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의 발전과 코포라티즘 시대의 시작

노동사회

공공부문의 발전과 코포라티즘 시대의 시작

admin 0 3,387 2013.05.11 11:14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급변한 이탈리아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1960년대 말의 사회변혁 운동을 시작으로 1970년대를 거치면서 자유와 이념은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이탈리아 사회를 커다란 회오리 속으로 밀어 넣었다. 1970년대의 변혁의 열망과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탈리아 사회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었고, 오랫동안 집권해 온 지배계층, 특히 기민당과 관련한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연루 사건들이 불거지게 되었다.

재정적자와 기민당의 부패

jbkim_01_1.jpg당 시 이탈리아는 여러 사회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남부문제’에 대한 해결의 끝은 보이지 않고 더더욱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 통일 이후부터 남부문제는 지배계급의 주요 정책적 기조의 하나였다. 이의 해결을 위해 수많은 정책들이 입안되고 실행되었지만, 근본적인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던 남부에 대한 정책적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남부의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한 남부산업발전기금공사가 실패하자 남부의 경제 예속화와 산업 불균형은 국가 경제 전반에 커다란 부담으로 남았다.

여기에 집권이래 20년을 넘기면서 기민당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부정부패는 갈수록 정도를 더해 갔다. 1974년 정유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기민당 소속 정치가들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정치가들의 부패가 쏟아졌다. 이와 동시에 1973년 불어닥친 세계유류파동으로 원유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던 이탈리아 경제는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정부의 리라화 평가절화 정책은 악성 인플레를 수반하였고, 이탈리아 경제는 다시 한번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악성 인플레에 따른 경기침체, 남부정책의 실패, 사회보장비용의 증가, 증가하는 실업률, 이탈리아 전체 산업대비 20%에 달하는 공기업들의 채산성과 부채 증가 등의 여러 요인들은 정부의 공공부채 규모를 통제불능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원인은 정부의 정책 운영상의 비효율성과 관련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민당 정권의 국가지배 기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정권 초기부터 보수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한 지배 기조는 공산당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단독으로 혹은 연정으로 정부를 구성해 왔다. 이와 같은 정치 입장의 근본에는 각 정파의 파벌주의와 후견인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파벌과 후견인은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이나 하부조직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는 국가경영의 비효율성과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다. 지역과 하부조직으로부터 국가정책의 결정권자인 상위 정치가들까지 연결된 봉건적인 혈연 및 지연 구조는 국가지출 규모의 축소나 효율적 배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영향력 존속을 위해서는 국가 대의보다는 파벌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에 더 매달리었으며, 매표나 부패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지역에서 이와 같은 파벌과 후견인 제도가 성행했지만,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낙후한 남부와 섬 지역이 훨씬 심했다. 남부가 전근대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더욱이 후견인 제도는 마피아라는 이탈리아 특유의 범죄조직과 연결되면서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각종 이권과 함께 국가정책 사업에까지 손을 뻗칠 수 있었던 마피아들은 지방의 경제와 행정을 더욱 굳건하게 장악할 수 있었고, 이들 범죄조직들은 심심찮게 유력한 정치가들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경기가 침체되었던 70년대 중반 마피아들은 내부의 위기 상황을 마약밀매를 통해 외부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더욱 막대한 검은 부를 획득하게 된 마피아들은 합법 사업체를 통하여 남부와 섬들을 중심으로 확고한 영향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80년대 초반까지 남부와 시칠리아 등의 도서지방에서는 중앙정부가 마피아 소탕을 위한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성공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반해 북부와 중부 산업지대의 사정은 달랐다.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분리주의 운동과 신파시스트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곧 남부의 마피아 조직과 대응될 수 있을만한 테러 형태로 표출되었다. 우익 계열의 ‘백색테러’를 시작으로 촉발된 테러리즘은 좌익계열의 테러로 확산되면서 70년대 이탈리아를 테러리즘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1976년 무렵 100여 개의 테러단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만큼 당시 중부와 북부의 테러리즘은 마피아와 함께 국가존립의 최대 위험물이었다. 1978년 기민당 당수로 수상을 역임했던 알도 모로(Aldo Moro)를 납치하여 살해한 사건은 테러리즘의 극치였다. 이후 정부는 마피아와 함께 테러리즘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1982년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국가의 통제권을 회복하였다.

