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금속노조의 파업 실패

노동사회

독일 금속노조의 파업 실패

admin 0 4,787 2013.05.11 11:07
 

bbak_01.jpg독일 금속노조가 대패했다. 세계 최강의 산별노조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금속노조가 파업에 실패하고 휘청거리고 있다. 1954년 파업 실패 이후 최대 최악의 패배라고 한다. 파업 실패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파업중단이 발표되자마자 언론에서는 일제히 '역사적 패배'라는 표제를 뽑고 있다.

느닷없는 파업 중단

6 월29일 금속노조는 느닷없이 파업중단을 결정해 파업 중이던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6월2일부터 시작된 파업은 4주째 지속되고 있었고, 그 파급효과가 산업연관망을 따라 전국으로 확장되던 중이었다. 독일의 3대 자동차 회사인 다이믈러-크라이슬러, 폭스바겐, BMW 조립공장들이 파업지역 지사 또는 하청업체들로부터 부품을 조달 받지 못해 조업을 단축 또는 중단해야할 정도였다. 사용자단체 쪽에서도 협상타결을 더 이상 미루기 힘든 국면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금속노조가 아무 예고도 없이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패배'에 대해 금속노조 일각에서는 현재 부위원장이면서 차기 위원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유르겐 페터스의 지도력을 문제삼고 나섰다. 파업 실패의 원인은 전적으로 페터스의 전략실패에 있으며, 패장은 위원장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패배에 즈음하여 그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은 당연한 절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연한 절차가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되고 있다는 데 있다.

독일 노동조합들의 '암묵적 강령'에 따르자면 집안 싸움을 집밖으로 들고 나와서는 안 된다. 집안에서는 서로 '박이 터지게' 싸우더라도, 집밖에서는 무조건 '우리 식구'를 옹호해야 한다. 바로 이 원칙을 깨고 지금 금속노조 간부들이 대중매체에 나와서 서로 치고 박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문 또는 텔레비전에 대고 이쪽이 저쪽을 치고, 저쪽이 이쪽을 씹고 있다. 대중매체는 이들에게 '이전투구'의 마당을 열어주면서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장면은, 독일 노동조합의 관례를 두고 볼 때,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대화주의자와 전통주의자의 대립

이 희한한 싸움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된 것만 두고 보더라도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이다.

노 동조합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측자들에 따르면, 현재 금속노조의 진흙탕 싸움을 가장 집요하게 까발리고 있는 『디벨트』(Die Welt) 신문의 기사들을 참고해도 좋다고 한다. 이 역사적 사건의 기원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에 사민당이 집권했을 때 노동조합에서는 당시 금속노조 부위원장이던 발터 리스터를 노동부장관으로 입각시켰다. 공석이 된 자리를 니더작센 지부장이던 페터스가 메꾸었는데, 그때 위원장 쯔비켈은 페터스의 중앙진입을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금속노조 안에 크게 두 개의 정파가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이른바 '전통파'(Traditionalist)와 '현대화파'(Modernisierer)가 그것이다. 옛날 표현을 빌자면 '근본주의'와 '개량주의'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현대화주의자들은 주로 대기업 사업장평의회를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반면, 전통주의자들은 주로 노동조합 중간간부층, 즉 지구사무소 위원장 또는 지역본부 간부들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원장 쯔비켈은 현대화파에 가깝다고 분류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부위원장인 페터스는 전형적 전통주의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협약정책 책임자로서 이번 파업을 총지휘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협상 범위가 된 동독지부 지부장인 하쏘 뒤벨도 전통주의자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현대화파의 새로운 대표주자로는 바덴-뷔텐베르크 지부장인 후버를 꼽고 있다.

위원장 쯔비켈은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정기총회에서 은퇴할 예정이다. 독일 노조들의 관행에 따르자면, 차기 위원장은 정기총회가 있기 전에 내부 조정을 통하여 미리 내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기총회에서 경선이 벌어지는 일은 드문데, 이것은 경선과 더불어 내부 권력투쟁이 격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금속노조에서도 지난 4월 8∼9일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차기 지도부 내정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부위원장인 페터스를 차기 위원장 후보로, 바덴-뷔텐베르크 지부장 후버를 부위원장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의가 된 것이다. 전통파와 현대화파가 런닝메이트로 나서는 결정은 금속노조의 내부 통합을 위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금속노조의 내부 권력투쟁도 건강한 경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생산적으로 해결이 되는 듯했다.

