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혁신자치제와 진보정치

노동사회

일본의 혁신자치제와 진보정치

admin 0 4,883 2013.05.11 11:31

3김의 지역분할 정치구도가 깨지면서 한국정치는 새로운 전환기에 놓여있다. 독재 정권을 뒷받침했던 각종 제도가 허물어지고 국민대중들의 민주, 평등, 권리 의식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대중의 개혁·진보적 요구와 열망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치현장은 보수 정치권의 각축장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민주화 이행기로 접어든 한국사회의 정치 발전과 실제적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루기 위해서 진보세력의 제도 정치권 진출은 시대적 요청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은 꾸준한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의 커다란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놓여있다. 

전환기에 접어든 한국정치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승자독식’(all-or-nothing)이라는 잘못된 선거 제도, 국가보안법과 반공주의라는 사상·이념적 폐쇄성 등 여러 가지 제도적 한계 등이 지적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변화된 상황에 조응하는 진보세력의 정책대안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집행능력의 문제라 할 것이다. 국민들은 진보세력을 비판세력으로는 높게 평가하지만,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보세력의 대중적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한편, 진보 이념을 이상이 아닌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정책과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글은 일본의 ‘혁신자치제’운동을 다룬다. 1960~70년대 일본 정치과정과 민주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친 혁신자치제 운동은 ‘정권교체 없는 정책전환’이라 불릴 만큼 일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당시 성장위주의 국가발전 전략에 대항하여 환경과 복지, 분배로 지방자치 전략을 전환시키자는 운동이었다. 

한국은 1991년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를 비롯한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지방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정치를 둘러싼 많은 정책대안 및 주장과 지방정치를 비교한다면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세력의 지방자치 전략 및 모범활동 사례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 혁신자치체의 정책 및 활동을 검토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혁신자치제란 무엇인가

일본에서 혁신(革新)이란 보수(保守)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1950년대에 등장한 말이다. 1948년 미군정의 전후 개혁이 역(逆)코스(reverse course)현상과 함께 다시 보수 반동의 길로 접어들자, 이러한 보수정권의 궤도 수정에 반대하는 주장과 운동을 상징하는 용어로 등장하였다. 혁신자치제 또한 이와 같은 ‘혁신’이라는 용어에 담겨 있는 상황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지방자치제도의 수장 즉, 도도부현(都道府縣)의 지사나 시정촌(市町村)의 장(長) 선거에서 당선된 자가 보수 자민당 계열이 아니라, 독자적인 혁신정당 또는 혁신정당의 연합이나 지역의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의 연대를 통해 지지 추천되고, 주민에 의해 선출되어 지역의 공동 목표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활동을 말한다.

혁신자치제의 성립 시기는 일반적으로 1963년에 실시된 제5회 통일지방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치선거에서 보수는 “산업우선·국직결(産業優先·國直結)”을, 혁신은 “복지우선·주민직결(福祉優先·住民直結)”을 슬로건으로 하여 맞붙었는데, 이 선거에서 요코하마, 교토, 오사카, 키타큐슈의 4대 도시와 전국의 78개 도시에서 혁신시장이 탄생하였다. 연이어 1964년에는 혁신시장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나중에 정책집단으로 성장한 전국혁신시장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67년 제6회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수도인 동경에서 사회, 공산당의 추천으로 미노베(美濃部) 혁신시장이 탄생하였고, 그 후 1972년에는 전국의 7개 도도부현, 134개 시, 106개의 정촌에 혁신계의 수장이 이끄는 자치제가 나타났다. 혁신시장이 이끄는 도시인구는 3천 440만으로 도시 전체 인구의 43.5%에 이르는 것이었다. 혁신자치제의 규모와 변천은 전국혁신시장회에 가입한 시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표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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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혁신지자체가 추구한 주요 정책 방향과 활동 기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주민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산업기반정비 정책에 반대해 주민운동의 육성에 도움을 주었다. 둘째, 도시생활에서 희생되었던 노인·아동·심신장애자의 구제책을 강구하였다. 셋째, 시빌 미니멈(シビル·ミニマム)을 책정해 그것을 도시공간에서 체계화하는 과학적인 행정을 했다. 넷째, 행정정책 결정과정에서 직원참가, 주민참가의 방식을 도입하였다. 다섯째, 전국혁신시장회의를 결성하여 정부의 신중앙집권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지방자치권의 확충에 힘썼다. 즉, 이들은 정책내용과 실행에서 이전 지방자치제와는 달리 주민복지, 시민참가, 자치권 등을 주되게 내세웠다.  