‘역사적 합의’·중소기업의 성장·의식개혁

1970 년대 발생했던 일련의 위기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1980년대 이탈리아 전체가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사건과 정황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정치적 지형에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온 것은 ‘역사적 합의(Compromesso storico)'라 불리는 공산당의 정치적 전략기조의 전환이었다. 1950년대 똘리아띠에 의해 제안된 ‘사회주의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길’이라는 공산당의 기본 전략은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로 새롭게 고민해야할 전략이었다. 이제 막 당수에 당선된 베를링궤르(Enrico Berlinguer)는 공산당의 재건을 위해서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 집권 기민당과 제휴할 수 있다는 제의를 하였다. ‘역사적 합의’로 명명된 공산당의 방향 전환은 정치적 무력감과 권위 회복을 바라던 기민당에게도 관심을 가질만한 제안이었다. 전통 공산당 지지자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주었지만, 공산당은 새로운 지지세력을 얻는데 일정정도 성공하였다. 기존 지배질서에 새로이 편입하였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제도의 정비, 낙태의 합법화, 의료제도의 재정비, 방송규제의 철폐 등이 ‘역사적 합의’ 이후의 긍정적 결과물이었다.

두 번째는 산업구조 전체의 변화였다. 공공기업의 재정적자가 커지고, 민간기업들도 기업의 생산성과 이익창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중북부의 중소기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영방식과 노조정책이 등장하였다.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들 작은 기업들은 가족중심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가능한 노조원이 아닌 노동자를 고용하고, 편법 운영을 통하여 기술 축적과 상품 경쟁력을 제고시켰다. 오늘날 성공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이탈리아 중소기업들의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들의 희생과 편법을 통해 얻어졌고, 이들의 경쟁력은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1960년대 말부터 사회전반에 불어닥쳤던 의식개혁 운동이 오랜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과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그 당위성과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웠던 점이다. 집권 여당인 기민당 뿐만이 아니라 야당이던 공산당에게도 실망한 국민들은 국가체계 전반에 대한 변화와 개혁을 필요로 했으며,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과 함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패하고 낡은 정치사회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는 시민과 노동자였고, 이를 토대로 하는 시민사회와 노동권리, 그에 합당한 역량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소비자, 여권, 성평등, 사회보장, 주택, 환경문제, 국가 권력 등과 같은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거나 재해석되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국내적으로 변화된 정치·경제적 환경은 곧이어 전개되는 세계경제의 활성화 기운을 타고 동반 상승하게 되었다. 1983년을 고비로 이탈리아 경제는 또 다시 도약하게 되는데, 흔히 이 기간을 ‘제2의 경제기적’이라고 칭할 정도로 이탈리아의 경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도약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동계급의 일방적 희생을 통한 이탈리아 자본의 성장일 뿐이라는 구조적 허약성이 존재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1980년에 들어와 피아트(Fiat)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들이 노동자를 감원하였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1960년대로 하향조정 되었다. 또한 노동자 희생의 대표적 모델이었던 기계, 섬유, 가구 산업 분야의 중소기업들이 이러한 고성장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장기적으로 구조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요인이었다.

이탈리아 정치·경제적 상황 변화는 노동운동에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대기업노조의 전략적 실패에 따른 침체와 중소기업의 성장에 따른 노동운동의 전반적 퇴조, 대기업 중심의 노조운동이 침체하고 자율노조와 중간 전문직 노조기구인 꽈드리(Quadri)의 확대, 민간 분야 노조보다 공공부문 노조활동이 활성화되는 등 상황 변화에 따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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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GIL 소속 에너지산업노동자의 거리행진(1985) ]

