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향한 도전과 노동운동의 전망

노동사회

21세기를 향한 도전과 노동운동의 전망

admin 0 4,155 2013.05.12 12:05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1991년부터 재개된 노사정 삼자협약은 북구 유럽에서 80년대에 일찌감치 폐기한 코포라티즘의 이탈리아 모델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서막이었으며, 노동운동은 국가정책의 기조 변화와 맞물리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운동이 제도적으로 국가 정책의 일부분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이 시기였고, 사용자 우위의 노사관계가 90년대 중반까지 지배적이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지형변화를 수반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구소련 제국의 몰락은 사회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필연적 사건이 되었다. 특히 서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노선의 당과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이 존재하던 이탈리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그 중에도 가장 세력이 컸던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좌익민주당(DS)이라는 당명 개정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들이 이탈리아 좌파의 급속한 세력 몰락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수세적 정치 상황에도 좌익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정치세력에게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극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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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이탈리아 노조들 ]

정치적 지형변화와 새로운 시대

전후 50년 가까이 집권당이었던 기민당과 연정 파트너였던 사회당 등의 중소정당들은 오랜 기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각종 부패 사건과 비효율성을 정부와 사회 곳곳에 심어놓았다. 이러한 심각성이 일반 국민들에게 드러난 계기는 삐에뜨로(Pietro) 검사가 이끄는 개혁적인 소장파 검사들에 의해서였다. 흔히 ‘깨끗한 손(Mani pulite)’ 운동이라는 부정부패 척결운동으로 인해 당시 국회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연루되는 사상 초유의 부패 사건이 알려지면서 정치 개혁과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는 시대의 대세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기민당 정권은 몰락하고 전문 행정관료들이 수반이 된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정치 변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선거제도의 개정으로까지 이어지는데, 1993년 국민투표에 의해 순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서 다수대표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비례대표제에서 다수대표제로의 변화는 과거 집권여당이었던 기민당의 장기집권을 마감하고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을 마련한 획기적 변화였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정치적 후견인주의와 명망가들에 의한 연정을 가능하게 하였던 제도였지만, 다수대표제는 후보의 당락을 표의 다수에 따라 결정하였기에 투표구에 따른 의원 수로 집권당을 결정할 수 있는 제도였다. 따라서 오랜 집권으로 부패했던 기민당이 몰락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완성이 되었고, 오랜 야당으로 존재하던 좌익민주당(DS; 구 공산당)은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선거법 개정을 계기로 ‘제2공화국’이 들어섰고, 아마또(Amato)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에 이어 새로운 선거법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는 신흥 이탈리아 자본가를 대표하는 베를루스꼬니(Berlusconi)였다. 베를루스꼬니는 이탈리아의 눈부신 경제 성장기에 사업을 시작한 사업가로 처음에는 조그마한 건설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밀라노 주변에 대규모 주택 단지를 지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금융과 방송, 프로축구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여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드문 재벌그룹을 이룩한 신흥자본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장의 배경에는 경제수완 못지 않은 정치적 보호가 있었다. 1969년 이후 유력한 정치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형적인 정경유착 기업가가 되었으며, 특히 크락시(Bettino Craxi)가 수상이었던 시절 크락시와의 후견인 관계를 통하여 눈부시게 성장하여 이탈리아 경제계의 기린아로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회사로는 에딜노르드(Edilnord; 건설), 이딸깐띠에리(Italcantieri; 조선), 임모빌리아레 산 마르띠노(Immobiliare San Martino; 부동산 및 투자), 핀인베스뜨(Fininvest; 방송 및 금융) 등이 있다. 베를루스꼬니는 자본의 위력을 통해 1994년 잠시 수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정경유착을 통한 정치적 부담이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 왔다. 베를루스꼬니는 지난 1994년 부패혐의에 연루되어 삐에뜨로 검사가 이끄는 밀라노 반부패 검사그룹에게 피소되었고 수상직을 내놓게 된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정권 교체의 열망이 현실로 구현된 것은 1996년 총선거였다. 오랜 야당생활을 하던 좌익민주당은 여러 좌파 세력을 묶어 오랫동안 이탈리아 최대의 국영기업체 IRI의 사장을 역임했던 교수 출신의 쁘로디(Prodi)를 영입하고 올리브(Ulivo) 연합을 결성하였다. 전(前)수상이던 베를루스꼬니 역시 포르짜 이딸리아(Forza Italia)를 중심으로 우파 연합(Polo delle Libert?)을 결합하여 선거에 임했지만,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오랜 야당이었던 올리브 연합에게 표를 던짐으로써 전후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국민적 합의에서 대결과 갈등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쁘로디 정부는 이탈리아를 유럽통합에 포함시키기 위한 경제 개혁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노동계 전반의 합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유럽통합국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의 기준조약이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규정한 ‘재정적자 비율 3% 이하와 국가부채 비율 60% 이하’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그러나 1995년까지 이탈리아는 재정적자 7.7%와 국가부채 122.9%를 기록하고 있어서 이탈리아가 과연 유럽통합에 가입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쁘로디 정부는 긴축재정과 과감한 정부 개혁을 통하여 1997년에 2.7%라는 재정적자 비율을 달성함으로써 1998년 유럽연합 가입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성공적 목표달성의 이면에는 노동자와 국민들의 합의가 뒷받침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럽연합 가입이라는 일차적 목표가 완성된 이후 1998년에 들어서면서 국민적 합의는 다시 한번 갈등과 대결 국면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국가 목표였던 유럽연합 가입이 달성되자 노동자들은 그동안 미루었던 노동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실시를 주장하며 정부와 갈등관계를 유지하였다. 노조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안정된 일자리 보장과 주35시간제 노동시간 및 연금관련 연령조정 문제였다. 이에 반해 정부는 국영기업과 정부경영의 효율성을 이유로 각종 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재정적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정부와 노동계의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권 연립세력인 올리브 연합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리브 연합의 가장 커다란 세력은 좌익민주당이었으며, 쁘로디는 특정 정치세력을 거느리지 않은 독자적 인물이었고(쁘로디 지지세력은 후에 마르게리따라는 정당으로 결집된다), 녹색당(VERDE)과 이탈리아 인민당(PPI) 등 여러 소규모 정당들이 연합한 정치세력이었다. 따라서 정치와 정책과 관련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세력은 좌익민주당이었다. 이렇듯 복잡한 세력구조와 역학관계는 노동정책과 복지정책을 두고 집권연합 내에서도 종종 이견과 갈등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연금정책이나 국가경영의 효율성을 내세우는 쁘로디와 경제전문가들 그룹과 정치적 주도 세력인 좌익민주당의 충돌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집권연합 세력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명개정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재건공산당(구 공산당에서 essere sindacato 그룹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급진적 좌파 정당으로 베르띠노띠가 이끌고 있다)은 정부의 노동자 희생 정책을 반대하였다. 결국 쁘로디 정부는 이와 같은 역학구도에서 충분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장하였고, 좌익민주당의 당수였던 달레마(D'Alema)를 수반으로 하는 제2기 좌파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국가기반 정책으로서의 노동정책 

