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정파·민주주의

노동사회

선거·정파·민주주의

admin 0 2,892 2013.05.12 03:45

2003년이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2003년에는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공권력 투입 자제,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 새로운 노사관계 개혁을 주창하고 나서면서 노동계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철도파업 이후 법과 원칙을 강조하고 대규모 노동자 구속으로 이어지면서 노동계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노동부 주도로 노사관계 로드맵이 발표되었지만 노사관계의 당사자인 노사단체 모두 반발함으로써 논의는 올해로 연기되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업종별 협의체제를 제안하였으나 이는 경총의 반대에 맞닥뜨려 있으며, 여전히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한 상태에 있다. 결국 지난 한해 동안의 노사관계 역시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다고 하겠다. 

시련의 시기에 다가온 민주노총 선거

지금 노사관계에 관련된 당사자들 간에 가장 큰 관심과 화두는 현재 진행되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다. 산하에 주요 대기업이 포진되어 있는 데다가 한해 파업건수의 대부분과 구속 노동자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사령탑이 누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단지 주체의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노사관계 전체 지평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바깥에서는 주로 선거결과가 노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자신들에게 어떤 이해득실이 있을지를 따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유권자인 민주노총 대의원들의 관심은 누가 민주노총의 사령탑이 되어야 민주노총을 제대로 이끌어갈 것인가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안팎으로 많은 시련에 처해있다. 전체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대에 머물러 있으며, 비정규직·여성 등이 노동조합에 거의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 매년 총파업을 선언하지만 위력적인 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자본과 정권의 면역성만 키워주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광풍 속에 전투적 투쟁만으로 조합원들의 권익을 지키기에는 한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당하고 보수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상황에서도 폭넓은 사회적 연대로 돌파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의 기치가 내세워진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성과는 그리 크지 못하다. 대의원들을 포함한 조합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지도부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의원들이 두 눈을 바로 뜨고 각 후보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들이 제출한 민주노총 활동에 대한 평가, 민주노총 운동의 방향에 대한 후보들의 공약, 후보들의 경력과 신뢰도 등을 총체적으로 평가하여 올바른 한 표를 행사하여야 한다. 이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권한이다. 결국 누가 당선되든지 이는 후보들이 제출한 공약과 후보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여 대의원들이 지지한 결과일 따름이다. 

정파구도를 극복하는 대안 제시돼야

이번 선거에서는 전노협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하며 민주노총을 상징적으로 대변했던 단병호 현 위원장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를 누군가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저항적 투쟁의 시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으로, 유덕상 후보조가 중앙파와 현장파로 불리는 범좌파 그룹의 선거연합 후보로, 이수호 후보조는 전국회의와 노동운동전략연구회 선거연합 후보조로 출마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동안 공식·비공식 정파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위원장까지 포함해서 1명을 제외한 모든 후보가 각 정파의 후보로서 출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이번 선거를 통해 민주노총은 카리스마나 개인적 지도력의 시대가 마감되고 정파적 지도력의 시대로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공장노조 내에는 다수의 현장조직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들은 주요한 노선과 방침이 차이가 있어서 갈라져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의 행태에서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다. 자신의 조직이 집권할 때, 잘못된 것은 다른 정파가 발목을 잡아서 그런 것이고, 잘된 것은 모두 자기 조직의 지도력 때문이다. 자신의 조직이 집권하지 못했을 때는 집행부의 방침을 거부하다가 자신이 집권하면 똑같은 방침을 내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자신이 다른 조직과 선거연합을 하면 노선에 따른 연합이고 다른 조직이 하면 이는 원칙을 저버린 야합이다. 자신과 같은 정파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정파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현장조직은 노동조합 지도부라는 권력을 좇아 개인적 친소관계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진 집단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혹평도 있다. 그리고 전국적 범위에서 만들어진 현장조직연합이나 정파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중운동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돌입하면, 운동의 방향과 노선을 둘러싸고 일정한 견해를 가진 집단이 형성되고 이것이 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정파들의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것 자체는 어느 나라나 공통적으로 겪는 자연스러운 운동의 발전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파가 의견과 노선을 둘러싸고서 건강한 대립·갈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분파주의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잘못된 행태를 드러낼 때 운동은 지체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사회운동에서도 운동의 대의나 목표, 전체 운동의 성장보다는 자기 분파의 이해를 우선시하고 온갖 논리로 이를 합리화하는 분파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결국 운동의 성장과정에서 정파주의가 발생시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운동의 올바른 성장이 지체되고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이 가로막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선거에서 누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느냐 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가 지금의 정파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누가 지도부가 되더라도 지금의 정파주의 구도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민주노총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파주의 문제가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대다수 활동가들이 정파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렇지 않은 주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정파 해체를 주장한 이들이 통일의 기치 하에 또 다른 정파를 만듦으로서 정파의 난립을 더욱 부추기거나 패권주의로 간 경우도 있다. 정파구도를 벗어나서 밑으로부터 대중의 신뢰를 얻는 올바른 주체가 새롭게 형성되어 기존의 정파구도를 타파하는 것이 대안이 될 듯 하지만 아직 그런 움직임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정파대립 구도를 올바른 노선과 운동방향을 둘러싼 대립구도로 바꾸어가자는 것이다. 

