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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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권하는 사회

admin 0 2,911 2013.05.11 10:48

6월 들어 갑자기 강도·납치·살인 등 흉악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마치 유행이나 된 듯이 흉악 범죄는 확대일로에 있다.

6월4일 20대 강도 2명이 8세 여아 납치, 부모로부터 5,000만원 받고 풀어 줘(인천)
6월6일 미술학원 선생(23세)이 여자 원생 납치 구속(인천)
6월10일 2인조 납치 강도, 여대생 납치, 부모로부터 1억 원을 받았으나 살해(서울)
6월14일 카드 빚 이유, 중소기업체 사장 납치하려한 김모씨 구속(부산),
같은 날 카드 빚 갚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회사 창고 턴 이모씨 구속(대전)
6월15일 카드 빚 이유, 가족살해 20대 검거(부천)
6월16일 카드 빚 갚기 위해 친누나 상대 강도짓 20대 2명 구속(포항)
같은 날 카드 빚 20대, 음란 셀프카메라 테이프 판매하려다 구속(서울)
6월18일 서울 강남 대상 부녀자 성폭행, 강도 행각 6인조 떼강도 적발.
6월19일 빚 갚기 위해 채무자의 아들 납치 20대 2명 구속


6 월 초중순 두 주 동안 신문지면에 오르내린 사건만 해도 벌써 열 건이 넘는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과거지사의 일이 되었고, 공권력은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사회로 바뀐 것만 같다. 마치 비 온 뒤 죽순처럼 터져 나오는 이러한 엽기적인 사건들 때문에 시민들, 특히 딸을 가진 부모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공권력을 원망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언론들은 방치된 사회불안과 공권력 실종을 일제히 질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한탄부터 “공권력의 확립과 법질서의 회복”을 주장하는 소리까지 다양한 분석과 처방이 쏟아졌다. 이에 질세라 6월16일에는 경찰과 검찰이 민생침해 폭력조직 근절을 위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통령도 관계 장관들에게 조직폭력 등의 범죄를 뿌리뽑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범죄와의 전쟁을 외치고 캠페인을 하는 것을 되풀이한다고 해서 흉악범죄가 근절되겠는가에 있다.

납치와 살인이 판치는 사회

아 니나 다를까,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야 할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 중에서 납치 행각에 나서는 자가 발생해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있다. 경찰이 감추기 위해 쉬쉬하다가 밝혀진 이 사건을 보면, 피의자를 심문하던 경찰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자 이 강도가 자신이 돈 많은 브로커들을 잘 안다며 같이 한탕할 것을 권했고, 이에 마음이 혹한 경찰이 함께 납치 행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죄와 전쟁을 벌여야 할 경찰마저 강도가 되어 한탕을 노릴 정도가 되었으니, 공권력의 회복만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는 애시당초 그른 듯 하다.

한편으로는 범죄의 주범은 소외에 있다며 심리학적 대응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똑같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가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무시당하고 학대받은 과거의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다. 이들은 적개심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며, 좌절과 실패를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탓으로 돌린다고 한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는 자신과 달리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자신이 갖고 싶었던 것을 가진 자에게 더욱더 큰 적개심을 품게 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극도의 흥분상태에 이르렀을 때 살인으로 폭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사람을 정신과에서는 ‘반사회성인격장애’라는 진단명을 사용해 분류하고 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만 하지만, 이들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한 피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고립감과 좌절감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고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 이런 끔찍한 일을 줄이는데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소외를 감싸안자는 이러한 입장은 공권력의 엄정한 집행만을 강조하는 주장보다 더 인도주의적인 것으로 들린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입각한 대응방안들에 고개가 끄덕거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는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심리가 문제라면 왜 갑자기 어제가 아닌 오늘 흉악범죄가 늘어나는 지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도덕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지금 눈앞에 있는 흉악범죄들이 당장 해결될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처방은 공권력과 인간성 회복?

문 제의 근본적 원인은 공권력의 실추나 심리적 요인 같은 것들에 있다기보다는, 범죄를 권하는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의 흉악범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두 가지 키워드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카드 빚이고, 다른 하나는 강남이다. 바로 여기에 최근의 범죄 폭증을 이해할 수 있는 기호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기사 가운데 범죄 동기가 카드 빚 때문인 경우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왜 지금 카드 빚을 갚기 위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가?

그 핵심은 최근 카드사들이 카드 대불한도 등을 줄여나가면서 빚을 내 빚을 갚는 이른 바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수가 급증하고, 신용카드사의 수익이 적자투성이로 바뀌게 되면서 신용카드사들이 공격적으로 빚 갚기를 독촉하고 있다. 제 때 카드 대금을 납부하지 않아 독촉전화를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빠르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빚 갚기를 독촉하면서, 차압이니, 회사에 알리겠다느니, 보증인에게 알리겠다느니 하는 협박을 매일매일 해대는 그 상황에서의 피 말리는 느낌을. 독촉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비정규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애꿎은 욕들은 체납자들과 마찬가지로 박봉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 여성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매일매일을 빚 독촉에 시달리는 이들은 어쨌든 빚을 갚고자 한다. 빚을 못 갚으면 사창가에 팔려가기도 하고, 신체포기 각서도 써야 하는 세상 아닌가?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회사나 가족에 알려지면 사회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거나,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경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차피 망가진 인생, 막가는 수밖에 없다.

친누나의 결혼자금을 강탈해서라도, 아니면 옆집 돈 많은 중소기업 사장의 금고를 뜯어서라도, 자신의 회사 창고를 털어서라도. 간이 큰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선다. ‘돈 많고 물 좋은’ 강남에서 여대생이라도 납치해 돈을 받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살인까지 저지른다.

