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1908∼1914년)

노동사회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1908∼1914년)

admin 0 8,509 2013.05.11 11:34

20세기 초 독점체와 금융과두제의 지배는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선진공업국의 대기업들이 최신 기계기술을 이용해서 급성장을 이룩했고, 외연적 생산을 집약적 생산으로 전환시켰습니다. 흐름 생산방식이나 컨베이어 방식의 도입과 테일러 시스템과 같은, 당시로서는 최신 노동조직체계를 채택함으로써 노동생산성과 착취율이 두드러지게 증가한 것이죠. 노동시간 단축을 목표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1910년께 광공업 부문의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미국의 경우 54시간, 유럽의 경우 60시간이나 되었죠.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8시간 노동일을 향한 국제적인 노동자투쟁은 생활의 질 개선을 위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여가의 권리를 위한 요구, 문화 향상을 위한 권리 요구의 성격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여성과 연소노동자의 노동일 규제, 아동노동 금지 등 다른 사회적 요구들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한편,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실질임금의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실질임금 변화의 동향이 노동생산성 변화를 밑돌았던 것이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감소했고, 반면에 착취율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나라별로 자본주의 발전이 불균등하게 이뤄짐에 따라 각국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큰 격차를 보였고, 또 한 국가의 노동자 내부에서도 현저한 격차가 생겼습니다..

주기적인 경제공황도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특별히 심각한 영향을 끼쳤죠. 1907∼1908년 발생한 공황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점체의 공격이 강화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1908년 미국의 유에스스틸사(U.S. Steel Corporation)는 노동자 4만5천 명을 감축하고 임금을 22% 삭감했죠. 수많은 기업들이 이와 비슷한 조치들을 취했고, 그 결과 실업이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대량실업 사태는 노동자계급을 큰 고통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독일에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sooya_01_10.jpg제 1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독일 노동운동의 주요 과제는 선거제도 개혁이었죠. 불합리한 선거제도, 특히 프로이센의 선거제도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역량 약화에 악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회민주당은 1908년 주의회 선거에서 59만 9천 표를 얻었지만 의석은 단지 6개밖에 차지하지 못했어요. 불합리한 선거법 규정 때문이었죠. 한편, 작센에서는 1908년에 실시된 선거법 때문에 투표 자격이 노동자들에게 불평등한 상황이었음에도 사회민주당이 승리했어요. 이를 통해 선거법 개혁을 향한 요구가 한층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군국주의적 억압이 강화되고 지배세력이 현존 제도를 악용하거나 유린하는 행위가 잦아질수록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더욱 큰 의의를 갖게 되었죠. 1908년 독일에서 결사와 집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안은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회 개최를 제한했고, 경찰이 사회민주당의 선동활동을 방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또 18세 미만의 청년이 정치단체에 가입하는 것과 정치집회에 참가하는 것도 금지했죠. 게다가 노동조합 활동에도 적용되어서 단결권과 쟁의권까지도 침해했어요. 이런 정세 때문에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의회활동과 선거투쟁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편, 1908∼1909년 무렵의 파업투쟁은 퇴조를 보이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맨스펠트 지역에서 광부 1만여 명이 참가한 파업이 발발했어요. 이 파업은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맨스펠트의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군대 출동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6주 동안에 걸쳐 파업을 전개했죠. 비록 이들의 요구조건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리를 강력하게 요구한 이 투쟁은 독일 노동운동에서 대중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형을 연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910년 들어 독일 노동운동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1910∼1913년 기간에 일어난 파업 건수는 1908∼1909년 기간의 그것에 비해 연평균 60%가 증가했고, 파업 참가자 수는 200%, 1인당 노동손실일수는 180%로 늘어났습니다. 또 파업이 이전에 비해 훨씬 격렬하고 장기적 성격을 띠었죠.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파업의 특징은 노동자와 노동자 조직들이 자신의 기본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경제적 요구뿐만 아니라 기업질서 민주화 요구까지도 강하게 제기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 성격을 띤 파업이 이전보다 증가했고, 이 시기의 파업은 시위, 항의집회와 병행해서 전개되었죠. 그리고, 시위와 집회는 전반적으로 정치적·민주주의적·반제국주의적 경향을 띠었습니다.

1910년 봄, 강력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직장폐쇄로 노동자 조직에 공세를 취하려 했던 자본가들의 모의가 도리어 16만 명이 넘는 건축노동자의 저항으로 귀결된 것이죠. 이 파업은 4월부터 6월까지 계속됐고,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 9월 들어서 물가가 급상승하고 국가권력과 자본의 공세가 격화되자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에 따라 노동자와 경찰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죠. 1911년에는 내용이 매우 부실한 보험법안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이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투쟁은 선거법 개혁투쟁과 맞물려 진행되었죠.