공공부문 노조의 태동

비 교적 오랜 역사의 민간부문 노동운동에 비해 공공부문은 상대적으로 노조활동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금지되었거나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노동조직의 체계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노동운동의 성격이 현장노동자와 육체노동자 중심의 발전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가 개입되는 그 순간부터 행정이라는 이름으로 얽히는 복잡성과 법률지상주의 원칙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공공’ 또는 ‘공무’와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는 노동자나 단체들이 오래 전부터 유·무형의 국가 개입이나 간섭을 받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탈리아의 공공부분 노동운동의 역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기원을 최근으로 두는 것은 공공부문 노조가 가지는 이와 같은 외형적인 모습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공공부문의 노사관계와 제도는 국가의 통제에 따르며 주로 법과 법령에 의존한다. 이것은 무솔리니가 국가 공무원과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기 위해 시행한 1923년 ‘공공행정개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무솔리니는 수상에 취임하면서 전체주의 체제에 적합한 체제유지와 강화를 위한 정책과 법안들을 계획하여 시행하였는데, ‘공공행정개혁’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따라서 공공부문에 대한 국가통제는 자유주의적이거나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전체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 후부터 공공부문과 공무원들은 법으로 신분을 보장받는 대신에 단체교섭이나 노동조합 설립 또는 파업 등과 같은 쟁의 수단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전환된 계기는 68운동의 결과로 얻어진 1970년 ‘노동자 권리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였다. ‘노동 있는 곳에 권리 있다’는 원칙을 확인하는 이 법률에 의해 기존의 노동3단체들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법률적 제약을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고, 결국 1973년 3월에 공공부문 협약을 3년 주기로 체결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협약의 문제점은 노조의 대표성을 전국 규모의 조직으로 한정하고 있어 기존 노동조직에만 대표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노조 가입율이 낮은 기존 노조들에 한정하였다는 것은 다른 노동조직(보통 자율노조나 지역노조 등을 의미한다)을 배제한다는 것이기에 실제로 많은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약권은 동시에 법적 신분 차원에서 이중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국가의 법으로 보장된 신분보장과 함께 노동권리(비록 부분적인 것일지라도)에 의한 보장을 함께 부여함으로써 다른 노동자들에 비하여 특권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이중성으로 노조운동 자체의 목적보다는 성과물이나 조합원들의 신분보장에 치우친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국가의 기본적 전략 역시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조직을 통제하고 통치에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였다.

‘공공고용기본법’의 제정-공공부문 노동조직의 정착

이와 같은 상황은 1983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같은 해 실시된 총선거를 계기로 공공부문 노동운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집권당이던 기민당은 지난 총선 득표율보다 무려 5%나 하락한 32.9%만을 획득하는데 그쳤고, 공산당은 29.9%를 득표하였다. 또한 집권당의 연정 파트너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당도 11.4%를 득표함으로써 기민당은 사회당을 포함하는 연정을 구성하고, 사회당 당수였던 크락시(Craxi)에게 수상직을 맡기었고 사회당이 참여한 정부는 이전의 보수주의적 정책에서 다소 전향적인 방향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공공부문에 대한 전향적 입법 역시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 변화에 기인한 바가 크며, 국가와 기존 노동조직들이 합의하여 제정하게 된 ‘공공고용기본법’이 대표적이었다.

1983년 3월29일 제정된 이 법안의 기본적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공공부문의 행정 효율성과 투명한 임금 정책 및 행정 체계의 동질화 및 균등화를 대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법안은 공무원 조직과 직급에도 일반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단일기능 분류체계(형식적이고 위계적 의미에서의 순위나 직급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직무에 따른 임금과 보상을 규정하는 임금결정 체계)를 도입하고, 보다 세분화된 공공부문의 영역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의 통제적 입장이 반영된 파업에 대한 자기규제조항(제11조)도 함께 포함됨으로써 일방적인 단체교섭 제약조건으로 작용하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의 이 법안은 공공부문 노동운동의 초석을 열게 되는 기본법률이 되었고,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공부문 노동운동에 관련된 법률의 준거점이 될 수 있었다.

공공부 문의 발전은 이러한 법률적 정비 외에도 기존 노총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조조직, 다시 말해 자율노조 혹은 독립노조들의 활성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대표적 공공부문은 운송과 관련된 분야라 할 수 있는데, 이들 분야는 1960~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조직의 양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운송(특히 버스, 철도, 항공 등)부문은 기존 노동조직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인 노조를 조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조직의 형태가 자율노조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공공부문의 기존 노동조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립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이들 노조는 1983년 이전에는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1983년의 법률에 의해 지역과 업종만으로도 대표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노동조직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일정부분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들 자율노조들은 1983년 법률의 파업에 대한 자기규제 조항에 동의하지 않고 독자적인 규정조항을 만드는 등 기존 노동조직과는 다른 전술 방향을 제시하였다.