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갈등

하지만, 깊은 균열이 금속노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전통주의 대 현대화주의, 페터스 진영 대 후버 진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대립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두 노장, 즉 클라우스 쯔비켈과 유르겐 페터스 사이의 싸움이다.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든 동료로서든, 결코 서로 좋아한 적이 없다. 그리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쯔비켈은 페터스에게 밀렸다. 예를 들자면, 1998년에 쯔비켈은 부위원장 리스터가 비운 자리를 회계감사 베르틴 아이힐러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힐러는 손을 들어버렸고, 입후보를 철회하였다.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다수를 얻을 가망성이 별로 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자리를 페터스가 밀어붙이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 뒤로 쯔비켈은 이 패배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그의 권위에 금이 간 것이었다. 2년쯤 전에 쯔비켈은 한 가지 혁명적인 협약정책을 제안하였다. 임금을 기업의 수익상태와 연동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에 후버는 쯔비켈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페터스는 어렵지 않게 쯔비켈의 제안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이 중요한 문제는 그 뒤로 다시 거론된 적이 없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쯔비켈은 계속해서 후버를 밀어주었다. 밀어줄 만한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금년 4월에 쯔비켈은 중앙운영위원회를 움직여 후버를 자신의 후임자로 내정하려는 물밑 작업을 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몇 달 동안 공을 들였다. 그러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결정의 순간이 오자 약속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약속을 잊어버렸다. 쯔비켈은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쯔비켈에게는 페터스가 차기 위원장으로 되는 것을 막으려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그는 페터스를 노동조합을 위태롭게 만들 사회주의적 전통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페터스가 장차 여러 지부의 지부장 자리에 전통파를 심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새로 등용되는 지부장들이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금속노조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파업이 전형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동독지역 주35시간제 도입과 관련하여 쯔비켈은 파업을 원치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동독지부 지부장 하쏘 뒤벨이 일전불사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뒤벨은 페터스를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디벨트 6월5일).

동독지역 주35시간제

파 업 실패라는 극적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페터스 차기위원장'에 더 이상 시비를 걸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파업실패와 더불어 사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현대화 파에서 다시 대권문제를 들고나선 것이다. 파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페터스가 내정자 자격을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서 페터스는 위원장과 일부 대기업 사업장평의회 '토호'들이 파업을 사보타지 했다고 반격하고 있다. 내부 권력투쟁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하여 파업을 악용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파업은 왜 실패했는가?

이번 단체협상은 사회적 분위기가 불리한 속에서 준비되고 추진되었다. 협상지역은 동독지역, 협상 유효 범위는 금속산업 노동자 32만 명,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속 전자 업종 노동자 31만 명과 철강업종 노동자 1만 명, 협상목표는 주35시간제 도입이었다. 동서독이 통일된 지 13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동독지역의 노동조건도 서독지역의 그것과 균등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하여 실업자 수도 줄이자는 것이었다.

'절대불가!' 동독지역 금속산업 사용자단체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단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사용자들은 입만 벌리면 '세계화-국제경쟁력'이라는 주문을 외고 있고, 임금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고, 자본을 저임금 국가로 아웃소싱 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여론도 노동조합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현재 독일 사회는 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 불황과 투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불황이 노동시장을 압박하여 실업자 수는 450만 명, 실업률은 11%에 달하고 있다. 동독지역은 사정이 더 나빠서 실업률이 20%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편, 불황이 국가재정을 압박하여 사민당 정부는 사회보장비 지출을 삭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다수 언론도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이런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서 노동조합이 '동독지역 주35시간 노동'을 들고 나왔으니 환영받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금속노조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모르는 채 '35시간제'를 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노동조합은 항상 '불리한 여건' 속에서 존재해 왔고, 항상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불리한 여건을 돌파하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운명이고 사명이었다. 1980년대에 독일(당시 서독)에서 금속노조가 '주35시간 노동'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세계적으로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었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독일에서는 사정이 더 나빴다.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겪는 경제위기였고, 처음으로 대량실업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금속노조는 '주35시간 노동'을 들고 나왔고, 그때에도 '불리한 여건' 속에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내외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금속노조는 불리한 여건을 뒤엎고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bbak_02.jpg파업의 경과

이번에도 단체협상 및 파업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라 준비되고 진행되었다. (자세한 협상 및 파업 과정에 대해서는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발행하는 『연대와 실천』2003년 8월호 참조).