노동정책이 언제나 국가의 기반정책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우 노동관련 정책의 흐름은 노조와 사용자들에 의해 기본적으로 결정되는 구조였다. 이는 이탈리아 경제가 주로 국가 규제를 최소화하기를 바라는 중소기업에 의해 이끌어졌고, 지방자치와 분권적 형태의 국가조직 전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기본적 구조의 틀이 변화하게 된 것은 앞서 이야기한 노사정 합의제도의 정착과 관련이 깊으며, 국가가 노동정책의 전반적 기조를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될 정치적이고 사회적 변화의-앞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영향이 크다.

1990년 이후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 변화는 노동운동에도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였다. 1990년에 제정된 공공부문 파업제한법이나 1991년 재개된 노사정 협의, 또 1992년에 제정된 국영기업과 공사의 사유화 법령 등이 이와 같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특히 1993년의 노사정 삼자협정은 이와 같은 제도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데, 그 해 7월에 확정된 이 협상은 RSU(Rappresentanza Sindacale Unitaria)라는 새로운 기업별 노조통합 대표단이 구성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또한 물가연동제 폐지에 따른 임금보상의 방법을 어느 정도 명문화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통합과 일반 노동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국가제도로서 정착시키는 성과들을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제도화는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민간부문과 달리 공공부문의 경우 국가정책의 제도로 편입되는 과정은 또 다른 경로를 거치게 된다. 1993년 노사정 협약으로 민간기업과 노조들에게 RSU라는 제도적 기구가 성립되자, 국가가 사용자인 공공부문 역시 이에 상응하는 제도가 필요했다. 국가는 이를 위해 공공부문 사용자 단체인 ARAN을 조직하였다. ARAN은 기존의 ASAP이나 Intersind 그리고 중앙정부의 장이나 자치단체장을 대신하여 공공부문 노동자단체들과 직접 협상을 벌이고 노동정책 전반을 조율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렇게 하여 국가기구와 정부안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노동관련 조직과 기구들이 결성되면서 노동정책 역시 커다란 틀에서 국가가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환경 변화는 과도정부 기간을 거치면서 새로운 선거법에 의해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우파적 성격의 기민당 주도 연립정부들이나 전문가 중심의 과도정부들에 비하여 새로운 정부는 그 성격이 분명한 좌파연정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지지층이던 노동자나 일반 국민들의 이해가 걸린 복지정책과 노동정책에 직접 개입하게 되는 이유였으며, 이를 국가정책의 기반으로 삼게 되는 원인이었다. 