노선과 방침 중심으로 치러지는 브라질 CUT 선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승자독식 구조를 바꾸어내야 한다. 현재의 노동조합 구조는 위원장이 51%의 지지를 얻더라도 49%는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 정파 중심으로 지도부와 상근자를 구성할 수 있다. 대공장에서 위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그리도 정파간 갈등이 심한 이유도 위원장이 되면 수많은 상근자를 전임으로 구성하고 조합비를 운영할 수 있는데 반해 지도부가 아니면 한마디로 개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의 게임이 되도록 원천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결국 모든 것을 걸고서, 필요하면 원칙을 훼손해서라도 승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조직에 대해 비판을 넘어서 비난과 중상모략이 필요성까지 느끼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노선과 정책을 둘러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수 차례 총파업을 선언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투쟁의 평가는 나는 잘 싸웠고 너는 못 싸웠다는 책임전가식이지, 정말로 그 투쟁이 필요하고,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 제출한 공약이 이행되었는지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다. 결국 이러한 승자독식구조와 대중적 평가의 부재가 현재 정파구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현재 브라질 대통령 룰라를 배출한 브라질판 민주노총인 CUT나 노동자당의 조직운영은 이러한 측면에서 배울 점이 있다. CUT의 경우 각 정파별로 자신이 생각하는 운동의 방향과 노선, 방침을 대의원대회에 제출하고 대의원을 집결시킨다. 필요에 따라 여러 정파가 연합하여 하나의 입장을 내세울 수도 있으며, 기존의 같은 조직에서 당면한 전술적 방침에 따라 다른 입장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대의원들은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투표를 하게 된다. 이 투표에서 나타나는 지지율에 따라 지도부, 집행부를 구성한다. 제일 많은 표를 얻은 정파가 우선적으로 지지율에 따라 집행부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정파별 지지율에 따라 자리를 차지한다. 조직의 운영 역시 주요한 방침에 따른 지지율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사회당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당대회를 운영한다고 한다. 

조합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이러한 방식은 우리의 운동구조와 몇몇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정파조직이 조직운영의 주체로서 당당히 평가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은 평가받지 않고 숨어서 비판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출하고 평가받을 수 있다. 둘째로는 승자독식 구조가 아니라 대중적 지지에 따라 지도부가 배분되는 것이다. 운동의 노선과 방침을 둘러싼 정파간 타협과 토론의 규칙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는 과도한 정파갈등을 합리적 갈등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승자독식이 아니므로 정파는 노선과 공약을 중심으로 차분하게 대중의 지지를 얻으면 된다. 전술과 노선의 차이가 생기면 정파구도도 변경되고, 새로운 입장을 제출하면 대중의 지지와 검증을 거쳐 정파가 새로 형성될 수 있다. 

우리의 정파대립구도에서는 낡은 개념을 가지고 상대를 노사타협주의니 투항주의니 극좌파니 딱지를 붙인 지가 오래됐다. 스스로는 낡은 개념을 버린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과거 학생운동권의 NL이니, PD니 하는 구도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중을 주인으로 세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파간의 경쟁구도에서 조합원은 뒷전으로 밀려날 우려가 많다. 변화가 필요하다. 조합원을 중심에 두고 대안과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 조합원이 평가하고 조합원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 속에서 정파가 건강한 의견제시그룹이나 정치적 노선과 견해에 따른 그룹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파운동을 보다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조합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