금 속노조 중앙 집행부와 동독 지부는 2002년부터 '동독지역 주35시간제 도입'을 전략사안으로 채택하고 협상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현재 동독지역에는 서독지역보다 3시간이 긴 주38시간제가 적용되고 있는데, '동독지역 노동시간 협약'이 2003년 4월30일로 유효기간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2002년 하반기에 개최된 동독지부 협약위원회 및 중앙본부 운영위원회는 노동시간 협상안을 여러 차례 검토하고 결의하였다.

금속노조 동독지부는 절차규정에 준하여 2003년 1월에 동독지역 금속사용자단체에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독지역 금속전자업종 사용자단체 및 철강업종 사용자단체에게, 노동시간 협약 해지를 통보하였고,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요구하였다. 뒤에 확인이 되지만, 동독지역 금속전자업종 사용자단체에는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었고, 충돌유발 및 정면돌파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2∼3월에 노조와 사용자단체 사이에 두 차례의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사용자단체는 구체적인 협상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노동조합을 도발하는 행동만 계속했다.

이런 와중인 4월 8∼9일에 금속노조 중앙운영위원회는 차기 위원장을 내정하는 사전조정 절차를 거쳤다. 이날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후버가 내정될 것으로 예측했다. 쯔비켈 위원장은 '예스터데이 맨'으로 통하는 페터스에게 금속노조의 핸들을 넘겨주기 싫어했다. 그래서 '자기 사람' 후버를 차기 위원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물밑 작업을 해왔다. 이런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일부 조간신문에서는 후버가 내정된 것으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페터스가 주변의 예상을 뒤엎고 다수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쯔비켈은 중앙운영위원회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월30일 협약 유효기간과 더불어 평화의무 기간이 만료되고, 노동조합은 5월 첫 주부터 경고파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고파업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단체는 협상테이블로 돌아오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금속노조 동독지부 협약위원회는 5월20일 협상결렬을 선포하고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파업은 6월2일부터 시작되었다. 파업 일주일만에 철강업종 사용자단체는 협상테이블로 돌아 왔고, 6월10일 '동독지역 주35시간제'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노동조합 쪽에는 파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이 매우 커졌다. 그러나 철강업종 사용자단체와는 달리 금속전자업종 사용자단체는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그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맞서서 노조는 파업 3주째로 접어드는 6월17일부터 파업전선을 확대하였다. 파업 4주째로 접어드는 6월23일부터는 서독지역에서 파업 원거리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업지역 지사 또는 하청업체들로부터 부품을 조달받지 못한 자동차회사들의 생산라인이 멈추기 시작한 것이다. 6월 23일부터 서독지역 BMW 자동차회사 조립공장이 조업을 중단하였고, 폭스바겐 및 다이믈러-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도 수 일 내로 부품이 조달되지 않으면 조업을 단축 내지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대공장에서 불만 드러내

이 때부터 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고비가 되었다. 서독지역 자동차 산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의 원거리 효과 때문에 임금이 깎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면서 당사자들 및 노조 현장세력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한편, 파업의 직접효과 및 원거리효과 때문에 하루에 3,170대의 자동차 생산이 결손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사용자단체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태였고, 협상을 수 일 내로 타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단계였다.

바로 이 때 금속노조 안에서 전통파와 현대화파 사이의 권력투쟁이 다시 불이 붙었고, 급기야 노-사 대결이 노-노 대결로 전환된다. 6월23일, 그러니까 파업이 4주째로 접어드는 월요일에, 서독지역 오펠 자동차회사 사업장 총평의회 의장 프란쯔가 『디벨트』에 대고 공공연하게 파업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동독지역에서 주35시간제를 요구하는 파업은 처음부터 전혀 노동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나는 이 파업을 즉각 중단하고, 이성적인 협상을 통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에 동독지부 협약위원회 결의문이 지적하듯이, 오펠 공장은 전혀 파업의 원거리효과를 입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쯔는 파업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이 비판은 파업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페터스를 겨냥하고 있었다. 대권문제에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었다. "이제 필경 유르겐 페터스가 클라우스 쯔비켈의 후임자로서 적절한 인물인지에 대한 토론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금속노조 위원장이 되려는 사람은 노조의 피해를 방어할 수 있는 전략과 위기경영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이에 맞서서 파업전선 야전사령관인 동독지부 지부장 뒤벨도 파업현장과 언론에서 반대파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파업전선은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투쟁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펠 자동차회사 사업장 총평의회 의장 클라우스 프란쯔의 발언은 파업 중인 동지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파업의 원거리효과를 전혀 입지 않고 있는 사업장에서 파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파업권역에 속하지 않는 사업장 평의회가 파업전략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프란쯔 동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금속노조 차기 위원장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를 골랐다." 한편, 페터스도 『라이프찌히 민중신문』에 대고 금속노조 일부 간부들의 "기강문란"을 공격하였다. 그는 일부 대공장 사업장평의회가 "대중매체를 상대로 마치 금속노조가 사분오열된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에 분개하였다.

