·여성·벤처기업을 포함한 다양한 노동자층을 조직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현재 시민운동이 자기 과제로 하고 있는 운동들을 노동운동의 것으로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건설일용직 노동자 조직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한다면 반드시 앞에서 필자가 제기한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의 이중적 사회화 측면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과거처럼 탄압이 두려워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그들에게 해줄 게 없기 때문에 가입하지 않는다. 왜 노동조합이 해줄 게 없는가? 그것은 노동조합이 고용·복지·건강·상호부조의 지렛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노동조합은 바로 이익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조직으로서 거듭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익집단으로서 노조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에 대한 정의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불투명하고 극히 경쟁적인 사회 환경이 불변한 상태로 가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당장의 임금과 고용조건 향상을 이익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것에 매진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나의 이익이 다른 노동자의 이익과 충돌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에 대안을 갖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 일반과 사회 일반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 노동문제는 오직 파업투쟁이 발생했을 때만 부상한다. 그 이유는 노동세력이 자기 문제를 사회 문제로 전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개별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80년대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고립되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실 노동자 자신들의 지지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의 현실을 개인과 가족, 그리고 회사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혁명/개량의 낡은 이분법, 기업단위의 고립된 저항을 계급투쟁이라고 과대평가하는 시각과 결별해야 하고 노조를 사회조직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경제·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노조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개입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