1913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공황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이에 따라 생활의 곤궁에 따른 불만이 커지고 노동자계급의 대중행동이 더욱 증대했죠. '혁명 전야'를 방불하게 하는 정세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 제기되었던 개혁의 달성과 민주주의적 임무, 특히 반전을 목표로 한 투쟁들은 민중의 절실한 요구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투쟁들이 노동자조직의 강화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동맹세력의 결집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죠.

영국에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1908∼1909 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파업은 그 후의 폭발적 투쟁을 준비하는 기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08년 최대의 투쟁은 랭카셔 면방노동자 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그리고 동북부 연안지대의 조선노동자와 기계공들의 파업이었죠. 이중에서 특히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은 같은 해 의회에서 광산노동자의 8시간 노동일법 채택을 이끌어낸 전국광산노동자연맹의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죠.

1910 년대 들어 파업투쟁은 더욱 강력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1910년에는 뉴캐슬 철도노동자, 클라이드와 타인의 조선소 보일러 제조공, 버어밍엄의 금속노동자, 남 웨일즈의 광산노동자 등이 파업을 벌였죠.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서 파업노동자들의 검거를 자행했습니다.

1911년 8월에는 철도노동자의 전국적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바로 '리버풀의 학살'이었죠. 리버풀에서 발생한 파업 와중에 경찰과 군인들이 철도노동자들의 집회를 강제 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심한 충돌이 일어나 수백 명의 노동자가 다쳐 병원에 실려 간 것입니다. 이런 유혈 사태를 목격한 운수노동자와 철도노동자들이 즉각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파업은 점차 다른 도시로 번져나갔고, 14만 8천 명을 포괄하고 있던 철도노동조합의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총파업에는 처음 이틀 동안 23만 명 가량이 참가했죠. 원료와 자재의 수송이 멈춰버렸고, 많은 기업들이 작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파업을 해산시켰습니다.

1912년에는 최저임금보장에 관한 요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서, 탄광노동자의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탄광 노조들에 조직된 노동자는 80만 명에 이르렀죠. 결국 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지시키기 위해 그다지 충실하지 못하긴 했지만, 최저임금법을 제정해야 했습니다.

1913 년 8월부터 1914년 1월에 걸친 더블린 파업은 세계대전 이전 시기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벌인 투쟁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죠. 1913년 8월 더블린 전차노동자들이 직장폐쇄에 항의해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철도노동자, 마차꾼, 건축노동자 등이 파업의 물결에 합류했죠. 8월 31일에는 파업노동자들이 경찰·군대 병력과 충돌을 빚어서 노동자 두 사람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죠. 이 사건은 이후 노동자들이 무장조직(아일랜드 시민군)을 편성하고, 아일랜드 공화제와 노동해방을 투쟁목표로 내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더블린 파업은 결국 영국노동조합회의(TUC)의 중재를 통해 기업 측과 타협하는 것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국에서 몇 년 동안에 걸쳐 제기된 파업들은 경제적인 요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죠. 그리고 임금문제를 둘러싼 파업일지라도 최저임금제 확립으로까지 요구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파업에서 제기된 사회적·정치적 요구들을 살펴보면, 철도·토지·광물자원·탄광·운하의 국유화요구, 보통선거법의 실시와 선거비용의 국가부담, 노동자의 주택조건 개선, 휴일 유급제 요구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중적 노동운동이 고양되고, 사회주의 경향이 증대하며, 근본적 개혁을 달성하고자 하는 노동자투쟁이 강화되는 흐름은 영국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제·사회·정치 개량을 실현하기 위한 영국 노동자들의 이러한 투쟁은 반자본주의 투쟁을 충전하는 것이었고,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투쟁을 준비하게 만드는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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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탄공장에서 일하는 영국 노동자들(1916년) ]

