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한 생각

노동사회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한 생각

admin 0 3,705 2013.05.11 11:23

최근에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사실 얼마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덜란드 모델, 일명 폴더 모델의 내용이 무엇인지 거의 몰랐다. 그러다가 청와대 정책실장의 언급 이후 연일 이에 대한 온갖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찬성하는 편이나 반대하는 편이나 모두 네덜란드 모델의 여러 측면을 속속들이 알고 찬성 혹은 반대한다기보다 일부 특징적인 요소들만을 떼어서 이 모델이 “우리 편”에 유리한가 아닌가를 성급히 판단하고 곧바로 치열한 논쟁에 돌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런 방식의 논쟁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찾는데 귀감이 되는 어떤 모델을 생각해 보자고 제의한 것이라면, 좀 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연구한 끝에 의견을 제시하고 또 그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복지 시스템부터 이해해야

우리 사회에서 네덜란드 모델의 논의가 그렇게 급격하게 진행된 데에는 물론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긴급한 처방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모델은 “높은 성장률과 완전고용에 가까운 기적”과 같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실제보다 매우 과장된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연 그런 기적 같은 모델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 모델을 배워서 잘 적용하면 심각한 사회·경제 문제들을 해소하고 안정과 번영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만병통치약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고, 최근의 네덜란드의 경기침체 상황을 근거로 이 모델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맞는 일일까? 네덜란드 모델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꿈일까?

우리가 어떤 모델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를 살펴본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 맞는 우리의 모델을 만드는 데에 참고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한 전제는 그 모델이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 모델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 속에 그 모델이 적용된다면 필경 다르게 작동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폴더 모델 역시 좀 더 넓은 시각, 즉 역사적·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신문과 방송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것처럼 네덜란드 모델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네덜란드가 겪었던 심각한 위기를 타개하는 데에 대단히 훌륭한 성과를 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저성장과 고실업 그리고 과도한 복지비용의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사업주 모두 서로 한발씩 양보하여 새로운 사회·경제의 틀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바세나르 협약이라는 노자(勞資)간의 합의이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노동자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사업가는 고용촉진에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가 “소득 증대”보다는 “고용보장”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데에 합의를 한 셈이다. 

그런데 암만해도 의심이 드는 것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요구를 스스로 억제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네덜란드의 탄탄한 사회복지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기업에서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실업 상태가 되었을 때 사회와 국가가 각종 사회보장 정책을 통해 보상해준다. 아무리 사회복지 비용을 줄였다고는 해도 그것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정도로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 주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 여건을 넘어서 최소한의 문화생활까지 지켜준다는 것이 이들의 모토이기 때문에 심지어 1년에 한번 음악회에 가는 비용까지 제공한다. 이런 사정이 있으므로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그 대신 일자리를 나누어서 실업률을 낮추자는 데에 합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적 배경, ‘칼비니즘’

네덜란드에서 이런 일들이 가능한 데에는 이 나라 특유의 문화적 여건들이 작용하였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네덜란드 모델의 뼈대는 이해할 수 있더라도 피와 살을 갖춘 온전한 형태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중요한 문화적 배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흔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고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해 두는 것이 무난한 답변이겠지만, 그것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말이고, 설명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조금 과감하게 정리를 하자면, “칼비니즘”이 이 나라 문화의 핵심 요소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기독교 개신교의 한 분파인 칼비니즘은 16세기에 네덜란드가 독립국으로 만들어질 때부터 이 나라의 국교(國敎)였다. 다만 주의할 점은 현재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의 수로서 본다면 칼비니즘은 이미 소수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몇 백년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칼비니즘은 현재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회·문화적 유산이다. 

그 특징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므로 자신의 할 일은 한 점 부끄럼 없이 깨끗하게, 열심히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부(富)를 얻는다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세속적인 부가 인간의 삶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다. 개인이 부자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전체의 복리다. 마을에 누군가가 굶고 있는데 그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기초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이다. 그리고 가정 내에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물론 아버지는 폭군으로 군림해서는 안 되고 훌륭한 아버지로서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보면 네덜란드 사회에는 대단히 혁신적인 요소들과 대단히 보수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이 네덜란드 모델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 나라 사람들은 높은 임금보다 고용촉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때,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우선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한 공동체 내에 가난에 빠진 형제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점은 곧 사회보장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필요하다면 내 수입을 조금 줄여서라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파트타임 노동이 확대되었다. 네덜란드 모델의 성과 중의 하나라는 소위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라는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정규직을 갖지 못하고 파트타임 일거리를 갖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이 있으니, 사실 많은 여성들은 파트타임 일거리를 오히려 원한다는 점이다! 가정을 잘 꾸미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가정을 이끌어가면서 파트타임 일거리를 갖는 것이 정규직을 갖는 것에 비해 수입 면에서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넷째,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온건한 가부장주의 성향을 띤다. 회사에서도 강력한 노조를 결성하여 힘 겨루기를 하는 방식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하려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고용주와 국가가 기본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국가는 사회적 갈등이 있을 때 가급적 밀어 부치기를 하지 않는다. 예컨대 집 없는 사람들이 빈집을 점거하여 농성을 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 같으면 그 즉시 경찰들이 달려와서 “범법자”들을 연행해 가고 끝날만한 사안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몇 달 동안 대화를 통해 결국 이 사람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주택을 제공하는 방안을 찾아냈다. 회사 내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문 닫아걸고 장시간 회의를 한다. 우리처럼 피가 뜨거운 나라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지겨워서 못 참을 정도로 끈질기게 회의를 하는데, 그 원칙은 모든 사람이 할 말이 있으면 끝까지 다 하고 또 그것을 모든 사람이 다 듣고 난 연후에 어떤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정작 회의에서는 양측 모두 말을 않다가 딴 데 가서 딴소리하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네덜란드 모델을 이야기할 때 그것의 경제적 장단점을 기계적으로 분석해서는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 위에서 언급한 사회·문화적 분석이 필요한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네덜란드 모델이 이토록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모델일진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가? 그에 대한 답은 이렇게 될 것이다. 

이 모델을 현재 우리 사회에 그대로 도입하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낼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차라리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도록 하자. 이 모델은 우리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가? 내 개인적인 생각은 네덜란드 모델은 충분히 배울 가치가 있으며, 이 모델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 현실의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 수 있는 우리의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되, 그러기 위해서라도 남의 사례들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