신용불량자의 사회

올 들어 신용불량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5월 말 현재, 개인 신용불량자는 전월에 비해 67,517명(2.19%)이 증가한 3,153,535명을 기록해 매달 계속되고 있는 사상 최다 행진을 지속했다. 매달 십 만 명씩 늘고 있는 신용불량자는 연말이 되면 3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전체 경제활동인구 2천2백5십만 중 15%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셈이다. 전체 국민의 15%가 파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신용카드 연체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4월 말 집계의 경우, 전월대비 1년 이상 카드론 장기연체 39.04%, 3개월 이상 카드론 연체 12.97%의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사들이 카드의 대출한도를 줄이면서 빚을 내 빚을 갚는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진 이후 신용불량자 수가 급증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선은 지난 외환위기 극복 이후 은행과 금융권의 자금이 생산적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금융권이 앞다퉈 가계대출을 확대해 소비 거품을 키웠던 상황과 관련이 깊다.

1999 년 이후 정부는 신용카드 시장의 규제완화·활성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야말로 규제는 악이며 시장은 모든 것이 선이었다. 특히 카드사들은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신용카드를 발급하였다. 삼성 등 재벌계열 카드사들이 놀이터 무료 입장권 등 다양한 혜택을 미끼로 급격하게 카드 회원을 늘려나갔다. 한 동안은 잘 굴러갔다. 신용이 늘어난 시민들은 카드 빚으로 가계의 적자를 메우고, 이 카드가 적자면 저 카드로 돌려 막으면서 생활을 해나갔다. 반면에 카드사들은 돈방석에 올랐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수 조원씩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연말이면 카드사 노동자들도 1천%대에 육박하는 보너스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빚더미로 만들어낸 경제 회복

카 드 빚을 낸 이들이 제대로 직장을 잡고 임금을 벌고 수익을 올렸다면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는 ‘20 대 80’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사회로 바뀌었다. 돈 있는 자가 돈을 벌고, 없는 이는 계속 돈을 까먹는 사회로 바뀌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고, 청년은 졸업을 해도 취직자리가 나오지 않고, 그나마 취직을 하더라도 열악한 조건의 비정규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취직하기 위해서는 없어도 있는 척 명품을 걸쳐야 하고 카드 빚은 쌓여만 간다. 경제는 이렇게 늘어난 소비 때문에 성장했다. 과거의 높은 경제성장률이 기업부문의 과도한 투자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면, IMF위기 이후 경제는 투자보다는 가계의 소비를 늘려 성장해왔다. 경제성장의 밑받침이 된 소비는 빚으로 가능했고, 거품은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돌 려막기가 불가능해진 지난 해 말부터 대출한도가 줄어들자, 빈곤층들은 신용불량자로 추락했다. 더불어 카드사들도 올 1/4분기에만 4천억 원이 넘는 순손실을 기록하고, 관련사들의 주가는 폭락했다. 급기야 무려 89조에 달하는 막대한 카드채는 붕괴 일보직전에 놓였다. 지난 4월 긴급자금 5조원을 수혈하고 자본금을 4조원이나 늘였으나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위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편으로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을 구제해줄 제도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워크아웃 제도가 신설되었다 하나 제대로 빚 갚을 능력이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해당사항이 없다. 2002년 11월에서 올 3월까지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제도를 신청했지만, 채무조정이 된 사람은 1,057명에 불과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돈에 굶주린 시장경제 사회에는 3백만 명이 넘는 신용불량자를 구제해줄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비록 이 역시 한계가 많지만, 정부가 올 2월에 입법 청원한 “채무자 희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안” 역시 아직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미국식 시장경제라고?

지 난 1/4분기 경제성장률은 3.7% 기록했지만 실질국민총소득은 1.8%나 감소했다고 한다. 또한 총저축률이 26%로 총투자율 26.1%를 밑돌았다. 누구는 부동산 투기와 빚 소비로 늘어난 경제성장이 한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경제부총리는 3.7%의 성장은 중국 다음가는 높은 경제성장률이라고 자화자찬했다지만, 경제는 성장하나 국민소득이 감소되는 성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이제 ‘빚 권하는 사회’를 지나 ‘살인과 납치를 권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낮은 실업률은 높은 비정규직과 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며, 통계로 비교하면 미국의 열악한 비정규직은 유럽의 실업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나아가 높은 범죄율로 인해 감방에 수감된 이들을 실업자로 분류하면, 실제 미국의 실업률은 훨씬 높아진다고.

“미 국식이 최고”라는 세상이 되었는지라, 흉악범의 증가와 높은 수감율도 미국식이라고 즐거워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황당한 세상이다. 미국의 부자촌은 이제 공권력이 아니라 사설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다. 하나의 국가 안에서 빈자와 부자가 공간적으로 나눠지고 있다. 강남에서는 더 이상 경찰에 기댈 수 없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설 경호보안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도 부자와 빈자를 공간적으로 갈라놓는 사회 분단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가난한 이들을 상대로 고리대 놀이를 즐기던 금융기관들은 역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난한 이들 때문에 위기에 몰려있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은 가난한 이의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뽑아내는 흡혈귀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뿐이다. 마치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유태상인 샤일록처럼 말이다. 드라큐라에게 물린 이들은 그 스스로도 드라큐라, 흡혈귀가 된다. 흉악범죄의 급증이 돈에 혈안이 된 드라큐라에 물려 드라큐라가 된 이들의 행각이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칠까?

범죄자가 사회의 희생자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인죄에 중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다면, 이렇게 살인과 납치 같은 범죄를 권하는 이 사회에는 무엇을 선고해야 하는가? 또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작자들은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