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모델, 장님 코끼리 만지기

노동사회

네덜란드 모델, 장님 코끼리 만지기

admin 0 4,661 2013.05.11 11:19

지 난 6월21일에서 29일까지 네덜란드에 다녀왔다. 안건은 우리 연구소가 수행한 네덜란드 다국적 기업 감시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해당 다국적기업인 필립스, 악조노벨, 유니레버사를 방문하고 이후의 프로젝트 진행과 관련된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브라질, 남아공, 한국, 멕시코, 네덜란드의 연구단체와 노조간부들이 같이 모여 토론하고, 지구화시대 다국적기업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방안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한편의 희극 같은

짧 은 1주일간의 네덜란드 체류기간 동안 한국의 노사관계 상황은 엄청난 격변이 있었다. 이미 네덜란드 체류 중에 철도 파업과 대량 구속으로 노·정간의 대립이 극대화되었다. 시차적응도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갑자기 청와대 이정우 실장이 노사관계에 "네덜란드 모델"을 도입하겠다고 주장하고, 노사 모두가 반대하는 등 네덜란드 모델이 사회적 쟁점으로 등장했다. 이 실장은 7월1일 <청와대브리핑>을 통해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권리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경영)참여를 보장하는 '윈-윈 관계'"가 네덜란드 모델의 핵심이라고 설명하며 이의 도입을 적극 주장했다. 그러자 사용자들은 한국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가는 시기 상조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일탈행위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으며, 한 경제신문은 사설에 아예 "온 국민이 줄파업으로 넌더리를 내고 있는 마당에 파업을 말리지는 못할 망정 새로운 파업 핑계거리를 제공해서야 되겠는가. 이 실장은 네덜란드 모델 운운으로 더 이상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노동계에서도 '임금 억제'와 고통분담 요구가 못마땅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나섰다. 졸지에 이 실장 혼자서 네덜란드 모델을 살리기 위해서 나섰지만 아무런 우군도 없었다.

그런데 이 논란이 아무래도 나에게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의 한 편의 씁쓰레한 희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네덜란드 모델이 무언지 각자 한 측면만 가지고 평가하고 이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식이다.

우 선 이정우 실장이 네덜란드 모델이 마치 "임금인상 자제와 경영 참가의 빅딜"인 것처럼 표현한 것 자체가 네덜란드 모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임금인상 자제와 교환된 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창출과 고용보장이지 결코 경영참가가 아니다. 따라서 사용자 측이 경영참가는 시기 상조라며 이에 강력히 반발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허깨비를 대상으로 생난리를 친 것이다. 물론 네덜란드에서도 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경영참가가 허용되어 있으나, 그것이 모델의 핵심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노동계 역시 임금인상 자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반대하는 것도 문제의 초점을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고임금과 고용안정을 동시에 성취하기가 어려운 작금의 현실에서 고용안정을 핵심으로 삼자는 것은 노동계로서도 충분히 검토와 고민이 가능한 대안이다. 한국의 노동자가 사회보장이 불충분한 가운데 임금에만 과도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다면 네덜란드는 사회보장의 완비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로서도 고복지와 고용안정,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해소와 임금인상 자제를 검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된 데에는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타당성 검토에는 관심이 없는 자본과 보수 언론의 공세가 숨겨져 있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은 기존 DJ "국민의 정부" 시절에 비해 친노동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평가이다. 따라서 그 핵심이라고 판단되는 이정우 정책실장에 대한 공격거리라는 면에서 네덜란드 모델이 호재였던 셈이다. 과거 DJ 정권 시절 <조선일보>의 최장집 정책위원장에 대한 사상 검증 공세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네덜란드 모델의 타당성을 떠나 경영참가 주장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이며 미국식 모델에 따라야 한다는 대세를 만들어내는 데 자본과 보수 언론이 일치 단결한 것이다.

낮은 실업률, 짧은 노동시간

그러면 도대체 네덜란드 모델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인구에 회자되는가?

