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이 나서야 한다

노동사회

진보정당이 나서야 한다

admin 0 4,004 2013.05.11 10:48

지난 10월10일 노무현 대통령은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에스케이 비자금 수수의혹 사건을 비롯해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총선 전후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즉각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다시 13일 '2004년도 예산안 제출에 즈음한 시정연설'을 통해 야당들의 제안을 수용, 12월15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자신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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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서 열린 에이펙(APEC)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태국 전통의상을 입고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출처: 청와대 ]

수구 정당과 언론 장벽 넘지 못해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거나 또는 중간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제기한 적이 있다. 지난 9월초 한나라당이 김두관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면서 "노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방법이 마땅치 않아 반성을 촉구하는 차원에서 김 장관을 선택한 것"이라며 "김 장관 해임안은 노 대통령 6개월에 대한 중간평가"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민주당도 9월29일 노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자,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배신행위"로 규정하면서 대통령이 "역사와 국민 앞에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재신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지도가 30%대에 머물던 시점에서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주장한 국민투표를 통한 자신의 재신임을 묻는 방법을 택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수구세력에 의해 '탄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도 아니고,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노 대통령이 철옹성 같은 수구 정당과 수구 언론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다른 방식으로는 대선 때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지지를 다시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성정치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강한 열망에 의해 당선되었다. 대선 이전 우리 사회에는 신자유주의와 대미종속이 초래한 온갖 모순과 병폐로 대다수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기성정당과 정치인들은 지역감정과 연고주의, 권위주의, 정치부패로 특징지을 수 있는 3김 정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조직기반은 약했으나 다른 정치인에 비해 지역감정과 부패로부터 훨씬 자유롭고,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도전적인 인물로 인식되었기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사모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 등 비교적 개혁성향이 강한 층으로부터의 높은 지지율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혁 실종이 지지 세력의 약화로 이어져

그런데 노 대통령은 대선 이후 이들의 기대를 하나씩 저버리기 시작했다. 미선 효순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고, 한미관계의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촛불시위의 자제를 요청했고, 명분도 실리도 없는 미국의 침공을 도와주기 위한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논란이 많았던 새만금 간척사업과 위도의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등을 강행하였으며, 아파트 등 부동산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노 대통령은 또한 경제위기의 주범인 재벌에 대해서는 협력적이면서도 신자유주의의 고통을 전담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오히려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로 한미간 힘관계, 남북관계, 경제성장의 필요성 등과 같은 현실적인 여건을 거론하기도 하고, 거대야당의 발목잡기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노 대통령의 주장을 자신의 약한 의지나 부족한 지도력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 인식하였을 뿐이다. 지지자들을 실망시킨 것은 비단 정책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었다. 많은 국민들이 가장 심각한 정치문제로 생각하던 정치부패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온 것도 자신의 지지자들을 실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노 대통령은 중요한 정책과 관행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지지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수구정치인들로부터 '부당한' 압력과 공격을 받아도 이를 두둔하거나 지원해주는 세력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주도권을 잡은 대통령과 통합신당

ytjung_02_1.jpg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으로 적어도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이 당분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정치개혁도 부분적으로 추진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국회와 당내에서 취약한 기반을 가진 노무현 정부는 한나라당과 민주당내 보수파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정치개혁을 포함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측근의 비리나 자신의 부족한 리더십과 약한 의지가 책잡혀 야당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으로 노 대통령은 일거에 수세에서 벗어나 정국 주도권을 잡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야당들이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안은 국민의 의사와 요구를 국가 정책결정 과정에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정당과 언론, 특히 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회를 우회하여 대통령이 직접 국민과 대면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야당은 국회의 다수 의견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이 제도를 당연히 반대했어야 한다. 그러나 야당들은 발표 직후 하나같이 이 제안을 환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은 취임 초기의 70%대에서 6개월 사이 30%대로 낮아져서 재신임을 받지 못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신임 국민투표 발표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하겠다는 응답이 불신임 하겠다는 응답보다 많이 나오자 야당은 태도를 돌변,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안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제안했던 것을 거둬들이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야당은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전에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비리 의혹부터 우선 규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대통령 측근의 추가 비리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노 대통령이 국민투표를 제안한 '저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심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여기에 덧붙여 야당은 '말 바꾸기'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당리당략에 눈먼 정당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정치개혁을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추진할 의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선거 완전공영제 등 정치개혁 관련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11월말까지 확정하는 것에 합의했다. 

