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새 패러다임 절실

노동사회

한국정치, 새 패러다임 절실

admin 0 2,196 2013.05.12 03:02

새 정부의 탄생으로 많은 기대를 갖고 맞이했던 2003년이 혼란 속에 저물어가고 새해가 밝았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개혁과 통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건설'을 내세우며 닻을 올린 참여정부의 1년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모습이 훨씬 많아 2003년은 스산하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새해에 대해서도 밝은 전망보다는 어두운 '예비적 좌절'이 더 강한 사회적 분위기다.
 
2003년은 가슴 벅찬 기대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월드컵 4강의 기쁨도 잠시, 잇달아 터지는 각종 게이트와 리스트, 경기침체와 실업난, 북핵위기로 침체되어 가던 2002년은 희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개혁, 민족통일의 방향으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참여정부의 출범 때문이었다.

참여정부의 화두, '개혁'

nurison_01.jpg16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변화 가능성과 방향을 보여주었던 주춧돌 선거(founding election)였다.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정권교체',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정치교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패러다임 교체'를 각각 내세웠다. 이 가운데 국민이 선택한 것은 '정치교체'였다. 부동의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던 이회창 후보가 끝내 낙선한 것은 국민이 낡은 정치의 교체를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보를 추구하는 새로운 세력과 역사적 퇴보를 고집하는 낡은 세력의 대결이 이뤄졌던 16대 대선은 변화를 향한 국민적 욕구가 분출된 거대한 역사적 실험장이었다. '바보 노무현'의 당선은 한국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특정한 지역에 압도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카리스마적 보스가 끌어가던 사당정치, 지역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돈이나 지역감정, 색깔론, 흑색선전, 언론의 선거개입 등이 예전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

노무현 당선의 가장 큰 원동력은 그가 걸어온 길이 시대정신인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유권자들에게 갖게 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바람'이 '노무현 개인'에 대한 기대와 지지라는 좁은 뜻으로만 해석되면 안 된다. 유권자들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은 '국가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자질'보다는 그의 '일관된 소신과 원칙의 정치' 때문이었다. 특히 지역주의 극복과 언론개혁이라는 현안에 대해 보인 '일관된 개혁 태도'가 새로운 정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지역갈등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움을 피해가지 않고 기꺼이 맞섰다는 이미지로 노무현 대통령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모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참여정부의 화두는 개혁이다. 개혁만이 살길이다. 노 대통령이 약속했던 가치들, 즉 '새로운', '국민에게 감동을 국민과 함께 기적을', '깨끗한', '열심히 땀흘린 만큼 대접받는', '소외 받는 사람 차별 받는 지역 없이 누구나 잘 사는', '여성이 당당히 어깨 펴는', '분단을 넘어 동북아의 중추국가로', '21세기에 우뚝 서는', '상식과 정의가 파도처럼 넘실대는' 대한민국의 실현이 바로 개혁이다.

'우왕좌왕'한 참여정부

참여정부 첫해인 2003년은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문민과도기인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대를 마무리짓고 '양김 이후'의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렸다. 문민과도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사회 전체가 갈등과 대립에 시달리고 있으며, 생각의 차이를 근거로 상대를 증오하는 증오의 정치가 일상화되었다. 이 같은 야만과 광기의 역사를 청산하는 과제가 2003년의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표출되고 확인된 변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낡은 정치권에 의해 거부되었다. 낡고 부패한 지역주의 정치는 여전히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SK 비자금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불법 대선자금의 실태와 이 문제를 다뤄나가는 정치권의 오만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국민에게 정치개혁의 절박성과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국정운영의 기조를 정하고 새로운 국정운영의 틀을 짜기도 전에 잇달아 벌어진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파업 문제, 새만금 문제, 핵폐기장 문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 한총련 문제, 한미정상회담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참여정부는 국민을 상당히 실망시켰다. 철학의 빈곤과 능력의 부족은 많은 기대를 걸었던 국민을 실망시켰다. 대통령 측근비리 문제가 불거진 것도 지지자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참여정부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소극적 지지나 반대로 옮겨가는 사이에 기득권 보수진영과 낡은 정치세력이 부활했다. 한나라당과 조폭언론 조·중·동이 선거 이전의 상태로 힘을 회복한 것이다.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되살아난 보수세력은 이전보다 더 극성스럽게 국정운영에 어깃장을 놓았다. 대학교수들이 2003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우왕좌왕'을 꼽은 것처럼 참여정부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로 2004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2004년, '낡은 정치 타도'의 해