네 덜란드 모델은 네덜란드 스스로가 개발한 것이기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명명되고 네덜란드 내에서 이후 자리를 잡는 과정을 겪었다. 유럽 통합과정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성장률도 높고, 실업률도 매우 낮은 이상한 나라로 분석되면서 과연 그 성공요인이 무언가에 대해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네덜란드의 기적과 모델이 논의되고, 자체에서도 자신감을 갖고 모델로 정식화된 것이다.

1982 년 노사간의 역사적인 바세나 협정이 이루어지기 전, 네덜란드 역시 서구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노사의 대립과 갈등이 매우 첨예한 상태에서 고실업과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다. 1984년 실업률은 17%로 치솟았다. 1881∼1983년 사이 3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1984년 매달 10만 명씩 실업자가 늘어나 80만 명에 이르렀다. 198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성장률은 0%선에 머물렀다. 노사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임금인상 자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합의한 것이다. 이탈리아식 생계비 완전보장 조항은 10%대로 떨어지고 평균실질임금은 낮아졌으며, 그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했다.

그 결과 놀라운 효과가 드러났다. 우선 실업률이 압도적으로 낮아졌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서유럽 국가들의 평균 연간 고용증가율이 0.5%인데 비해 네덜란드는 고용률이 매년 1.4%씩 늘어났다. 1982년 10% 가량이던 실업률은 2000년 3.5%까지 떨어졌다. 아울러 1994∼95년 GDP 성장률은 연평균 3.25%를 기록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자연히 네덜란드 모델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그러면 노동시간 단축은 어떻게 되었는가? 현재 네덜란드의 주당노동시간은 1996년에 이미 33시간으로 세계에서도 최저수준이다. 우리가 노동시간 단축의 모범으로 알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의 38시간보다도 짧으며, 연간 1,300 시간대이므로 연간 2,400 시간대인 우리나라 노동자에 비해서는 약 1,000 시간을 덜 일하는 셈이다. 이렇게 노동시간 단축을 하여 고용창출과 일자리 나누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차별 없는 비정규직

한 편으로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정규직이 많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파트타임 노동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1996년 현재 파트타임 노동자의 비율은 38%로 10%대의 다른 유럽 나라는 물론, 상대적으로 높은 영국의 25%보다도 훨씬 높다. 파트타임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들인데, 남성노동자는 17%만이 파트타임인 것에 비해 여성노동자는 68%가 파트타임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 파트타임들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과는 질을 달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의 차별 해소 정책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도가 정착돼 있어 정규직과 질을 달리하고 차별에 설움 받는 신세가 아니다.

우선 파트타임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와 달리 기간제가 아닌 정식사원이며, 단지 노동시간만 짧을 뿐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에 따른 만큼의 동등한 임금이 적용되며 각종 사회보험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파트타임과 정규직은 완전히 분리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가 원하면 정규직이 되었다가 파트타임이 되기도 하며 이는 권리로서 인정받고 있다. 사용자는 가능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공무원노조를 방문했을 때, 담당자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파트타임 노동자가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되는 네덜란드에서는 모범적 사용자로서 정부는 공무원내 파트타임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늘이는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무원 중 30%가 파트타임이고, 이들이 정규직을 지원하기도 하고, 정규직도 파트타임을 원하면 정부는 이를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소위 유연안정성이라는 'Flexicurity'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 이해되는 셈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네덜란드의 사회복지 제도이다. 대표적인 것이 1947년 도입된 65세 이상 국민에 대한 노령연금제도와 196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최저임금제도(월 150만원정도)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다는 나라에서 산재장애 수당을 받고 있는 사람이 1980년대에 인구의 13%이자 600만 노동자중 100만 명이나 될 정도로 관대한 사회보장체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놀고 먹는 복지병의 대표적인 나라이다. 직접 해고가 어려운 경우 사용자들은 고령노동자를 일자리에서 내보내기 위해 노사가 담합해서 1년간 질병급여를 받게 하는 이상한 나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제도는 개혁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 개혁했다는 내용의 수준도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일 정도이다. 노동장애 판정이 보다 엄격해지고 수당이 삭감되면서 사실상 이 수당을 받는 이들은 주로 55세 이상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정도이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에서는 소득격차가 매우 적고 저임금층도 그리 많지 않다. 네덜란드의 빈민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네덜란드는 고용성장을 위해 빈민을 양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의 소득격차도 심하지는 않지만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합의가 가능하게 되었는가? 이를 설명하는 것이 네덜란드의 전통과 관행이다. 네덜란드 모델을 '폴더모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간척지를 뜻하는 폴더에서 따온 말이다. 즉 1500년 전부터 주민들 모두가 계급에 상관없이 일치 단결하여 간척지를 만들 듯이 네덜란드는 화합의 전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다양한 정당이 난립하여 연립정부가 계속 세워짐으로 인해 타협과 협의의 전통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재단이라는 노사협상의 틀과 우리나라의 노사정위원회에 해당하는 사회경제협의회가 노사관계에 관한 협상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다.

