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을 천황 폐하께 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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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을 천황 폐하께 돌려 드립니다”

admin 0 3,365 2013.05.12 12:06

2차 대전을 일으킨 주축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나라였다. 당시 세 나라의 지도자였던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는 연합국이 뿌린 포스터에 ‘전쟁광’으로 그려졌고, 전쟁 중에 이들 세 명이 전범재판소에 설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맨 먼저 무솔리니가 그의 정부(情婦)와 이탈리아 빨치산에게 사살당했고, 히틀러는 소련의 적군이 베를린에 가하는 포성을 들으며 역시 정부와 함께 벙커에서 자살했다. 이 때문에 유럽의 전범을 처리한 뉘른베르그 재판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도자를 처벌할 수 없었다.

반면, 아시아의 전범을 처리한 동경 재판은 전혀 다른 이유로 일본의 지도자를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미국과 영국이 입장을 바꿔, 히로히토가 전쟁을 일으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른 전범이 아니라 극단적 군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희생양에 불과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2차 대전의 최고 전범 3명 가운데 전범재판소 법정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범 명단에서 빠진 일본 천황

2 차 대전 중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벌하기 위해 동경국제전범재판이 열렸지만, 처음부터 히로히토는 기소자 명단에서 빠졌다. 1926년 히로히토가 일본 천황에 오른 이후 저지른 수많은 범죄행위는 천황과 아무런 상관없이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라는 논리가 동경 재판을 압도했다. 히로히토가 임명한 장군과 제독들이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을 전화로 물들였지만, 이들의 최종 임명권자인 히로히토는 희생양일뿐이고, 그의 명을 받들어 전쟁을 수행한 장군들과 제독들(그것도 일부만)이 전범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채택되었다. 천황은 일본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수괴가 아니라 희생양이기 때문에 전범으로 기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나리오는 트루먼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 행정부와 맥아더가 이끌던 미군극동사령부에 의해 강요되었고, 동경재판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 채 막을 내렸다.

소련이 항의하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냉전의 도래를 기정사실로 만든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교두보로 확보할 필요성이 생겼고, 미국이 일본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마당에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해 일본 국민의 일체감을 훼손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일본 내부와 아시아 각국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히로히토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천황은 일본 통치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고 믿을만한 인물이며, 국제관계, 특히 동양에 있어 가장 신뢰할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침략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중국의 장개석조차 종전이후 투항한 일본군을 공산군 토벌에 활용하는 것을 용인받는 댓가로 히로히토의 전범 기소 제외를 묵인했다.

“공산주의 저지 위해 아시아 점령”

결국 동경전범재판에 기소된 전범은 26명에 불과했다. 군국주의와 광신적 인종주의를 설파하고 지원했던 기업인, 대학교수, 종교인, 언론인, 판사는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소련이 전쟁경제를 조직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 기업인 3명을 전범 명단에 포함시키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이지 헌법상 누가 최고 군통수권자인가라는 질문이 반복되었지만, 천황 히로히토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전범의 변호사들은 일본의 침략 행위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주장했다. 소련, 중국, 일본,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만이 천황의 책임을 철저히 묻고 엄히 처벌할 것을 요구할 뿐이었다. 미 행정부와 미군 사령부, 그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지배엘리트 등 전범 옹호자들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소련과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악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활하는 천황제

결 국 히로히토는 살아남았고, 천수를 누리다 1989년 일본 천황으로서 88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를 이어 아키히토가 새 천황이 되었다. 1990년 11월 열린 아키히토의 즉위식은 중세식의 화려한 장식과 예법 속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1945년 이후 만들어진 ‘평화헌법’에 기초한 일본식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의 흔적은 즉위식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즉위식 비용은 물론 일본 정부가 전액 부담했다.

마침내 히로히토로 대표되는 일본의 천황제는 미국과 서방 제국의 비호 속에서 살아남았고, 이제는 일본 안에서 천황을 일본의 국가원수로 다시 세우자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자위대를 군대로 격상시키고, 일본 안팎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1944년 적에게 체포당하지 말라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28년간 괌의 정글에서 숨어지내다 귀환한 병사. 요코이 쇼이치. 1972년 2월2일 일본 땅을 밟은 요코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군사 명령을 끝까지 지켰다고 울먹였다. 도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TV 기자들에게 그는 도착 일성을 이렇게 발표하였다.

"요코이 쇼이치, 괌에서 돌아와 보고합니다.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와 패전을 보고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작동하는 소총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황폐하께서 주신 이 총의 개머리판은 흰개미들이 먹어 치웠습니다. 이제 이 총을 천황 폐하께 돌려 드립니다. 천황 폐하의 지시를 잘 받들어 모시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천황을 ‘국민단합과 국체보존'을 위해 국가원수로 다시 세우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주축국의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전범으로 기소당하는 대신 미국의 반소 전략을 위해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다. 조선 식민지를 탄압하고,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수천만 아시아인을 전쟁 참화로 몰고 간 천황. 그 천황을 다시 국가원수로 세워야한다는 일본. 그 일본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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