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열정·청년의 패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노동사회

혁명의 열정·청년의 패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admin 0 4,780 2013.05.12 02:55

"이 땅에 또다시 독재의 씨를 뿌리려 하는 마당에 전국민은 모두 민권수호에 궐기하라!"
"李(이승만)독재의 재판이 되어 가는 보수세력은 또다시 민권을 앗아버리려는 흉모를 꾸미고 있다!"

minjok_01.jpg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3월의 어느 저녁, 서울시청 앞에서는 어스름을 뚫고 모여든 군중들이 횃불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사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2大악법'(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을 성토하는 혁신계 정당사회단체, 청년·학생 단체 지도자들의 연설이 단상 위에서 불을 뿜었다. 그 중에는 "반민주악법이 언론탄압의 독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외치는 서른한살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윽고 대회가 끝나고 시가행진이 시작됐다. '횃불 데모대'는 시청앞 광장을 출발하여, 한국은행 앞을 굽어 을지로5가와 종로를 거쳐 광화문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아마 그 행렬의 선두에는 다음 날 신문 일면에다가 자신의 뜨거운 피로 데워진 이 집회 소식을 쏟아낼, 젊은 민족일보 기자가 있었을 것이다. 1961년 3월22일의 일이었다.

"저놈들은 기자야, 투사야"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빈자리에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민주당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부정축재자들은 심판 받지 않았고, 3·15부정선거의 책임자들도 대부분 그냥 풀려 나왔다. 자주적 남북협상을 외치는 목소리는 반공주의의 폭력 아래 깔아뭉개졌다. 결국 4월혁명이 시민과 학생들의 피로써 요구했던 과제들은 정치적으로 어느 것 하나도 제도화되지 못했다.

minjok_02_0.jpg이른바 '혁신계' 정당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한국사회당, 사회당…, 갈래갈래 찢어진 '혁명계승'의 목소리는 결국 1960년 7월 선거에서 6.6%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며 국회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당시 진보세력은 이러한 패배의 원인을 혁신계 정당의 분열과 함께 혁신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러한 반성 속에서 모색되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민족일보였다. 그리고 정치적 파벌과 관련이 없는 참신한 사람, 신문을 만드는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젊은 기자들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찾는 과정에서 조용수가 사장으로 추대되고, 1961년 2월13일 드디어 창간호를 발간했다.

"상상을 못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한 사람이 2인, 3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자들은 기자인 동시에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복무하는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정말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기자라는 것보다도 나도 소위 운동의 한 성원이라는 그런 자부심 때문이었죠. 다른 신문의 기자들이 저놈들은 기자야, 투사야 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 민족일보는 신문사였지만, 일종의 광장이었습니다. 노인들이 심심하면 탑골공원에 모이듯이, 당시에는 민족민주평화통일, 진보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이 조선일보 뒤, 예전 원자력병원 터에 있었던 민족일보 사무실로 모두 모여서 떠들다 가곤 했습니다. 모두들 흥분해서, 에너지들이 굉장했지요. 요새 신문은 그런 열정이 없을 겁니다. 정말 대단했죠."

가판에서 제일 잘 팔리는 신문

예전 민족일보의 분위기를 회상하는 전무배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공동의장(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의 목소리는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답지 않게 들떠있었다. 40여년 전의 전무배 기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학생들이 주역이 되었던 4·19를 탄생배경으로 하는 신문답게 민족일보는 젊었다. 그 '젊음'은 단지 당시로서는 급진적 주장이었던 중립화 통일방안과 남북협상을 촉구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2大악법'을 열정적으로 반대하는 정치적 진보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륜이 많은 편집위원과 논설위원들도 많았지만, 젊고 패기 넘치는 사장과 기자들을 갖춘 민족일보는 말 그대로 젊었다. 기자들은 데스크에서 시키지 않아도 초근목피도 제대로 캐먹지 못하는 당시 민중의 피폐한 생활상 속으로 들어가 기사로 만들어왔고, 시위를 취재하러 간 기자는 데모대의 제일 앞줄에 서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일보의 젊은 사장은 신문 일면에 다른 신문에서는 보도조차 잘 되지 않는 반정부시위, 파업에 관련된 소식들이 큼지막한 글씨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4월혁명으로 뜨겁게 치솟았던 과제들이 장면 정권과 보수신문들에 의해 슬그머니 망각의 강 저편으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일보가 뿜어내는 이러한 열기는 금방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처음에 2만부 정도였던 민족일보의 발행부수는 계속 늘어나 당시 최대신문사였던 동아일보와 비슷한 수준인 4만5천부까지 기록했다. 특히, 길거리 가판에서는 민족일보가 가장 잘 팔리는 신문이었다.

이렇듯 열정적인 민족일보의 급성장은 보수적인 민주당 장면 정권에게는 턱밑에 들이댄 칼날과 같았다. 당연히 탄압이 잇달았다. 민주당 정권은 당시 정부관리의 서울신문에서 윤전기를 빌려쓰는 민족일보의 가난한 처지를 치졸하게 이용했고, 결국 민족일보는 1961년 3월2일부터 3일 동안 신문을 발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과 함께 혁신계의 다양한 계파가 모여있는 곳이다 보니 민족일보에는 다소간의 내부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민족일보의 성장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민족일보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5·16 군사쿠데타와 조용수 사장의 사형