이와 같은 혁신자치제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함께 운동 주체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2차 대전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시행된 일본의 산업개발 정책과 도시정비 계획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공해, 소음, 교통난, 복지시설의 부족, 도시지역의 과밀과 농촌지역의 과소현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산업화와 지역개발은 주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개발에서 발생한 이익은 재벌과 소수 관료 및 정치인에게 돌아갔고 여기서 표출된 주민들의 불만으로 주민들은 정부와 재계, 자민당 등과 갈등관계 놓였다. 즉, 주민을 배제하고 기득권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산업화는 주민들의 권리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주민들에 의한 정치의 직접참여 요구를 분출시켰다. 이와 같은 객관적 상황변화가 1960년대 안보투쟁이후 당세를 확장하고자 했던 사회당 등 혁신정당들의 지역공략 정책과 연결되고, 대중조직이었던 시민운동·노동운동 세력과 결합하면서 혁신자치체로 표출되었다. 

공무원노조가 중심이 된 가와사키(川崎)시 혁신자치체

여기에서는 1971년부터 2002년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혁신자치체를 운영한 가와사키시 혁신자치체의 설립과정과 정책을 살펴본다. 가와사키(川崎) 혁신자치체는 그 주도 세력이 지방공무원 노동조합이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에 주는 함의가 크다.  

가와사키시는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인구 120만의 공업도시로, 도시바(東芝), 일본 강관(NKK)과 같은 유명한 대기업뿐만 아니라, 도쿄의 시나가와구(品川區)에서부터 연속되는 마찌고바라고 불리는 작은 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곳이다. 전후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였고, 1960년대 말까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공해도시의 하나로 유명한 곳이었다.   

지방정치를 보면 자민당 중심의 친기업 성향의 보수권력이 오랫동안 지배한 도시였다. 자민당의 가나가시후지타로(金刺不二太郞, 1971년 당시 75세)는 1928년부터 시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46년에 최초로 시민투표에 의해 시장으로 당선되어 1971년까지 시장을 7기, 25년 동안 역임한 보수정치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산업중심의 보수정치가 바뀐 것은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후보인, 시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출신 이토 사부로(伊藤三郞)가 시장으로 당선된 후부터였다. 

가와시키시에서는 1960년 이후에 정치질서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63년의 제5회 시장선거에서 혁신세력이 보수세력의 표를 압도하였다. 사회-공산당 후보의 표를 합치면 10,000표 이상이 차이가 났다. 둘째, 중의원선거에서 보수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혁신정치가 매우 강하게 표출되었다([표2] 참조). 셋째, 사회-공산당(社共) 분열이 가와사키 시민들의 변화 욕구를 실현하지 못한 중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지방정치 환경의 변화 속에서 가와사키시 공무원노조는 지방행정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은 지방 행정의 수장인 시장을 혁신세력으로 교체하는 것이며 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사공연합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을 1971년 선거에서 추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공연합은 공무원노조를 비롯한 지역 노조운동의 압력으로 실현되었으며, 선거의 후보자는 가와사키시 직원노조의 위원장 출신인 이토 사부로로 결정되었다. 