다소 복잡한 상황을 띠는 1980년대의 노동운동은 민간부문 노동조직과 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반면, 공공부문에서는 법률적 제도화와 보호에 힘입어 노동운동 전체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특히 1980년대 피아트(Fiat)를 비롯한 대기업들과 공공부문에서 전문직 단일노조 형태인 꽈드리(Quadri)가 확산되면서 기존 노동조직이 전반적으로 침체하게 되고 이를 대신하여 공공부문이 주축이 된 자율 혹은 독립노조들과 전문직 단일노조 조직(Quadri)이 주도하는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협동조합과 코포라티즘 시대의 시작

1970 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함께 노동운동 역시 침체의 늪에 빠졌다. 세계경제의 동반침체라는 외적 요인 외에도 기존 노동조직이 정당으로 귀속하고, 새로운 노동조직의 출현으로 세력이 파편화되는가 하면 국가와 협력하는 정도가 높아지는 등의 내적 요인의 영향도 컸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의 이와 같은 침체 과정에서 두드러진 사건들과 경향들은 협동조합의 발전, 노사정 협력관계의 시작과 증진, 그리고 임금교섭 대상으로서 기업과 지역 대표의 협상 증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 아에서 협동조합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노조가 강력했던 시기에는 그다지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게 되었고, 이의 처리 과정에서 많은 경우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조합으로 전환되었으며, 청소년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부가 협동조합의 설립을 법률적으로 권장하고 장려하였고, 노조 역시 노동운동에서 협동조합의 역할을 증대시키면서였다.

협동조합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운영과 경영을 책임진다는 의미도 있었고, 노사간 갈등의 폐해를 줄인다는 부수적 목적도 동반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효과도 동반했는데, 주로 정체성과 대표성의 문제였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고 또 그 책임 아래 회사나 공장이 운영되면서 노동자들의 대표성을 외부 조직에서 찾을 필요성이 없어졌고, 조합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기구 역시 평의회나 기존 노조의 하부조직으로서 기업노조가 아닌 단순한 집행부로 전환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불거졌다. 결국 협동조합이 노동조직이라는 성격보다는 자립형 경영협의체로 본질이 변경되면서 노조의 한 형태로 존속하기보다는 회사 경영의 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확장되던 협동조합은 이후 기존 노총 중심의 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면서 그 세력은 미미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국가와 노동 사이의 관계는 노동운동의 침체와 동반하여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하게 되었고, 비록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국가의 정책과정에서 이를 반영하는 징표들이 등장하였다. 흔히 코포라티즘이라고 일컬어지는 노사정 3자의 협동과 협력을 토대를 하는 이 원칙은 북구 유럽, 특히 스웨덴에서 1970년대까지 번성했던 모델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제반 여건들이 북부 유럽과는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코포라티즘의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위기 타개와 ‘역사적 합의’ 선언 이후 수립된 연립정부에 대한 기대 등이 어울려 새로운 협의체제를 위한 상황적 요건은 무르익게 되었다.

1976년 통일연합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산별 교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용문제의 해결을 위한 임금문제의 전향적 검토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듬해 다시 경제인연합회(Confindustria)와 노동비용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78년에는 정부의 노동정책에 협력하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였다. 2월 로마에서 열린 회담을 통하여 발표된 주요 내용은 임금정책에 대한 수정, 임금정책의 기준이었던 지수연동제(Scala mobile)의 축소, 정부의 반인플레이션 정책 지지 등이었다. 이는 노조의 근본적 전략수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용자와 정부에 대한 협력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정부 역시 노조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고 국가 전반의 노동정책과 경제정책에 노조의 입장이나 의견을 조율하여 국가정책의 구성요소로 참여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83년 스꼬띠(Scotti) 협약으로 재확인되었고, 이듬해 제정된 성 발렌띠노 법령으로 고조되었다.

