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노동사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admin 0 4,867 2013.05.11 11:40

세탁소가 아름다운가? 조금 어안이 벙벙해지는 질문일 게다. 괜히 대답하려고 너무 골몰하지 말기를. 어쨌건 이 영화 속의 친구들, 오마르와 죠니에게는 세탁소가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세탁소 <POWDERS>는 이 청년들이 성장하고 속했던 세계, 대처정부 아래서 갈수록 적어지는 실업수당과 좀스런 범죄로 근근히 버텨내야 했던 빈민촌, 뒷골목의 삶을 벗어나서 같은 시공간 속의 또 다른 영국, ‘영국병’을 벗어 던진 영국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계급, 민족, 섹슈얼리티

movie_01_9.jpg파 릇파릇한 청년 오마르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다. 그는 한 때 봄베이에서 잘 나가는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였지만, 자본주의 영국에서 알콜과 절망에 찌들어 버린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며 너덜너덜한 빈민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백인 펑크족 죠니는 오마르의 아주 어릴 적 친한 친구다. 한 때는 “학교의 영웅”(선생님들의 영웅은 아니었던 듯)이었지만, 지금은 가출을 해서 스킨헤드들과 어울려 여기저기 떠돌며 뒤죽박죽 인생을 산다. 둘이 오랜만에 재회 한 것은 오마르의 아버지 후세인이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 불듯” 술을 들이키는 동안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 챙기듯” 돈을 긁어모은 삼촌인 나세르의 세차장에 오마르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감옥 같은 집에서 탈출했다는 것과 삼촌의 부유한 세상이 마냥 좋은 오마르는 주위 상황을 아랑곳 않고 흐뭇한 미소를 흘린다. 반면, 인종주의 깡패들과 어울려 갈색 피부의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이 멋쩍은 죠니는 먼 시선을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한다.

죠니는 오마르의 꿈에 동참한다. 삼촌 나세르가 오마르에게 맡긴 뒷골목의 구질구질한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대학졸업장으로도 유색인종의 한계를 돌파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오마르, “제 생각에는 더러운 짓을 해야 돈을 벌어요.” 그리고 그는 세탁소를 경영하기 위해 “무서운 살림 아저씨”의 마약을 훔치고, 가정집을 터는 등 흐뭇한 미소가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의 말을 실천한다. “이건 일이야. 더 이상 방황하긴 싫어” 영국을 왜 배신했는지 다그치는 펑크족 친구들에게 죠니는 말한다. 하지만 극우인종주의자들의 거리 행진에서 돌을 들고 소리지르다 어릴 적 잘해주던 오마르 아버지의 눈과 마주친 기억, 서로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던 패거리들과 갈등해야 하는 처지, 그리고 오마르와의 동성애 관계 등은 죠니의 “방황”이 그리 쉽게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뽈록뽈록~♪” 물방울이 오르는 듯한 경쾌한 배경음악이 흐르고, 구질구질한 세탁소를 멋지게 ‘리모델링’해서 오픈하려는 이들의 꿈은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복잡하게 얽힌 노동계급 청년들의 삶의 실타래는 그 꿈이 실현되더라도 좀처럼 풀릴 것 같지가 않다.

갈등들이 연주하는 하모니

어 쨌건, 세탁소 <POWDERS>는 마침내 문을 연다. 바닥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물방울들이 위로위로 솟구쳐, 드디어 뽕 터져 버렸다. 오픈하는 날, 깔끔하고 세련되게 변신한 세탁소 내부에는 클래식이 유유히 흐르고 사람들은 이 청년사업가(오마르)의 예정된 성공을 축하해주기 위해 부산스럽게 오고 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교차하면서 그동안 일상에 짓눌려 숨어있던 갈등의 코드들도 서로 부딪힌다. 세탁소는 떠들썩하지만 오마르의 아버지는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고, 나세르의 큰 딸 타니아는 나세르의 백인 정부 레이챌과 맞닥뜨린다. “남자나 등쳐먹는 것은 질색이에요. 기생충 같은 일 아닌가요?”, “그러는 넌 누구에게 빌붙어 살지? 우리는 서로 세대도 계급도 달라.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네 아버지 밖에 없어.” 죠니도 오마르에 대한 감정의 부침에 못 이겨 세탁소를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새벽, 죠니를 찾아간 오마르, 다툼 후 그들 사이에 오고간 쓸쓸한 대화. “오늘은 최고의 날이었잖아”, “그래…, 거의 최고의 날이었지”

“거의 최고의 날” 이후, 억지로 봉합되어 있던 균열은 크게 벌어져 버렸다. 나세르의 가정은 들통난 부정 때문에 풍지박산이 나버렸고, 레이챌은 나세르를 떠났다. 당돌하고 자기 주장 강한 타니아도 집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죠니는 살림을 구타하던 자신의 옛친구들을 말리다가 크게 얻어터지고 세탁소는 펑크족들에 의해 엉망이 된다. 지친 나세르는 형 후세인을 찾아간다. “이 빌어먹을 나라가 우릴 망쳐놨어. 내 꼴을 봐라,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 “그 나라는 종교로 망해버렸죠. 요즘에는 돈에도 눈독을 들이는 것 같더군요. 그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에요” 평행선을 긋는 삶이지만, 나세르는 형을 통해 위로 받는다. “그만 떠나야겠어. 여기도 내가 있을 곳이 아냐”라고 말하는 죠니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오마르. 영화는 서로 씻겨주다가 물장난을 치는 이 청년들의 웃음위로 “뽈록뽈록~♪”하는 경쾌한 배경 음악이 흐르며 끝이 난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른 영화

1985 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대처리즘 치하, 보수 우경화한 영국 사회에서 유색인종과 노동계급의 일상적 삶의 촘촘한 중심부로 어떠한 환상도 만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의 효시라는 대처리즘이 만들어 낸, ‘영국병’ 환자들의 영국과 ‘건강한’ 영국의 균열이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아름답지 못하도록 만드는지, “최고의 날”에 어떻게 공허함을 불어넣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중심이야기인 남성 청년노동자의 삶뿐만 아니라, 전통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의 삶, 부유한 남성에게 전략적으로 의존하는 늙은 여성의 삶, 동성애자들의 삶 등이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다양하게 풀어져 읽힐 수 있다.

이 는 파키스탄 이민 2세 하니프 쿠레이쉬의 섬세한 극본이 좋은 배우와 감독의 역량과 어우러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볼 때는 덤과 짜증이 하나씩 있다. 덤은 금발로 염색한 젊고 날렵한, 약간은 앳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짜증은 텔레비전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동성애 장면에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변태스런 가위질 때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