후보 확정 그리고 사공연합의 추천 그리고 시민단체의 협력을 이끌어냈던 주역은 시직원노동조합연합회(市勞協)이었다. 시노협은 1956년 33개 조합, 42,684명으로 결성되어 1970년 당시 160개 노조, 조합원 94,248명으로 가와사키시 조직노동자의 40% 이상이 가입되어 있었다. 단위노조는 임금투쟁 등 회사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시노협은 조직 결성 당시부터 지역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어왔다. 결성당시 시노협의 5대 기본방침 가운데 3항은 “노동자와 함께 지역주민의 생활전반과 복지활동에 걸친 문제에 관한 운동을 전개한다”고 천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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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흰 구름’을 위한 정치

이토 사부로로 후보를 단일화한 가와사키시의 혁신세력들은 “밝은 혁신시정을 만드는 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사회당, 공산당, 시노협, 의료생협, 민주적 청년단체, 부인단체, 상공단체, 법률단체 등 진보적인 시민사회 단체를 망라한 것이었다. 이들은 3,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선거운동 발대식을 갖고 다음과 같은 정책협정 내용을 발표하였다. ① 대자본가 봉사, 중앙직결, 시민부재의 자민당 시정과 싸우고, 청결·성실·민주적인 혁신시정을 실현한다. ② 공해를 발생부터 방지하기 위해 공해방지조례의 제정을 지향하고 기업과의 공해방지협정을 개선한다. ③ 시 전체의 녹화 추진, 자연 보호, ④ 물가상승과 중세를 중지하고, 소비생활을 보호한다. ⑤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지키고 중소기업의 경영의 안정을 도모한다. ⑥ 교육, 문화, 스포츠의 민주적 발전, ⑦ 시민의 자치권을 지키고 시민과 시 당국과 대화의 장을 제도화한다. ⑧ 일미안보조약을 폐기하고, 오키나와 전면반환을 위해 힘을 다한다. ⑨ 헌법개악 반대, 평화적 민주조항의 완전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또한 협정에는 도시헌장의 제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헌장에는 첫째, 시정에 대한 시민의 직접참가의 기회를 늘리고 시정을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선한다. 둘째, 시직원의 창의·열정·능력을 시민을 위한 봉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동조건과 행정기구를 개혁한다. 셋째, 오직(汚職),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투명한 시정을 실현한다. 넷째, 경륜, 경마사업을 폐지하기 위한 지원을 정부에 요구하는 전국적인 운동을 조직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토 사부로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기본정책으로 ① 인간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주민복지자치를 수립한다. ② 모든 시민의 영지(英智)를 지자체에 결집하여 품격 있는 가와사키시를 건설한다. ③ 주민복지와 품격 있는 시를 만들기 위해, 지자체의 기능과 운영의 재배치를 착수한다 등을 선언하였으며, ‘푸른 하늘 흰 구름’를 공식 선거 구호로 확정하였다. 선거 결과는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이토 후보가 225,073표로 177,918표의 가나사시 자민당 후보를 큰 차이로 눌렀다.  

주민직결로 보수세력의 포위를 돌파해  

이토 후보의 당선으로 가와사키시의 정치질서는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자본-시장-의회’로 이어진 보수연합에서 ‘노조-시장-시민단체’의 연합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시장의 당선만으로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은 바뀌었지만 의회는 여전히 보수세력에 의해 지배된 상태였다. 이런 정치상황을 혁신 수장들은 “후지산의 정상에 헬리콥터로 내렸더니 적에 포위되어 있었다.”, “낙하산을 타고 혼자서 적의 진지에 내린 기분”이라고 표현하였다. 수장이 혁신화하는 경우에도 의회의 과반수는 보수계 의원에 의해 장악되었던 것이 일반적으로 혁신자치체의 현실이었다.

가와사키 혁신자치체도 다른 혁신자치체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 시장은 당선 후 첫 번째로 공해문제 해결을 위해 공해부를 공해국으로 승격시키려 했으나 시의회는 시장의 기구개편안을 거부하였다. 또한 1972년 시장으로부터 시의회에 제출된 “녹화계획안”, 1973년의 “시민헌장”이 의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주민과의 직접대화와 압력을 시정(市政)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요코하마시의 “일만인 집회(一萬人 集會)”, 동경 미노베 시장의 “도민과의 대화” 등이 혁신자치체의 취약점을 극복하는 주민직결(住民直結)이라는 방법의 사례였다. 결국 가와사키시에서도 초기 보수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의 반대는 다른 혁신자치체와 마찬가지로 주민과의 직접대화의 방법과 시직원노조의 도움으로 극복되어 갔다. 

