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노동운동의 새로운 발전

노동사회

20세기 노동운동의 새로운 발전

admin 0 6,922 2013.05.11 10:51

20세기 초에는 자본주의 생산이 거대하게 성장하고, 자본이 높은 수준으로 집적(集積)됨에 따라 독점자본이 지배력이 날로 커지게 됩니다. 선진 공업국가의 거대 자본들이 전세계를 주무르게 된 것이죠. 국제적인 독점체들의 성장에 발맞춰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몇 개의 권역으로 분할하면서, 세계적 차원의 영토 분할이 완료됩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세계 분할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 수출이었죠.

세 계 경제와 지구 영토의 분할은 끊임없는 재분할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군국주의를 부추깁니다. 군국주의의 강화는 거대 이윤의 취득과 세계 재분할을 위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다른 한편으로 군국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거센 저항을 누르고 민족해방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어요.

독점자본의 강화와 노동자계급의 성장

gskim_01_3.jpg20 세기 초의 세계는 사회적 폭발과 격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특유의 불균등한 발전이 한계에 다다랐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도 심해졌습니다. 국지적인 충돌이 잇달아 벌어졌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세계적인 폭발이 일어납니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사실상 ‘문명’ 국가들이 오랜 동안 준비해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노동자계급을 고통과 재앙으로 몰아넣었고,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모순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한편으로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확대·강화시켰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양적인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의 기본 세력은 산업노동자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농업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무관리직 같은 지식 노동자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강화시켰고, 노동조건의 개선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8시간 노동제, 주휴제, 유급휴가제였어요. 이와 더불어 노동자들은 여성노동과 아동동의 제한, 임금 체불과 무원칙한 임금공제의 금지를 쟁취했고, 몇몇 나라에서는 사회보장 법률을 채택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사회·경제적 성장은 노동자들의 욕구도 증대시켰습니다. 도시가 빠르게 발달함에 따라 사회 생활의 리듬도 빨라졌고, 노동자들의 생활 상태와 인간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욕구도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소비재 가격의 인상, 노동의 집약화, 실업이 노동자들의 생활을 압박했고, 군비경쟁에 따른 군사비 증가로 인해 세금 부담이 커졌죠.

이 런 상황에서 대중적 노동운동은 사회적 민주주의 요구와 결합하게 됩니다. 1905∼1907년 러시아에서 혁명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영국, 벨기에, 스웨덴, 미국 등에서는 큰 규모의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또, 독일에서는 혁명 전야를 방불케 하는 정세가 조성되었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계급 대결이 첨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확대되었고,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노동운동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노동운동 내부에 소부르주아지, 노동귀족, 노동관료 등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기회주의 풍조가 조금씩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상황에서는 노동운동 안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본의 양보, 노동자계급 상층 포섭, 노동귀족과 노동관료들을 위한 특권의 창출, 자본주의 발전에서 ‘평화적’ 시기의 특유한 조건 등이 노동운동 안에 기회주의 경향을 키운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혁명주의 사상도 발전하게 됩니다.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 같은 양상으로 20세기 들어 레닌주의가 노동운동의 전략과 전술 면에서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gskim_02_3.jpg1차 러시아 혁명

1905 년 1월22일 러시아 제국(帝國)의 수도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러시아 전제군주(차리즘)의 폭정을 철폐하고 정의를 실현하라는 순박한 주장을 내세우며 노동자 14만 명이 벌인 시위가 군인들의 총격을 받은 것입니다. 1천여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러한 잔혹한 범죄 행위는 민중의 분노를 거세게 폭발시켰고, 혁명을 초래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차리즘은 지주들이 대토지를 소유토록 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주요한 기반이었어요.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 무권리 상태에서 고통받았습니다. 차리즘은 반(半)봉건적 토지소유 형태를 지지하면서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는 정치적 압박을 가해 자본주의의 질적 발전을 제약했고, 한편으로는 대국주의적인 정복정책으로 자본주의의 양적 확대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려 했습니다.