사회적 합의에 대한 노조와 정부의 분위기만큼 기업의 입장도 변화가 있었다. 정치적 노조운동이 약화되면서 전국 차원의 노조가 중심이 된 임금협상의 틀이 기업이나 지역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업 역시 내부적인 정보 접근이나 경영참여 등의 형식을 통하여 노동자와 노조의 기업참여를 허용하였다. 구체적으로 시작된 영역은 공공부문이었고, 특히 국영기업이었던 이탈리아산업재건공사(IRI)에서는 노사가 합의하여 ‘통합협의위원회(Comitato consultivo unito)’를 설치하였다. 위원회 구성 시 노사 양측이 동수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기능과 구성에서 상당히 혁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은 공공부문에 한정되었다. 민간부문에서는 경영자 측의 반대가 심하여 구성과 시행 자체가 무산되었고, 1987년에서야 금속부문을 중심으로 정보 근접과 공유에 대한 협약이 체결되는 수준에 머물렀다. 기업별 협약의 증가와 함께 지역별 협약 역시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지역이나 지방에서 활성화되었던 자율 혹은 독립노조의 증가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노사정 협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1980년대의 이탈리아 코포라티즘은 상황이나 경우에 따라 일시적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제도를 통한 안정적 구조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특히 기존 노조들이 대표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사회적 합의는 점점 어려워졌고, 기업이나 지역 단위의 미시적 차원에서의 합의는 갈등 속에서도 유지되었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코포라티즘은 1990년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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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bas의 2002년 사회포럼 집회 모습 ]

공공부문의 변화와 새로운 노사정 관계 

1980 년대 말은 전반적으로 민간부문의 노조활동이 위축되고, 세력판도 역시 노·정 갈등과 대립에서 노조에 비해 정부와 사용자측의 상대적 우위로 기울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 노동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민간부문보다 공공부문의 조직과 활동이 우월했다는 점이다. 이는 공공부문의 노동운동이 국가의 법률에 의해 보호될 수 있는 근거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1983년의 법안을 기초로 하여 3년마다 적용되는 임금협상 재개가 정부의 연기방침으로 2년간 유예되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과 의사와 교사 및 공무원 등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이들은 특히 기존 노동조합 조직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면서 새로운 노동조합 조직을 결성하게 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Cobas(하층 위원회;Comitati di base)이다.

1987년 초에 결성된 이 조직은 공공부문의 노동자와 전문기술직 그리고 숙련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설립되었다. 보통 8개 부문(공무원, 학교, 국립병원, 지방자치 단체, 사회보장 기구, 대학, 연구소, 공사)의 하위조직을 가지고 있다. 공공부문에 대한 기존 노총들의 전술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들은 정부와의 1987년 협상과정에서 강력한 투쟁 방침을 유지하였다. 이는 기존 노동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세력 축소와 대표성 훼손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또한 정부의 입장에서도 이들의 요구가 지나친 재정적자와 인플레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obas의 입지는 1987년 협상 기간에 많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그 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이탈리아 공공부문은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오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근대에 만연되었던 후견인주의나 파벌주의의 유산으로 중앙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중복되는 기능과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비효율성 과 함께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였고, 공공부문의 개혁은 단지 임금협상이나 노동권 획득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자유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공공부문 문제 해결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법률적 근거가 1990년 제정된 공공부문의 파업규제법안이다. 공공부문 중에서 필수공익분야에서의 파업을 제한하고, 파업 시 전제되어야할 규정 등에 관한 법률로서 이후 이탈리아 공공부문의 기본적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정 부와 사용자 주도로 흐르던 노사정 관계는 1991년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다. 1983년 스꼬띠 협약 이후 중단되었던 노사정 삼자협상의 재개는 1990년대 노동운동이 국가 정책과 제도로 편입되는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고, 불안정하던 코포라티즘이 북유럽 모델과는 다른 이탈리아만의 형태로 전개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1년의 삼자협상 전에도-비록 형식적일지라도-1990년 초반에 제도화된 ‘경제사회협의회’라는 기구가 만들어져 노동과 산업 정책에 대한 국가자문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지방 자치정부 산하의 산하기구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협력관계였으며,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노사정 삼자협상이 제도화되는 것은 1993년 무렵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탈리아 노동운동과 정치적 상황은 또다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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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