이렇듯 혁신자치체 정책의 첫째 특징은 지방정치에 있어 직접 민주주의의 도입이다. 주민들이 시장과 의회에 대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것에 덧붙여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제도가 도입되었다. ① 직접청구권, 직접청구권을 기반으로 한 감사청구권과 청원권, ② 주민의 동의제도, ③ 시민참가제도 등이다. 또한 시민들의 참여로 시를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민감시활동’, ‘외국인 시민회의’, ‘어린이권리 조례’ 등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러한 주민참가의 확대는 권위주의적 지방정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적 사회체제를 만들어 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공개성, 개방성을 강조한 혁신자치제의 정책은 이렇게 주민들의 참가에 의한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둘째,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국가전략에 맞서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복지’를 ‘구호’가 아닌 행정으로 실현하였다. 먼저, 환경 분야에서 ‘푸른 하늘 흰 구름’이라는 선거 슬로건을 실현하기 위한 각종 환경규제 장치와 개선 작업이 추진되었다. ① 지역환경기준을 독자적으로 설정하여 이를 단계적으로 달성하였다. 가와사키의 환경기준은 일본 중앙정부의 기준보다 엄격한 것이었다. 예컨대 가와사키의 아황산가스, 질소화합물의 목표치는 0.02ppm이지만 중앙정부는 0.06ppm이다. ② 1973년 12월에는 ‘가와사키 공해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를 통해 시당국은 공장이나 발전소 등에서 발생하는 공해물질의 양과 종류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와 억제책을 조사·연구하고 있다. ③ 1974년 9월에는 대기오염, 수질오염 등에 의해 생긴 건강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공해건강피해보상조례”를 제정하였다. 가와사키시에서는 공해피해자의 건강회복을 위한 전지요양, 호흡기능 훈련, 공기청정기의 지급, 버스 무료승차권의 교부, 공공주택 우선입주조치와 같은 보호 및 구제작업을 하고 있다. ④ 1976년에는 환경평가 조례가 만들어졌다. 이제까지의 공해대책이 주로 피해보상, 기존의 공해 발생원 억제에 주력하고 있었다면, 환경영향평가 조례는 공해방지를 위한 예방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런 환경정책을 통해 가와사키시는 대기오염, 수질오염 등 ‘산업형 공해’를 거의 통제하고 소음, 진동, 생활하수, 쓰레기 처리 등 ‘도시형’ 생활공해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애를 낳을 때면 강을 건너 가와사키에서, 죽을 때도 가와사키에서”