그렇지만 프란쯔를 필두로 한 현대화파의 공개적 비난과 사보타지는, 뒤에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 노동조합의 파업전선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우선 페터스와 뒤벨은 비판의 표적이 된 원거리효과를 축소하기 위하여 전술을 일부 수정, BMW 차륜 조달업체의 파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상 결렬과 '백기 투항'

한 편, 6월23일 금속노조 본부에서 개최된 사업장평의회 연석회의에서 다이믈러-크라이슬러 사업장 총평의회 의장도 페터스와 뒤벨의 파업전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의 핵심은 파업의 원거리효과에 있었다. 몇몇 자동차 부품 사업장들에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파업을 강행함으로써 이 사업장들로부터 부품을 공급받고 있는 서독지역 조립공장들이 조업을 단축 또는 중단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이런 전술은 "협상정치에서 미친 짓"이라는 혹평이 첨가되었다. 바로 이 연석회의가 쯔비켈 위원장에게 전기를 제공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 날부터 쯔비켈은 파업을 직접 관리하고 나선다. 그의 행보는, 뒤에 밝혀지게 되지만, 페터스를 제거하기 위한 걸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6월26일 저녁 금속노조 위원장 쯔비켈과 부위원장 페터스를 한 편으로 하고 연방 금속 사용자단체 의장 칸네기써와 사무총장 부쉬를 다른 한 편으로 하는 최고위급 물밑 교섭이 있었다. 여기서 쌍방은 그 다음 날로 예정된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의견을 타진하고 조정하였다. 쌍방은 원칙적으로 주35시간제를 도입하되, 도입시기 및 도입방식을 유연하게 조정하기로 타협하였다. 그리고 주간 노동시간 조항을 완화하여 사업장별 특수성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독지역 금속전자업종 사용자단체를 쥐고 있는 강경 세력은 연방 사용자단체 의장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충돌노선을 고수하였다. 파업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마당에 후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용자단체가 6월27일 협상테이블에 들고 나온 협상안은 주35시간제 도입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안이었다. 사용자단체는 2005년 4월1일을 기하여 노동시간을 주38시간에서 주37시간으로 단축하되, 협약의 유효기간을 2008년 12월31일까지로 하자고 요구했다. 더 이상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시간을 1시간 단축하는 대가로, 동독지역에 새로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단체협약으로 여러 가지 특전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노동조합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협상은 장장 16시간을 끌었지만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협상 결렬과 더불어 금속노조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파업을 중단할 것인가, 확대할 것인가? 파업의 자발적 중단은 노동조합의 역사적 대패를 의미했다. 그리고 파업 실패는 파업지휘자, 즉 페터스와 뒤벨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리고 페터스의 실패는 그의 반대파들이 볼 때, 페터스의 퇴진을 의미했다. 협상결렬 소식을 듣고 위원장 쯔비켈은 6월30일에 개최될 중앙운영위원회에 파업중단을 제안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뒤에 금속노조 신문이 파업중단 이유를 묻자 쯔비켈은 "노조에게 더 이상 파업을 확대할 힘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정파투쟁

bbak_03.jpg과 연 힘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의지가 없었던가? 아무튼 위원장의 입장은 결정되었고, 같은 날 파업지도부 및 협상위원회는 동독지부 협약위원회에 파업중단을 결의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6월29일 소집된 협약위원회는 파업중단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의문은 단체협상 및 파업 과정을 간략하게 나열한 후, 이어서 파업실패와 내부 정파투쟁 사이의 연관관계를 적시하고 있다.