nurison_02.jpg2004년의 성격은 4월15일에 치러질 17대 총선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총선이 노무현 정부의 승리로 끝난다면 개혁과 변화가 다시 화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 승리한다면 개혁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노무현 정부가 승리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의 승리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계속 행동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것이다. 한나라당의 억지부리기는 한나라당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들 것이다. 야당의 역할은 소금과 등불의 역할이다. 정치가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이어야 하고, 현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대안이 있다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앞장서서 정치를 썩게 만들고 있으며 국민을 무시하는 뻔뻔스런 국회운영으로 국민을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권위주의 시절의 선거 이슈가 '독재정권 타도'였다면 2004년 총선의 선거 이슈는 '낡은 정치 타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클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는 공명선거감시운동, 낙천·낙선운동, 지지·당선운동, 후보추천운동 등 크게 네 가지 수준에서 다양하게 선거에 개입할 것이다.

낙선운동에 대한 불법판결이 나왔지만 낙선운동은 법적으로 허용된 운동이다. 다만 낙선운동의 방법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허용된 범위를 벗어난 낙선운동 방식이 선거법 위반으로 제재를 받았던 것이다. 2000년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매우 높았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멋대로 굴러가는 낡은 정치에 대해 국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낙천·낙선운동은 '고장난 정치'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는 유권자들의 정당한 자구 노력이었다.

2000년 총선에 바람을 몰고 왔던 낙천·낙선운동의 위력은 2004년 총선에서는 예전처럼 절대적이지 못할 것이다. 낙선운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요구가 있으나 전국 조직이 결성되고 단일한 대오로 낙선운동이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이나 부문의 필요나 역량에 따라 국지적으로 낙선운동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여성단체나 환경운동단체들은 지지·당선운동이나 후보전술을 채택했다. 지지·당선운동이나 후보전술은 파괴력이 낙천·낙선운동처럼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의 약진 기대

17대 총선은 최악의 선거가 될지 모른다. 다만 하나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진보정치 세력이 17대 총선에서 확실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굳힐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분단구조를 빌미로 한 진보 없는 보수정당 체제, 경직된 이념체제 아래서 진보정치 세력은 끊임없이 탄압받았다. 1950년대 진보당과 조봉암의 정치적 좌절 이후 제도정치 진입에 번번이 실패했던 진보정치 세력은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을 뛰어넘는 제3당으로 부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은 16대 대선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100만 표 가깝게 득표했던 것이다. 선거일 직전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가 없었다면 더 많은 득표도 가능했을 것이다. 16대 대선을 통해 확실한 대안정당으로 자리를 굳힌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올바른 형태로 도입된다면 독자적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약진할 가능성도 있다.

선거결과가 어찌되든 2004년에도 개혁은 여전히 유효한 화두일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낡고 썩은 정치의 틀을 바로잡아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정치개혁은 시급한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낡고 썩은 정치이다. 정치는 사회의 여러 갈등과 대립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푸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갈등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자꾸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애물단지' 노릇밖에는 하지 않았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고장난 불량정치가 더욱 문제인 것은 경제까지 망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정치가 갈등과 대립의 정치였다면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은 화합과 조화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평소에는 소외시키고 배제시켰다가 필요할 때만 동원했던 동원의 정치에서 자율과 자치를 기준으로 국민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는 참여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밀실에서 패거리들이 움직이던 닫힌 정치를 광장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열린 정치로 바꿔야 한다. 돈과 지역감정 등 비합리적 요인들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깨끗한 정치가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새 주체와 패러다임이 필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득권 정치구조에 편입되지 않았던 새로운 정치세력이 중요한 구실을 맡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권주의이다. 국민의 자율적 의사와 판단을 바탕으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정당이 정책대결이 아니라 지역대결을 하고 있고, 정치적 신념이 아닌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 잦은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 매우 필요하다.

21세기를 끌어갈 새로운 정치세력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시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열린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둘째, 인물중심의 무원칙한 연줄정당이 아니라 이념과 노선, 정책의 동질성에 기초한 정책정당을 지향해야 한다. 당원의 당비에 의한 정당재정의 자립적 토대를 구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며, 시민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인 정당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 중앙당과 지구당의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만들고, 정치자금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망국적 지역대결 구도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개혁은 새로운 국가 발전을 모색하는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체제와 운영 원리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새로운 개혁 이념과 발전 방향은 IMF 사태를 불러오는데 기여했던 두 갈래의 국가 발전 노선, 즉 관치 경제로 대변되는 신중상주의뿐만 아니라 시장만능주의를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까지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경제와 참여민주주의의 균형 발전이 개혁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 땜질식의 임시방편적 개혁이 아니라 사회 운영 원리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돈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2004년이 패러다임 전환의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