복지제도의 확충은 혁신자치제의 또 하나의 중요 정책이었다. 이러한 혁신자치제의 복지정책은 ‘시민 생활을 최우선으로 한다’ 는 혁신자치제의 철학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성장 주도의 산업화 정책에서 소외된 주민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이 도입되었다. ① 탁아소를 설립하여 보육행정을 개편하였다. 당시 일본 혁신정당들의 구호는 “우체통만큼 어린이 집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현실화하였다. 1988년 당시 6세 이하의 어린이를 기준으로 하면 어린이 700명당 1개의 보육원이 존재하고 있고, 시 전체에 110개의 탁아소에서 1만 명의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다. 탁아소 운영의 특징은 탁아비용을 경제능력에 따라 차등 분담한다는 점이다. 가와사키시에서는 부모의 경제능력을 25단계로 구분하여 비용을 달리 분담하며, 둘째 자녀부터는 비용의 70%만 부담하면 된다. ② 장애인 의무고용제 등을 통해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확대하였다. 1983년부터 시직원 중 장애인고용 목표를 3%로 정하여 솔선수범하고 있다. ③ ‘근로시민실’을 운영하여 노동에 관련된 주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노동관련 주민서비스의 창구인 근로시민실은 1988년에 발족했으며 근로자 복지시설인 노동회관을 관리한다. 1992년 당시 근로시민행정의 예산 총액은 10억 1,315만 4천엔으로 시 전체 예산의 0.1%에 해당한다. 가와사키시의 노동 행정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 전통적인 산업의 직인직 기능인, 고령자, 장애자, 여성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사용자에 대한 교섭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에 종사하는 피고용자의 노동조건 보호이다. 이를 위해 시당국은 기업내 복지제도의 수혜권 밖에 있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가와사키시 근로자 복지공제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④ “고령사회를 향하는 평생복지의 체계화”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종합보건체제를 구축하여 성인건강진단을 40세부터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노인보건의료제도에 의해 70세 이상의 노인은 외래의 경우 월 800엔 만을 자기 부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체제의 구축은 “애를 낳을 때면 강을 건너 가와사키에서, 죽을 때도 가와사키에서”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혁신 정당 분열이 선거 패배의 원인 

197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혁신자치제는 점차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지방정치는 과거의 혁신수장에 대신하여 고급관료, 보수계 출신의 수장들이 득세하게 된다. 1978년 요코하마시와 오키나와시에서, 1979년에는 동경, 오사카, 교토에서 혁신 벨트는 무너져 내리고 자민당은 선거에서 민사, 공명, 신자유클럽 등과의 제휴를 통해 실지(失地)의 회복에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현 재 혁신자치체는 일본 자치제에 존재하지 않으며 지나간 과거사의 일로 취급되기도 한다. 주민과 혁신세력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지방자치 모델을 창출하였던 혁신자치체는 왜 실패하였는가? 석유위기와 예산적자, 뿌리깊은 보수주의, 정당간 연합 실패 등 객관적 요인이 지적되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결정적이다.  

첫째, 역설적이지만 혁신자치제의 정책 및 프로그램의 성공은 혁신자치체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 혁신자치제가 운영하였던 많은 정책과 프로그램들이 자민당이나 중앙정부, 보수단체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제도화되었다. 혁신의 장점이었던 ‘시민복지’는 보수의 ‘따라잡기'로 퇴색하고 말았으며, 어려워졌던 재정 압력 밑에서 혁신자치제가 호소력 있는 신선한 정책을 제출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 결과 ‘혁신’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진영의 경계선은 모호해졌다. 결국 혁신세력은 ‘혁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 못한 채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둘째, 지방의 관료기구는 혁신자치제 하에서도 여전히 보수세력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이는 보수세력 반격의 물질적 힘으로 작용하였다. 일본의 정치학자들은 60~70년대 혁신시장의 등장을 “진흙에서 학(두루미)이 나왔다”고 평가할 정도로 혁신자치체의 기반은 취약한 것이었다. 더욱이 주민직결을 통해 힘을 결집하였던 혁신자치제는 70년대 말 주민들의 저조한 투표율에서 비롯된 지방정치의 탈정치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셋째, 혁신정당의 분열과 연합공천의 실패이다. 사공연합과 시민단체의 결합으로 탄생한 혁신세력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연대의 정신을 훼손한 사회당과 공산당의 분열 상태에서 선거를 맞이하였다. 마지막 혁신자치제라고 할 수 있는 가와사키시의 2002년 선거 패배의 주요 원인은 다름 아닌 혁신세력의 분열에 따른 연합공천의 실패이다.    

많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혁신자치제 사례는 한국의 정치 개혁과 지방자치 운영에 많은 시사점을 제기한다. 진보세력이 지향하는 지방자치 모델은 무엇이며, 이를 실현하는 방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진보세력은 변화하는 국민대중의 요구와 바램을 진보정당에서 그리고 지방정치에서 구현하고 있는지 심각한 자성을 요구하고 있다. 또 다시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자치 선거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