1996년 4월 총선으로 집권한 뒤 정부가 가장 먼저 입법화 한 법안 중의 하나가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이었고, 노동과 관련한 직업교육이나 이에 따른 교육프로그램 등을 제도화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실업률(평균 12.3%)이 높은 편인데, 특히 남부와 청년층의 실업률은 50%에 이를 정도로 구조적 문제가 있는 국가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구조적 폐해가 노동시장의 경직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조처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고용창출을 위한 국가 개입 등을 통하여 제도화하려 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고용에 따른 법적인 경직성으로 인해 노동시장에서의 원활한 고용과 일자리 창출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유연화 정책은 고용 경직성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주로 임시직이나 파트타임 노동자의 고용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유럽통화연합의 가입을 위해 이와 같은 노동자 중심의 정책들은 유예되었고, 가입을 위한 기본조건들이 마련된 후에야 노동자와 국가 사이의 갈등과 조정 국면을 거쳐 다시 한 번 추진하게 된다. 쁘로디 정부에 이어 탄생한 달레마 정부는 1998년 고용창출과 경제발전을 위한 협약을 노사정 합의로 체결하려고 하였다. 이 협약의 주요 내용은 지역적으로 낙후되어 있으며, 실업률이 높은 남부 이탈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전기구의 설립문제와 노동비용 삭감을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 마련 그리고 노사정 삼자협의체를 중앙정부뿐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지역 단위로 설치하는 문제 등이었다.

노동정책과 복지정책 등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고 변경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노동조합의 역할과 위상도 변하게 되었다. 임금인상과 노동권 등의 기본적 사항들을 사용자와의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고, 노사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국한하였던 국가의 기능이 점차로 확장하여 노사와 대등한 입장에서 정책의 입안이나 제안에 이르게 되면서 이탈리아 노동정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의도적이고 제도적인 개입은 2001년 5월 총선에서 베를루스꼬니가 이끄는 우파 연합(Polo delle Libert?)의 성립으로 또 다른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노동조직의 상대적 위축

70년대 ‘유류파동’에 의한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80년대 이탈리아적인 산업모델인 중소기업주도 경제성장 발전모델이 정착되면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주로 탈산업화에 따른 육체노동 부문의 축소는 서비스와 운수 및 금융 등의 3차 산업의 강화로 나타났다. 산업구조의 재편에 따라 노동운동 조직과 역량 등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의 3개의 주요 노동조직 이외에도 자율노조와 독립노조들이 등장하였으며, 변화된 노동환경에서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의 흐름은 사용자 우위로 바뀌었다. 

노사간 세력균형 상태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노동조직의 상대적 위축은 당연했다. 이러한 위축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용조건이나 노동3권이 어느 정도 달성된 상태에서 노동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을만한 새로운 이슈를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둘째는 기존 노동세력 판도를 위협하는 새로운 노조들의 등장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도 이탈리아 경제는 비교적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고, 이를 국가 정책에 반영하여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용자 우위의 세력판도는 1990년을 들어서면서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80년대 제2의 경제성장을 이룬 이탈리아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야기된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에 동승하면서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했다. 국가와 사용자들은 위기상황의 타개를 위한 국면전환이 필요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1991년 노사정 삼자협약이 재개되고, 외형적 합의틀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노동자와 국민들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는데, 1992년 완전 폐지된 임금연동제와 같은 것이 그 사례였다.