minjok_03.jpg"정말 분한 것이…, 만약 5·16이 나지 않았으면 통일문제 30년은 앞당겨졌을 겁니다. 여기(민족일보 영인본의 기사들)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서신교류, 문화교류, 체육교류가 막 추진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학생회담…, 특히 학생회담 준비는 거의 다 되가는 중이었습니다. 저쪽(북한)에서도 하자고 동의했거든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냐 하는 말이 그 때 처음 나온 겁니다. 그 때 열기 정말 대단했죠. 장면 정권이 발붙일 틈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1961년,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도 민간의 자주적 통일노력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급작스럽게 5·16이 발생했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묵사발 낸 것들의 목록에는 당연하게도 민족일보가 포함되어 있다. 쿠데타 3일 뒤인 5월19일 민족일보는 지령92호를 끝으로 불과 3개월여만에 압살, '폐간'당하고, 7월3일 발효된 '반공법'을 근거로 조용수 사장을 비롯하여 16명의 임직원이 '북의 간첩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발행하고 북의 괴뢰정권과 동일한 위장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대표가 판사로 참여하기도 했던 민족일보사건 담당 '혁명재판부'는 조용수 사장을 비롯하여 3명에게 사형, 이종률, 이상두 피고에게 징역 10년, 양수정, 이건호 피고에게 징역 5년을 확정했고, 사형을 받은 세명 중 두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조용수 사장에게만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을 확정한 근거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비서출신인 이영근씨가 실은 간첩이었고 그가 조용수 사장에게 조총련으로부터 나온 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을 '혁명재판부'는 당시에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혐의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이영근씨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무궁화훈장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혁명재판'의 과정에서는 변호인단 반론과 이의 신청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국제신문협회(IPI)와 국내외 언론인, 문인들의 수많은 탄원도 소용없었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삼일 앞둔 1961년의 세밑, 조용수 사장은 그의 짧고 열정적인 인생을 교수형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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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 일주년기념 민족일보(민족일보영인본 중에서) ]

무덤 앞에 선 사람들의 몫

"조용수가 어떤 사람인고 하니 … 박정희의 정체를 파악 못하고 4월혁명 과업을 완수하라며 글을 써주다니, 상당히 감상적이었죠. 나이가 서른 하나였습니다. 최달희를 엎고 (간수 없이) 나갔다가 도망칠 줄도 모르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고, 사회당 당수였던 최근우씨가 죽었다고 감옥 안에서 밤새도록 울고…, 상당히 감상적이었습니다."

"조용수 사장이 어느 날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다가 돌아온 사람 집에 가보니까 사는 것이 거지보다 못하거든, 거기서 또 울었답니다. 이게 말이지, 자기 몸, 자기 가족 돌보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싸워 온 사람들은 이러고 살고 일제에 빌붙었던 놈들은 그대로 떵떵거리고 살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면서 울었다는 겁니다. 신문 운영도 급하지만 이 사람들도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면서 사업을 벌였습니다. 혁명유족구호회인가 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돈 빌려다가 쌀 사주고, 그래놓고 자기는 종이 값 구하러 돌아다니고 그랬던 거지요."

2003년 12월20일 토요일,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태우고 탑골공원에서 출발한 전세버스는 남한산성의 어느 기슭에 멈춰 섰다. 버스에서 내린 노인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도착한 곳은 어느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무덤. 무덤의 주인은 이 노인들의 생애에서 가장 맑게 빛났던 순간을 상징하는 이름, 그리고 끝내 만개하지 못한 4월혁명과 이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이름, 조용수였다.

이날 조용수 사장 추모식을 주관한 단체는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원회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민주화운동의 보상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1998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김자동과 전무배 그리고 민족일보의 경영에 참여했던,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이렇게 세명을 중심으로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규명위원회가 주되게 추진하는 것은 조용수 사장의 재심을 통해서 조용수 사장과 민족일보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전무배 공동의장은 조용수언론상 제정, 민족일보의 복간 추진까지를 고민한다. 비록 당신들 세대에서 복간되는 것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추진 자체가 진보운동에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상규명위원회 강신옥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실정법상 재심의 청구조차 매우 힘들다고 한다.

"이랬어요. 조용수 사장 40주년이 되는 2001년을 원년으로 잡고, 민족일보가 강제폐간된 5월19일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아직도 오도가도 못하느냐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프레스 센터 앞에서 한 쪽에는 민족일보를 복간시켜라, 다른 쪽에는 조용수를 살려내라 하는 현수막을 걸고, 전국의 언론계, 각 대학 신방과 교수, 그리고 노동자 민중들 다 불러모아 놓고 민족일보 복간추진위원회를 시작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허허… 그게 참 조용수처럼 감상적인 얘긴 건지 잘 안되더라고."

뒷이야기

"언젠가는 저는 이 자료들이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민족일보를 모두 모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이게 없어져 버렸어요, 알아보니까 우리 집 애가 이게 뭔지를 모르고 엿장수를 줘버렸던 거라, 쥐가 뜯어먹은 자국이 있고 그러니까 버리는 것으로 알았던 거죠. 하, 이거 나무랄 수도 없고, 기가 찼습니다. … 결국 전국각지에서 민족일보에 관심 있던 사람들을 우리가 전부 뒤적거려서 다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저래 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았지요. 생활도 해야 했고 해서, 3년이나 걸렸습니다. … 그렇게 어렵게 다 모았더니 박현채씨가, 전 선배, 고대 도서관장 하는 강만길 교수가 민족일보 마이크로 필름으로 가지고 있어요, 하는 겁니다."

이렇게 어렵게 1990년 민족일보 지령1호부터 92호까지를 묶은 영인본이 발간되었습니다. 이를 발간한 분들은 영인본이 도서관에 자료로서 소장되는 것뿐만 아니라 대학생 신문사, 노보발간 담당자 등 실천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을 위해 쓰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노동사회 편집실로 연락해주세요.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