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런닝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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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런닝맨’

admin 0 6,412 2013.05.12 12:16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공개적으로 파트너를 대동해야 하는 자리에는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겸손한’ 친구들을 데리고 가기 마련이다. 착하기만 해서 매력은 별로 없을지라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정당성을 빛내줄 수 있는 친구들, 마약퇴치, 백혈병 어린이·소년소녀가장에 대한 원조, 책읽기 등등. 그러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향해 미친 사랑의 눈빛을 뿜고 있는 이는 저 멀리 어두운 곳에 따로 있다. 인민들에게 나눠줄 달콤한 “아편”이 필요한 음습하고 거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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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위한 학살쇼!! ‘런닝맨’

때는 2017년, 경제가 실패하고 식량과 자원 부족이 하층민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체감되는 불안정한 사회. ‘런닝맨’은 이런 사회에 기여하는 ‘공익’적 성격이 다분한, ‘미국’식 오락 프로그램이다. 거기에는 노래와 춤, 재치 있는 사회자의 입담과 방청객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공공의 적을 향한 사회적 공분과 단죄의 짜릿한 흥분, 이 모든 것이 넘쳐나도록 있다. 쇼 ‘런닝맨’의 개요는 사회적으로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범죄자들(런닝맨)을 지진으로 고립된 폐허에 풀어놓고, 첨단 무기를 가진 추적자(스토커)가 쫓아가서 죽이는 과정을 생중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에로틱한 춤과 노래,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는 영상물, 영웅적이고 극적인 스토커의 등장과 추적, 방청객을 위한 엄청난 상품과 결합해서 보여준다. 

이 쇼는 어쩌면 ‘방송불가 판정’을 받을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술적으로 수정하면 된다. 미래사회, 2017년이 아닌가? 게다가 쇼 런닝맨의 대단한 ‘공익’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법무엔터테인먼트부”가 나서서 그런 사소한 부분을 처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협조하는 것도 다 이해할 만하다. 

런닝맨으로 지원하는 절차는 당연하게도 사면을 원하는 범죄자들의 ‘자원’에 의한 것이다. 법무관이 쇼가 시작하기 직전에 런닝맨으로서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적절하게 통보해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물론 우리의 주인공, 벤 리차즈의 경우처럼 너무나 훌륭한 육체적 조건과 극적인 요소를 갖춘 나머지 방송을 위한 약간의 ‘강요’가 따르는 경우도 다소 있을 게다. 모든 쇼는 “방송국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쇼 ‘런닝맨’이 만들어낸 반영웅

울룩불룩한 근육의 소유자 벤은 함께 탈옥한 친구들, 도저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뚱뚱이와 홀쭉이를 런닝맨으로 내보내겠다는 협박 때문에 ‘런닝맨’의 프로듀서이자 진행자인 데몬 킬리언에게 “난 돌아올 거야(I'll be back)"라는 말을 남기고 쇼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서 기우뚱 돌아보니, 아뿔싸! 이 친구들, 홀쭉이 웨이스와 뚱뚱이 래플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에서 쭈삣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헌법을 가르치다 잡혀온 중년 흑인 래플린, 반체제단체를 도와 방송국 네트워크를 해킹 하다 감옥에 온 안경잽이 웨이스, 거기다 덤으로 감히 쇼가 보여주는 진실(벤 리차즈가 식량을 원하는 데모대에게 무차별 난사했다는 사실)을 의심한 당돌한 아가씨 엠버 멘데스까지. 아무리 벤 리차즈가 유능한 군인 출신이라지만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서 살아남는 것은 객관적으로 조금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벤 리차즈 역을 맡은 배우는 우리의 근육덩어리,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아놀드 슈왈제네거’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놀드’가 영화 속에서 실패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한가? 