" 협약위원회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및 작센 권역 금속전자산업의 파업을 질서정연하게 종료하라는 협상위원회 및 파업지도부의 권고를 따르기로 결의한다. … 파업의 마지막 주에는 서독지역 몇몇 자동차회사 및 하청업체 사업장들에 파업의 파급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서독지역 사업장들에 대한 이런 원거리효과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파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모든 참가자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던 바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용자들에게 파급효과를 가하는 것이 파업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서독지역 자동차산업 사업장평의회 의장들은 원거리효과를 근거로 금속노조의 행동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금속노조 내부 회의에서라면 이런 논쟁도 수행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파업의 중대한 시기에 외부 대중매체를 통하여 이런 대대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오펠 자동차회사 사업장 총평의회 의장 클라우스 프란쯔의 '파업을 즉각 중단하라'는 발언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이 점은, 오펠 자동차회사가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파업의 파급효과를 입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의 발언은 중대한 시점에 금속노조의 협상위치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이것은 파업 중인 동독지역 금속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면서 클라우스 쯔비켈의 후임자에 대한 금속노조의 대권논쟁을 재연시키는 짓임에 분명하다 …."(협약위원회 6월 29일 결의문)

파업 실패가 공식 선언되면서부터 금속노조 내부 권력투쟁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현대화주의자들은 페터스가 중앙운영위원회의 결정을 위반하고 무리한 파업전술을 구사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본래 중앙운영위원회는 파업의 원거리효과를 피하기 위하여 유연한 파업전술을 채택, 사업장별로 돌아가면서 단기간 파업하기로 결의했는데, 페터스가 이 결의를 무시하고 자동차 부품 사업장들에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파업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독지역의 자동차 조립공장들이 조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파업실패의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맞서서 전통주의자들은, 현대화주의자들이 대권문제를 뒤늦게 역전시키기 위하여 파업동지들을 팔아먹으면서 "무자비한 반연대 행위"를 자행했고, 바로 여기에 파업 실패의 원인이 있다고 반박했다. 정파투쟁을 위하여 파업을 도구화했다는 주장이다.

모두가 패배자

파 업 실패 이후 신문과 텔레비전은 하루도 빠짐 없이 금속노조 간부들의 얼굴로 얼룩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감정이 뒤섞인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즉흥적 묘안들이 백출하고 있다. 제3의 위원장 후보들이 거론되고 있고, 거론된 후보들이 황급히 사양 또는 해명하는 모습이 뒤따르고 있다. 청년조합원 모임은 나이 든 간부들의 작태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실망한 평조합원들은 조합을 탈퇴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진흙탕 싸움은 사용자단체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연방 금속 사용자단체는 협상이 결렬된 것이 "유감스럽다"는 위로조의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사용자단체 의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노동조합을 저 지경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하고 동정하였다.

7월10일,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집된 금속노조 중앙운영위원회에서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고, 양 정파 사이의 골만 깊어졌다. 이 자리에서 쯔비켈 위원장은 페터스에게 파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차기 위원장 내정자 자격을 사퇴하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맞서서 페터스는 사퇴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후버는 페터스와 런닝메이트로 출마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위원장 후보로 출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중앙운영위원들이 총사퇴하고 정기총회를 앞당겨 개최하자는 제안은 부결되었다. 마지막으로 쯔비켈은, 만약 페터스가 파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 후보직을 사퇴한다면, 자신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위원장직을 내놓겠다고 제안하였다. 그의 임기는 아직 세 달 남아 있다. 그러나 페터스의 결심은 확고하다.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기총회에서 나의 입장과 견해를 밝힐 기회를 가질 것이다."

파업 실패로 불거진 금속노조의 내부 권력투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7월10일에 결론 없이 헤어졌던 두 정파는 그 뒤 물밑 접촉을 통해서 정기총회를 오는 8월 30∼31일로 앞당겨 개최하기로 겨우 합의를 보았다. 이 총회에서 다음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권력투쟁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일단락 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벌써 분명하게 확정된 일이 있다. 어느 정파가 대권을 잡든, 싸움이 끝나고 나면 승리자는 없고 패배자만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독일 금속노조의 역사책은 2003년 난에 이중의 "역사적 패배"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패배는 사용자들에 대한 역사적 패배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적 패배이다. 역사적 파업 실패가 역사적 정파투쟁의 계기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 정파투쟁이 역사적 파업 실패의 이유로 되었는가? 이 질문에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 이번 패배가 이중의 역사적 패배라는 사실을 지워버리지 못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