그러나 변화된 정치적 지형에서 노동운동은 역량의 결집과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3년의 노사정 삼자 협약은 그러한 역량 결집을 위한 시도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삼자 협약에 임하는 기존 3개 노조가 입장을 통일함으로써 향후 노동운동의 주도적 역할 회복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향후 노동운동의 성격이 보다 정치적일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노조 역량의 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연금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노동조직은 70년대 이전 수준의 조직강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노동조직의 정치적 역량강화 

jbkim_02_3.jpg연금문제는 과거 어느 정부에서나 커다란 문제였다. 그러나 기민당 주도의 연정에서 연금문제는 정치적 이유로 흥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 커다란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기민당 정권의 몰락으로 정치적 상황이 변하자 연금법 개정 문제는 또 다시 주요한 정책 이슈로 떠올랐다. 아마또(Amato)와 참삐(Ciampi)의 과도정부에서도 이 역시 중요한 문제였는데, 사회보장비 중에서도 연금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 때문에 연금법 개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보다 강력하게 노동자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힌 시기는 1995년 수상에 오른 베를루스꼬니 때였다. 

수상직에 오른 베를루스꼬니는 기업활동과 국가재정 정책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연금법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기획하였다. 당시 연금법 상에는 일정 연령이 되면 연금을 받는 것이 가능하였는데, 이 원칙을 분담금(35년 동안 분할하여 납입하는 경우)에 의한 연금 수령방법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노조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으며, 노동자들 역시 35년 간의 연금 분할납부는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베를루스꼬니 정부는 이를 노사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강행하고자 했다. 이탈리아 노동조직이 역량을 다시 한 번 결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세 개의 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대규모 집회를 로마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정부는 노조의 강력하고 신속한 대응에 한 발 물러서 노사정 협의회를 통한 협상을 재개했으나, 정부의 신뢰성 없는 태도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샀고, 정부는 연정 내부에서 북부동맹(Lega Nord)과의 불화로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연금법의 수정안과 불신임안을 의회에 제출하였지만,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사퇴 압력과 연정 내의 북부동맹이 야당에 가담함으로써 베를루스꼬니는 8개월만에 물러나게 되었으며, 디니(Din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해산으로까지 이어진 노동조직의 투쟁은 역량의 조직적 강화라는 성과 이외에도 노조 투쟁방식이 보다 정치적인 사항과-예를 들면, 정부 해산과 같은- 연계되는 전략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베를루스꼬니 정부의 뒤를 이은 디니 정부 역시 연금 개정문제를 당시의 정치적 현안들과 연계하여 정책 방향을 세웠다. 그러나 주요 3개 노조는 순간의 승리에 취해 구태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시의 여러 정당들과 우파 세력 및 노동조직 안에서의 진보좌파(essere sindacato가 대표적) 등이 복합적으로 제안한 정치 사안과 노동관계 사항들에 대한 국민투표 제안을 준비 없이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결국 노동조직의 실질적 패배로 끝난 1995년 국민투표의 결과 다시 한번 이탈리아 노동조직 전체는 분열과 패배의 길에 들어서게 되지만, 이를 민주적 당파성과 노동운동 전반의 통합성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정부에 대한 견제와 정책개발

jbkim_03_4.jpg이와 같은 반성과 전략적 재고의 결과는 정치적 행동의 성공이라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다시 말해, 1996년 총선에서 좌파연합인 올리브 연합이 승리함으로써 노동자와 노동조직은 또 다시 정치적 역량강화와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오랫동안 기민당과 사회당 등의 우파연합에게 선거에서 표를 던짐으로써 노조운동과 정치적 성향 사이에서 다소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던 많은 노동자들이 1996년 총선에서는 좌파연합에게 표를 던져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될 수 있는 힘과 역량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노동운동의 흐름도 기존 세 노조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새 정부 탄생의 역사적 합의 사항인 유럽통화연합국 가입을 위한 재정적 조건의 충족을 위해 노동관련 사항들과 문제들에 대한 전(全)국민적이고 전(全)노동자적인 희생과 양보에 동의함으로써 노동자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하고, 노동자 계급이 이탈리아 사회 발전의 주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각인 시켜 주었다. 