프랑스에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프 랑스에서 1910년대 초에 일어난 노동자투쟁들은 '억압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숨겨진 증오'가 축적되어 주기적으로 '돌발적인 힘으로 뿜어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할만합니다. 프랑스는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이 강하게 존재했죠. 하지만,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시행착오들은 정당조직과 노동조합조직 사이의 활동분야의 분할과 대립, 개량주의와 생디칼리즘의 영향력 등 프랑스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조합운동 내의 일반적 상황과 깊이 관련된 것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현실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조직노동자가 100만 여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60만 명 가량이 프랑스 노동총연맹(CGT)에 가입해 있었죠. 당시 노동총연맹 지도부는 계급협조주의를 강조하면서 노동쟁의의 평화적 해결을 통한 실리를 추구했습니다. 이의 역작용으로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반응과 노동자대표의 의회활동을 비롯한 정치행동 일체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일관하는 생디칼리즘이 대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범한 노동자층은 개량주의적 투쟁 자제와 생디칼리즘 모두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죠. 이것은 일상적인 투쟁 속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1908 년∼1909년 기간 동안 파업건수는 감소했지만 파업 참가 노동자 수는 오히려 증가했죠. 1909년 봄에는 우편전신노동자의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국가공무원들에게까지 파업의 기반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업은 파리에서 먼저 일어나서 여러 지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리용처럼 우편직원 1천3백 명 가운데 1천1백 명이 파업에 참가하는 지역도 있었습니다만, 이 파업은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909년에는 건설, 섬유, 금속, 피혁 업종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파리 건축노동자들이 파업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10∼1911년의 파업은 1908∼1909년 보다 더 활발했습니다. 파업건수에서 40% 증가, 파업참가자수에서 90% 증가, 노동손실일수에서 70% 증가를 보였죠. 이 시기 파업들에서는 건축노동자들이 특별히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이 파업은 지도부의 생디칼리즘 경향에 따른 '직접 행동' 전술의 잘못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그 뒤 몇 년 동안에는 파업이 두드러지게 감소했어요.

1912∼1914년 기간에 일어난 파업의 주요 부대는 광산노동자들이었습니다. 1912년에는 프랑스 광산노동자의 2/3 가량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8시간 노동일과 최저임금제, 연금보장의 개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다른 부문에서도 파업이 일어났죠. 1912년 6월에는 항만노동자들이 파업을 제기했고, 1913년에는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 4천 명이 테일러 방식의 노무관리 방식에 반대하여 1개월 반에 걸쳐 투쟁을 벌였습니다.

1912년에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민중이 참가한 악법 반대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 투쟁은 정부가 파업을 조직하고 반군국주의 선전활동을 하는 노조활동가들을 이 법률로 억압하려 한 데 대한 대응이었어요. 1913년에는 병역기한 연장 법안에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났는데, 노동자들이 이 투쟁의 선두에 섰고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했죠. 전국적으로 항의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고 법안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투쟁을 통해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농민들 사이에 강한 연대감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노동조합운동과 정당간의 관계 문제, 개량주의와 생디칼리즘이 빚은 노선상의 혼란, 각 조직간의 상이한 지도방침 등으로 투쟁은 목표를 이루는데 한계를 보였습니다.

미국에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1909 년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에서도 파업이 폭넓게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집단적 작업거부도 법률상 기업가의 소유에 손해를 입힌 위법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재판소 명령'은 파업이나 태업을 금지했어요.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투쟁을 중지하거나 아니면 다른 데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죠. 1912년에는 노동쟁의를 조사하고 조정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노동관계위원회가 설립됐습니다. 그 뒤 중재와 조정 역할은 1913년에 설치된 노동부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같은 시기에 정부는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기 위해 사회 입법에서 몇 가지 조치를 취했죠. 예를 들면, 많은 주에서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의 사용을 제한했고, 건강에 유해한 작업의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으며, 국가공무원의 8시간 노동법과 임금관계에 관한 법률이 도입되었습니다. 1912년에 집권한 민주당의 W. 윌슨 대통령의 정책, 특히 사회입법은 개량주의적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는 기본법 질서와 법규를 위반하는 노동자들을 엄격히 다스렸죠. 한편 자본도 오픈숍(open shop) 압력이나 '아메리카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조직의 권리를 공격했어요.

'심각한 사회적 반란'으로 불린 1909∼1914년 기간의 파업은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과 자본의 첨예한 대결을 반영했습니다. 1909년에는 U.S. 스틸사가 노조를 공격하고 임금을 인하하고자 했던 기도에 대항해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 파업은 14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나 결국 노동 측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죠. 1911년에는 시카고의 철도노동자와 일리노이주 남부 및 서부의 철도노동자가 파업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1912∼1913년에는 웨스트버지니아의 광산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승인할 것과 중부지역의 통일광산노조가 획득한 것과 동일한 노동조건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며 장기파업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투쟁들은 미국노동조합총연맹(AFL) 지도부가 반독점 투쟁을 감행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죠.