기대대로 우리의 ‘아놀드’, 벤 리차즈는 아이스하키 채를 작두처럼 들고 설치는 서브지로, 전기파를 쏘며 전기파보다 더 끔찍한 노래를 꽥꽥대는 다이나모, 화염방사기를 들고 절도있게 날아다니는 파이어볼 등 스토커들을 차례차례 조져버린다. 이럴수가! 맨손의 런닝맨이 스토커들을 쓰러뜨리다니…, 대중들이 텔레비전 속으로 집어던지기 위해 준비한 ‘공공의 적을 향한 분노’는 어떡하라구! 이건 엄청난 방송사고다. 그러나 돌발사태는 쇼를 향한 열기를 어느 때보다 집중시켜 사상 초유의 시청률을 기록하도록 만들고, 진행자이자 프로듀서 킬리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당연히 쇼는 계속된다. 그리고 쇼가 열기를 더해갈수록, 역설적으로 ‘공공의 적에 대한 폭력적 단죄’라는 쇼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조적 균열이 생겨나고, 그 불안정한 공간에서 ‘방송이 만들어낸 영웅’ 스토커를 쓰러뜨린, ‘반영웅’ 벤 리차즈를 응원하는 사람들, 그에게 돈을 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액션영화’가 여기까지 오면, 좀 본 사람들에게는 ‘척하면 삼천리’겠다. 영화 보는 사람의 예상대로 벤 리차즈는 쇼의 현장을 무사히 탈출한다. 게다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간 래플린의 유언과 사명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웨이스가 목숨과 바꿔서 알아낸 방송국 네트워크의 접속암호를 들고서 반체제군과 결합해서, ‘미녀’ 멘데스와 함께 방송국에 떠억 나타난다. “돌아오겠다”던 약속대로 킬리언 앞에 선 묵직한 사나이 벤. 말 많은 우리의 악당, 데몬 킬리언은 런닝맨들을 중계장소로 보내는 운송도구를 타고 뭐라고 쉴새없이 지껄이다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 즉 벽 속으로 사라진다. 드디어, 해피엔딩. 영화는 킬리언이 섰던 무대 위에서 벤과 멘데스가 찐한 키스 한 방을 때리는 장면 위로 헐리웃 영화다운 사운드가 흐르며 끝난다.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끔찍한 현실

솔직히 말하자. 이 영화 싱겁다. 미래에 무슨 복고바람이 불었던 겐지 영화 속에서 보이는 구질구질한 80년대 풍 2017년의 모습과 너무도 쉽게 우스운 꼴로 죽어 가는 스토커 때문만이 아니다. 옛날 액션영화 볼 때는 그런 건 낄낄대고 넘어가야 한다. 이 영화가 싱거운 것은 자기가 설정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어설프게 뒤집는 허술함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청률이라는 절대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배신하는 반영웅 벤 리차즈를 탄생시킨 쇼 ‘런닝맨’의 거울 속 그림자이다. ‘(조작된) 공공의 적에 대한 잔인한 단죄’라는 폭력적인 지배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의 상식 속에서 환호 받는 강퍅한 시대, 사회적 불만을 호도하기 위해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결합하는 음습한 권력구조, 이러한 비판적인 배경 설정이 보수적인 헐리웃 액션영화의 문법과 적을 향해 마구 치닫는 우락부락한 ‘아놀드’의 거친 걸음 아래 스산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 조금 무서운 면도 있다. 원래 미래에 대한 상상의 형상화는 조금 극단적이게 마련이다. 자신이 달에서 살고 있을 2000년을 상상했던 어린 시절의 꿈처럼. 그런데 8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현실의 압도적인 변화에 식상해져버렸으니,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신보수주의자들, 미국의 매파들이 상상하고 이뤄낸 현실 -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테러방지라는 명목, “정책분석시장(PAM)”이라고 이름붙여졌었던 테러확률과 도박(엔터테인먼트)을 결합시키는 황당한 발상 등 - 이 영화적 상상력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아,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속에서 자꾸 메아리치던 말이 있었는데 뱀발로 달아둔다 ‘공화당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가는, 반이민자법을 지지했었고, 부시를 존경하는 아놀드! 영화판으로 “돌아오겠다(I'll be back)"고 말해줘요. 제발~’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