그러나 좌파 정권 하에서도 노동자들의 정치적 투쟁과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유럽통화연합국에 가입한 뒤 그 동안 미루었던 노동관련 요구사항과 정치적 사안들에 대하여 노동조직은 이 같은 논의를 국민적 차원에서 전개시켜 나갔다. 안정된 일자리 보장, 연금법 개정 반대에 대한 보다 명확한 입장 표명과 함께 남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제안까지 제시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성격이 노동자 이해중심성에서 벗어나, 정부에 대한 견제와 정책개발이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 노조와 정당의 성격을 함께 지니면서 시민사회단체의 역할까지 함께 한다는 이탈리아적 노동운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사명에 성공하였던 노동운동 조직과 노동자들은 1997년 말부터 다시 시작한 세계경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 정책은 유럽의 대미자본 종속과 함께 내부 경제성장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중국경제의 등장은 인건비 부담이 컸던 이탈리아 경제에 디플레이션의 위험부담을 안게 하는 요인이었으며, 특히 중소기업 발전모델을 채용하고 있던 이탈리아에게 ‘경제규모의 세계화’란 곧 자국 산업체계 전반에 대한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노동자들의 희생은 컸다. 많은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임금의 실질적 삭감을 감수해야만 했고, 유로화의 도입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속수무책이었다. 달레마 정부는 정치적 논리에 이끌려 경제정책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고, 결국 2001년 총선에서 자본의 위력을 마음껏 뽐내며 선거에 임한 베를루스꼬니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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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G8 정상회담. 반세계화 시위대 청년 한명이 경찰총에 맞아 사망했다. ]

우파 정권과 노동법 개정

21세기를 우울하게 시작했던 이탈리아 노동계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장 심각한 정치적 상황변화는 5년 전으로 회귀한 우파 연정의 집권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신흥자본가 출신답게 국가의 효율적 운영과 세계화라는 기치 하에 무려 40여 개에 달하는 법률의 ‘개혁’을 목표로 삼았다. 그 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법 개정이었다.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정부와 노동단체들의 힘겨운 협상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노동법 18조는 노동자의 해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특히 해고의 사유 등에 대한 기본 조항이다.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이 해고 조항을 일방적으로 개정하여 아무런 사유 없이 해고가 가능하도록 법률을 수정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노동단체의 입장은 명확하다. 절대로 이에 대한 개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노동조직의 사활을 걸고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정권퇴진 차원으로까지 확대시켜 전개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집권 이후 베를루스꼬니는 몇 가지 눈에 띠는 실정과 악재를 두어왔다. 이탈리아는 지난 2001년 G8 정상회담을 제노바에서 개최하였는데, 회담기간 중 반세계화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시위대의 젊은이 한 사람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베를루스꼬니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후 불거진 노동법 개정 문제, 연금법에 대한 변함 없는 개정의도, 그리고 몬다도리 출판사의 회계부정에 연루된 소송 문제 등은 베를루스꼬니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만큼 중대한 사안들이었다. 

이에 대한 노동계와 국민들의 반응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5월26일과 27일에 걸쳐 이탈리아 전역에서 1,200만 명의 투표권자가 26개 꼬무네(Comune; 한국어로는 자치시 정도로 번역이 되는 이탈리아 지방 행정단위 중의 하나로 시나 읍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의 시장과 10개의 쁘로빈치아(Provincia; 한국어로 해석하기 어려운 지방 행정단위로 광역시나 군을 2~3개 정도 합쳐 놓은 규모로 생각하면 된다)의 수장을 뽑는 선거로 현 집권 정부의 정책노선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이 모아졌던 선거였다.  

21세기 전망

외형적 선거결과만으로는 우파의 승리라고 볼 수 있지만, 내용을 보면 분명한 좌파의 약진이었다. 다시 한번 노동자와 노동조직이 결집하여 조직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베를루스꼬니의 최근 정치적 행보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반전운동, 기업 부정과 부패 사건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면책특권’을 악용하고 있는 점은 향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당분간 정치적 투쟁을 최우선 목표로 하면서 연금문제와 고용창출 등의 문제를 병행하여 대처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상에서 보면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수세기를 걸치면서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발전 경로와 행보를 보여왔다. 여전히 카톨릭의 입김이 강하고 미국과 밀착한 정치구조, 강력한 좌파정당의 존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수많은 노동조직을 이끌고 있는 세 개의 주요 노총의 세력적 우위, 시민단체보다는 정당이나 노조를 통하여 사회운동이 이끌어 지는 점, 그리고 중앙정치와 지방자치제의 이중적 구조 등 한국과는 다른 상황에서 그들만의 운동노선과 조직을 통해 사회변혁과 진보의 주체로서 노동자들의 역할과 위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용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앞에 표출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다음 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