차리즘은 임금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난폭하고 잔혹한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자본측이 큰 폭의 초과이윤을 취득할 수 있도록 보장했죠. 또 반동적인 민족-식민지 정책은 러시아 내의 많은 민족들의 증오와 항의를 불러일으켰어요. 이렇게 사회 모순과 계급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경제공황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여기에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지게 되면서 낡고 부패한 차리즘의 무능력이 드러나게 되었죠. 이런 시대적 조건 속에서 노동운동이 급격히 고양되고 민중의 민주주의적 요구가 폭넓게 분출되었습니다. 혁명적 정세가 조성된 것이죠. 이것을 제1차 러시아 혁명이라 부릅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계급을 최대의 정치세력으로 부각시켰고, 민중의 지도역량으로 성장시켰습니다.

하 지만,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노동자계급이 민중의 힘을 전제에 반대하는 항쟁으로 결집시키지 못했고 노동자, 농민, 병사, 민주적 지식층이 벌인 투쟁들, 그리고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 스스로도 단결력과 조직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죠. 혁명기간 동안 러시아 노동자들은 정치적·조직적으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잠재 역량을 행동으로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분열이 커지기도 했고, 자연발생적 성격을 가진 노동자 투쟁의 한계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차리즘을 지지한 데다 1905년 일본과 강화가 체결되고 러시아의 자유주의 세력이 혁명에 등을 돌림으로써 반혁명이 힘을 얻게 됩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차리즘은 살아남게 되고, 혁명은 실패하게 됩니다.

비록 혁명은 패배했지만, 러시아 노동운동과 국제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제1차 러시아 혁명이 갖는 의의는 큽니다. 차리즘의 전제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고, 지주와 자본가의 반민중적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계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역사적인 교훈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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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를 벌이는 독일 노동자 ]

노동자계급 투쟁의 고양

1905∼1907년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고양되었어요. 러시아 혁명이 각국의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독점자본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공격이 격화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고양은 나라별로 다양하게 진행되지만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입니다. 투쟁 참가자의 범위가 전에 비해 훨씬 확대되었고, 새로운 노동자층의 노동운동 참여가 활발해졌습니다. 또, 노동자들의 요구도 다양해졌고, 투쟁의 강도도 커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구를 넘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이 노동자 투쟁의 중심 영역으로 떠올랐습니다. 파업, 시위, 집회, 선거 등 다양한 전술이 투쟁에 활용되었고, 경우에 따라 대중적 정치파업이 감행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커지고 조직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정당과 노동자조직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혁명적 조류가 강화되었습니다.

독일

gskim_04_3.jpg1905 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총파업과 12월 무장봉기의 영향을 받아서 독일에서는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은 정치적 권리 확대, 프로이센과 작센 등의 지역에 존재하던 반민주적인 3단계 선거제도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지도한 이 투쟁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주민들이 참가했습니다. 각지에서 집회가 열렸고, 대중집회는 종종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906년 1월에는 독일 최초의 대중적 정치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함부르크 의회가 사회민주당을 약화시킬 요량으로 노동자의 선거권을 제한하려 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함부르크 지역의 노동자들은 격렬한 항의집회를 열었고, 모두 8만 명 가량이 참가한 정치적 파업을 전개했죠. 이런 가운데 가두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경찰과 유혈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항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수색, 체포, 고소, 처벌이 행해졌습니다. 집회가 금지되고 무력탄압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06년 1월 21일이 되자 독일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대중시위, 정치집회를 조직해 러시아 혁명 1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같은 해 봄이 되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 격화되었고, 1906년 한 해 동안 파업에 참가한 독일의 노동자 수는 3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