AFL은 1910∼1914년에 150만 명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조합원을 포용했어요. 하지만 AFL은 미숙련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지 않았으며, 이민노동자나 흑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결국 AFL 지도부는 미국 노동운동을 분열시켰죠. 조직화를 어렵게 했고, 계급협조의 '현실적 정책'을 펴게 됐지요. 세계산별노동조합(IWW)은 AFL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행동에 대항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 전투적인 국제주의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에 대한 비타협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했어요. IWW은 목재산업과 농업, 서부지역 광산과 동부 지역 섬유공장의 저임금노동자들이 결행한 파업들을 지도했고, 이런 파업들은 때로 매우 격렬한 양상을 띠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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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미국의 파업파괴자 ]

1914 년에 콜로라도에서는 광산노동자 9천 명이 참가한 15개월 동안 계속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 파업은 미국 노동자 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건입니다. 파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파업노동자와 회사측의 무장보안대, 주 민병대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했죠. 이 사건의 영향으로 파업노동자들은 회사 소유의 사택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산에서 천막을 치고 지냈는데, 1914년 4월 20일, 민병들이 파업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던 텐트에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해 여러 노동자들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흥분한 노동자들은 무장을 하고 마을을 점거해서 광산설비를 불태워 버렸죠. 이후 광산노동자와 군대 사이의 충돌은 1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훗날 '러드로우의 학살'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한편, 윌슨 대통령은 이 파업에 군대를 동원했죠. 그리고 정부가 조정역을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타협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했어요. 결국 힘에 밀린 노동자측이 패배했습니다만, 이러한 노동자들의 패배가 긴장관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죠.

이탈리아에서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sooya_04_8.jpg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이탈리아 노동자 대중투쟁의 전개는 심한 기복을 보였습니다. 1908∼1909년의 시기에는 후퇴 국면을 보였지만 1910∼1911년에는 고양됐죠. 그리고 이탈리아만의 특수한 요인 몇 가지가 노동자 투쟁의 전개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남북문제', 토지문제, 이탈리아 제국주의 발전의 특수성, 지올리티(Giolitti) 노선과 1911∼1912년 터키와 벌인 전쟁 등이었습니다. 또 여기서도 개량주의와 생디칼리즘의 대립이 노동운동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죠.

1908년 팔마 지역에서는 생디칼리스트들이 주도한 농업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있었습니다. 이 파업은 3만여 명의 농업노동자들이 참여해서 2개월 동안에 걸쳐 진행되었고, 군대와 경찰 투입으로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파업의 패배가 투쟁의 전반적인 후퇴를 가져왔죠.

1910∼1911 년부터는 파업투쟁이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파업투쟁의 격화는 복잡한 상황 아래서 진행되었는데, 1911년 '지올리티 자유주의 시대' 마지막 단계에서는 노동자대중이 사회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을 행하기도 했죠. 같은 시기, 이탈리아 제국주의자들은 민족주의와 배외주의 선전 활동을 강화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계급적 통일을 호소하면서 아프리카에 있는 터키 영토 탈환을 목적으로 리비아 전쟁을 일으켰죠.

전쟁 준비가 강화되고 전쟁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1911년 9월27일에는 반전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 와중에 노동자들은 경찰, '애국적 행진'을 조직한 민족주의 그룹과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전쟁이 기정 사실로 인식되면서 우파 개량주의자들은 전쟁 변호에 열을 올렸죠, 그리고 '좌익 개량주의자들'은 우파의 주장에 반대하긴 했지만, 우파와의 통일 유지의 필요를 강조하면서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생디칼리스트들은 반군국주의 노선을 견지했습니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반전운동은 아프리카에서 자국의 군대가 약탈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투쟁은 군용화물의 수송에 반대하는 항의집회와 시위, 반전 선전과 선동, 병역거부, 탈주 등의 형태를 취했죠. 토리노와 밀라노가 전쟁반대 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고 젊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주도했습니다.

한편,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독점체의 압박이 강화되고 중부의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이 격화되면서 점점 확대되고 완강해졌죠.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요구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에 대한 권리침해, 군국주의 폭력행위에 항의했습니다.

1912∼1913 년에는 토리노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의 95일에 걸친 파업투쟁(1913년)과 밀라노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대중운동은 빠르게 성장했죠. 그리고, 임금문제나 실업문제뿐만 아니라 민주화에 관한 문제나 기업 내부 질서의 문제, 노동조합의 권리문제 등에 관한 요구들까지도 강하게 제기했죠.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의 유지, 발전을 위한 투쟁의 전위로 등장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은 반군국주의 투쟁 또한 더욱 강화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최대의 반군국주의 투쟁 중 하나였던 '적색 주간'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1914년 6월7일 반동세력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가 진행됐는데, 이 와중에 군인이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를 해서 노동자 두 명이 죽었고, 이 사건으로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농민과 도시 중간층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자연발생적인 행동들도 빈번하게 일어났죠. 파업노동자들은 무기를 탈취하여 관청 건물을 포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색 주간'은 이탈리아의 정치위기를 초래했고, 노동운동의 통일된 지도역량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확인시켜줬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