국민투표, 국면전환용에 불과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은 이전의 지지자들을 재결집하고 통합신당의 입지를 강화시키는데도 일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자, 그간 흩어져 있던 노사모 회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국민투표 제안을 발표한 직후 노사모에 친필을 보내고, 통합신당은 '네티즌 비상시국 대토론회'를 개최하여 노사모의 지지와 지원을 유도하였다. 이에 노사모에서는 재신임 지지를 넘어 '노무현 대통령 살리기 운동'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른 한편, 정치개혁의 제도권내 주도세력으로 여겨졌으나 지금까지 이렇다할 성과를 이뤄내지 못한 통합신당의 입지가 강화되고 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의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듯한 태도가 국민들에게 그간 노 정권의 개혁 부진과 혼선에 대한 책임이 발목잡기에 급급했던 야당 탓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인식이 '여당'인 통합신당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은 본질적으로 국면전환용 대중요법이며, 그 효과는 일시적일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초기의 70%대에서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이 있기 전에는 30%대로 떨어진 근본 요인은 측근의 비리의혹 보다는 대선 때 약속한 공약들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지 못했거나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국민투표 제안으로 지지자들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지만, 노 대통령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바람직한 정책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국민투표 제안으로 불리해진 여론 때문에 야당이 일시적으로 정치개혁에 협조적이겠지만, 현재 문제되고 있거나 의혹이 제기된 비리가 밝혀질 경우,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은 개혁의 명분을 상당히 상실할 것이다. 

정책의 한계, 리더쉽의 부족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은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의 잘못된 정책 방향과 리더십 부족이다. 우선 정책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경제정책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그것도 영미식 자본주의를 정착시키는데 맞춰져 있다. 예를 들면, 재벌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로 소액주주권리, 사외이사제도와 외부감사제, 증권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제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자본시장에 의해 경영진을 감시하고 책임을 묻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많은 기업조직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영미식 자본주의 하에서는 가격경쟁력에 기초한 단기 이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중장기적인 투자를 필요로 하는 기술과 인적자본의 개발에 대한 투자를 꺼려하고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 기업이 국제시장에서 밀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낮은 기술력과 대립적 노사관계인 점을 감안할 때, 영미식 자본주의제도는 우리에게 맞지 않다. 다시 말하면,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비정규직이나 고용불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며, 기술경쟁력 제고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세계화를 전제로 하는 자본시장에 의한 경영자 감시와 견제는 환차손이나 주식거래차액을 노리는 외국 투기자본의 한국시장 지배를 초래할 것이다. 

대외정책의 방향도 잘못되어 있다. '한미관계의 수평적 관계 정립'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와 동시에 한미동맹의 강화를 추구함으로써, 지난 4월과 얼마 전 이라크 파병 결정이나 용산기지 이전 비용 전담 등에서 나타났듯이 실질적으로는 대미종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노 대통령은 리더십이 부족하다. 정부와 통합신당 내에는 종속적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와는 상충되는 정책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혼재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정책 결정이 토론에서 나온 제안이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자유토론일 경우 오히려 민주주의를 가장한 권위주의가 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리더십 스타일은 국무위원과 참모에 대해서는 물론 여당의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충분한 시간과 토론을 거쳐 결정하겠다던 2차 이라크 파병결정은 노 대통령의 정책 한계와 동시에 리더십의 문제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리더십의 역할은 다양하고 때로는 상충하는 의견과 이해관계를 그 사회에 가장 적합한 중장기적인 비전에 맞게 통합하는 일이다. 노 대통령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진보정당이 나서야

바로 이런 이유에서 노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 강화하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몫은 우리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광범한 비정규직, 부동산투기와 사행심, 탈법비리, 점차로 부실해지는 공교육, 심화되는 빈부격차 등)의 근원이 '3김 정치'가 남긴 유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종속적 신자유주의가 강제하고 있는 각종 제도 탓이 더 크다. 따라서 노 대통령과 통합신당의 지지기반을 강화시킨다고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문제를 오히려 복잡하고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 또는 사회적 약자가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굳게 뭉치는 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