프랑스 노동자들의 투쟁도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의 성격이 짙습니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경제적인 요구가 정치적인 요구와 결합되는 경우가 많았죠. 롱위 지역 금속노동자들은 1905년 6월부터 몇 개월 동안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위해 브레스트, 세르부르, 토오론, 로시포르 지역의 병기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1906년 3월 파 드 카레 지역과 노르 지역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해 광원 수백 명이 사망하자, 광산노동자와 금속노동자들이 파업을 조직하고 8시간 노동제, 정치 활동과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파업은 52일 동안 계속되었고, 메이데이 기간에는 8시간 노동일을 요구하는 투쟁과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1906년 수도 파리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메이데이 때 절정에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2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가했습니다. 당황한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파업을 깨뜨렸죠. 파업지도부에 대한 대량 검거가 이뤄졌고, 노동조합이 8시간 노동제 요구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

이 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권 확보와 메이데이 행사 개최, 그리고 공장 안에 노동자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05∼1906년에 걸쳐 이탈리아 북부의 공업도시 토리노의 기계공장, 화학공장, 자동차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05년 봄에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권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전개했고, 1907년 5일 동안 진행된 철도 파업은 국유철도에서 파업을 금지한 특별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해 결행된 것이었어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강한 항의투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런 투쟁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미국

미 국의 노동자들도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노동·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힘든 투쟁들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1903년 시작된 최저임금 보장과 8시간 노동일을 요구했던 콜로라도 지역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1904년 말에 노동조합 지도부의 배신행위로 사실상 깨졌고, 이후에는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05년 무렵에는 새로운 전투적 노동조합 조직인 세계산업별노동조합(IWW)이 출현했습니다. IWW는 노조관료인 곰퍼스 일파의 극단적인 반동과 부패에 대한 저항으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IWW는 국가와 자본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고, 네바다 주의 골드필즈에서는 기업주가 IWW 조직을 해체하고 조합원들을 미국노동총연맹(AFL)에 가입하도록 독려한 것에 항의해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기업주가 채용한 폭력단의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파업이 일어난 지역에 연방군이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업을 깨뜨리진 못했고, 노동자들은 조직을 보존하면서 최저임금 보장과 8시간노동제를 쟁취해냅니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공격은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중동부 유럽

1905년 들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에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개됩니다. 이 시기의 파업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민주주의 운동과 합류했습니다.

1905 년 5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는 금속노동자 3만 명이 6주 동안이나 파업을 벌였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부다페스트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 보장을 요구하며 대중적 정치파업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10월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보통·평등·직접 선거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향한 오스트리아 민중들의 투쟁은 한달 넘게 계속되었고, 11월2일에는 빈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경찰과 군인들의 공격으로 유혈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투쟁은 1905년 10∼11월에 일어난 철도파업과 더불어 진행되었지만 정부의 공권력 동원과 자본가의 공세,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온건 노선 등으로 투쟁의 예봉이 꺾이고 맙니다.

하 지만, 노동자 민중의 대중적인 민주주의 운동은 지배 권력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1907년 1월26일 황제 프란시스 요셉은 보통·평등 선거권과 비밀투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의회선거법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노동자들은 자유와 권리를 향한 투쟁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습니다.

gskim_05_2.jpg전쟁반대 투쟁

이 상에서 살펴본 각국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알 수 있듯, 1905∼1907년 사이 노동운동의 특징은 파업투쟁의 고양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파업건수, 참가자 수,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또한 파업 형태도 격렬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임금인상과 노동일의 단축, 그리고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들이 빈발했고, 그 양상은 매우 공세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파업의 결과를 놓고 보아도 노동자의 승리로 마무리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많은 나라들에서 1905∼1907년 기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규모 투쟁을 특징으로 했고, 그 형태와 방법은 준법투쟁에서부터 태업, 연좌농성, 집회, 시위, 방화, 파괴행위, 무기고 탈취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는 임금 인상과 노동생활 조건의 개선 같은 경제적인 요구에서 출발해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권리의 확보 등의 정치적인 요구를 포괄했으며, 나아가 군국주의 반대, 제국주의 전쟁 저지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국가권력과 지배세력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노동자계급 운동을 발전시키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준비하는 데 귀중한 발판이 되었습니다.(다음 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