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은 사회주의 기업관을 가졌다?

노동사회

한국민은 사회주의 기업관을 가졌다?

admin 0 2,984 2013.05.11 11:49

1만 달러의 덫?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세계 인구가 12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1달러면 요즘 환율로 1,200원인데, 지구인 5명 가운데 1명 꼴로 하루 1,200원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서울에서 살려면 하루 얼마가 필요할까? 분명한 건 1,200원으론 턱도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볼 게 있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은 모두 빈곤층일까. 답은 물론 ‘아니다’다. 아마존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데 1달러가 있고 없고는 별로 중요치 않다. 한 사회가 어느 만큼 ‘상품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1달러로도 풍족할 수 있고, 1만 달러로도 빈곤할 수 있다.

요 즘 ‘2만 달러’가 유행이다. 처음에는 재벌이 내세웠는데, 이제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매일경제』의 사설(7월24일자)은 ‘1만 달러의 덫’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1만 달러 시대보다 2만 달러 시대가 매혹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모두가 2만 달러 어치의 번영을 보장받진 않는다.

두 사람이 사는 나라가 있다고 치자. 이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총 4만 달러면, 1인당 GDP는 2만 달러가 된다. 문제는 4만 달러가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냐인데, 고루 가지면 문제가 없겠지만, 한 사람이 너무 많이 가지면 문제가 일어난다. 한 명이 4만 달러를 다 갖고, 남은 한 명이 무일푼이어도 1인당 GDP ‘2만 달러’ 시대는 도래한 게 되기 때문이다.

‘2만 달러’라는 구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의 내용이 더 중요한 데 거기에 대한 고민은 재계도, 관료도, 언론도 하지 않는 듯 하다. 당연하기도 하다. 이들이야말로 ‘2만 달러’ 시대의 확실한 수혜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반자본주의?

사 실 기득권층이 내세우는 2만 달러론의 핵심은 ‘기업하기 편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거다. “기업의 목적을 이익추구보다 사회발전이라고 보는 한국 국민들의 사회주의적인 기업관, 부자와 기업인을 죄인시하는 반자본주의와 반기업 정서, 기업활동 촉진보다 규제에 맞춰진 기업정책, 성장보다 분배와 약자보호를 우선시하는 국민들의 평등주의 정서와 정부의 정책 기조 등이 이 땅의 기업환경을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이윤호 LG 경제연구원장, 『조선일보』 7월7일자, ‘한국기업 구하기’)

이 글을 보면, 한국 국민들이 사회주의 의식을 갖고 있어 기업하기 어렵고, 소득분배가 너무 잘 돼서 기업하기 어렵고, 사회적 약자가 지나치게 보호받아서 기업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물론 현실은 반대다. 한국의 분배 수준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으며, 사회보장제도는 다른 ‘1만 달러’ 나라들에 비해 형편없다.

사실 기업들이 불법과 비리로 축적한 부가 얼마나 컸으면, 더군다나 노동자와 국민의 피땀으로 축적한 부를 기업주 혼자만의 것인양 자기 장롱 속에 어떻게나 꼭꼭 감추어 두었으면, 반세기가 넘는 ‘전투적 반공주의, 반사회주의’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겠는지 되묻고 싶다. 하기야 “기업의 목적을 사회발전이라고 보는” 것을 사회주의 성향으로 보는 이 원장에게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고, 부를 독점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마는.

하루 자살자 35명의 사회

“이 땅의 기업들은 지금 밝은 미래보다는 어두운 미래를 더 많이 보고 있을 것이다”고 이 원장은 썼지만, 사실 이 땅에서 어두운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은 기업주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와 서민들이다.

7 월17일 인천에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세 자녀를 아파트 밑으로 집어던지고 자살한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가진 심각한 빈부격차, 팽배한 개인주의, 만연한 물질주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빚과 일용직으로 번 수십만원의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 이 여인이 외부에서 받은 도움은 이웃주민들에게 간간이 빌린 돈 몇 만원이 전부였다.”(『동아일보』 7월23일자)

경 찰청 통계에 따르면, 1MF 직후인 1998년 자살자 수가 12,458명이었는데 비해, 2002년 자살자 수는 이를 넘어선 13,055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과연 “희망을 잃어 버렸다”는 기업주는 몇 명이나 될까. 이 원장의 바램대로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시 하면, 기업 규제를 풀어버리면, 약자보호를 국가정책의 후순위로 떨어뜨리면 내년의 자살자 수는 올해보다 줄까? 아니면 늘까?

실제로 빈곤선 이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320만 명에 이르는 현실(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자료)에 눈감을 수 없었는지, 『조선일보』는 7월24일자 시론에 남경희 서울교대 교수가 쓴 ‘죽음으로 몰리는 빈민층’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남 교수는 “우리나라의 빈곤율은 최소 6%에서 최고 20%까지로 빈민의 수는 최소 300만 명에서 1000만명으로 추산되고 … 신용불량자 수는 올 5월 현재 315만명에 달하고 … 이는 고도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또 IMF의 위기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이 절대적 빈곤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은 개인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의하여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헌법의 정신에 따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빈곤층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이 나눔과 공생의 지혜를 넉넉히 발휘하는 일이다”라고 썼다.

공평한 1만 달러가 더 나 

가 진 자와 힘있는 자를 위해 ‘할말은 하는’ 조선일보가 웬일인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족이 붙어 있다. 하기야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득권층은 남들의 빈곤은 무능력 탓이요, 자신들의 부는 능력 덕이라 생각하지 않던가. 그리고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 현행 헌법을 ‘시장 원리’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이들에게 “나눔과 공생의 지혜”는 “일치”하기 싫은 사회적 목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이지, 사회발전이 아니기” 때문에.

‘2만 달러’ 구호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진 않는다. 공평한 분배, 공정한 법적용, 나눔과 공생의 지혜, 빈곤층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가 살아 있지 않다면, 20만 달러 시대가 도래해도 삶의 질은 악화될 따름이다. 더군다나 물신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아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사회라면, 200만 달러를 벌어도 삶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성원 전체의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회적 부의 양적 확대는 결국 부를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나는 소수만 잘 사는 2만 달러 시대보다, 골고루 평등하게 사는 1만 달러 시절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가가 기업의 목적을 이윤추구가 아닌 사회발전에 맞추도록 규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윤이 아닌 인간이, 기업이 아닌 사회가 중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들갑떠는 재계와 수구언론의 거짓말과 달리 IMF 이후 5년 동안 벼랑끝으로 내몰린 집단은 노동자와 서민이지 기업이 아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