네덜란드 모델은 수입가능한가?

우 선 네덜란드 노총 위원장조차 "네덜란드 모델은 수출 가능한 모델은 아니다(No Export Model)"고 단정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네덜란드 모델은 네덜란드 국민들의 전통과 관행의 제도적 표현"이지 사회구조와 환경을 떠나 자체적으로 수입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사간 타협의 전통과 협의구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다. 노동조합의 전투성만이 아니라 한국 사용자들의 전투성은 세계적으로 악명 높다. 동남아와 중남미에서 한국인 기업가들은 대표적 부당노동행위와 악덕 사업주로 악명 높다. 아울러 노조와 연대한 진보정당이 집권하거나 강력한 제1야당 노릇을 해온 정치구조도, 진보정당이 국회의원 한 석조차 없는 우리의 현실과 대비된다. 1982년 바세나 협약 당시 노총 위원장이었던 빔 콕은 1994년 총선에서 승리, 수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또 하나, 지금 네덜란드 모델은 네덜란드 자체에서도 위기에 빠져있다. 우파 연립 정부가 들어서면서 10∼15%의 재정 삭감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공무원의 인력 감축이 추진될 예정이다. 연금제도의 개악도 추진중이라고 한다. 경제성장도 급락하였으며 지난해 4분기 이래 계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다 한다. 실업률도 2%대에서 올 1/4분기 3.6%로 높아지고 있다. 노동조합에서도 과거와 달리 투쟁을 준비중이며 국회앞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일부 학자는 네덜란드 모델이란 임금인상 억제와 값싼 여성 노동력의 취업으로 인한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혹평하기까지 하였다. 글쎄, 나 같은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그런 신화와 환상이라도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사회복지와 비정규직 대우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모델 자체보다는 노동운동의 전략과 관련해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주진우 민주노총 비정규실장의 평가는 시사적이다. 사실 한국의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네덜란드 노총(FNV)은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법 전노협 시절부터 네덜란드 노총은 누구보다도 먼저 한국의 민주노조를 지원해왔으며, 아직까지도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주진우 실장의 1999년 방문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방문보고서에서 네덜란드 노총의 중장기 전략의 일관성과 조직확대 전략에 주목하였다. 그 글에 덧붙일 말이 없으므로 끝맺음에 대신하고자 한다.

"네덜란드 노동조합은 파트타임 노동이 부차적이고 열등한 노동이라는 의식을 불식시키고, 이들의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을 풀타임 노동자와 동일하게 보호하려는 제도적, 의식적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맞물려 파트타임 노동을 장려함으로써 일자리 창출과 가사노동(무급노동)과 유급노동의 조화를 꾀하고자 했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이미 정규직 노동자와 맞먹는 규모로 늘어나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조직화는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들의 조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은 이들이 노동조건에서 정규직에 비해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정규직 노동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함께 여러 법적, 제도적 보호를 강화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절실한 형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