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합법화와 68운동

노동사회

노동운동의 합법화와 68운동

admin 0 5,278 2013.05.11 10:45

현대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가치의 다양화라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새로운 현실은 기성세대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 어느 샌가 이것은 곧 세계적 현상으로 표출되게 되었다. 흔히 68운동으로 불리던 세계적 현상은 이탈리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68운동의 노동운동사적 의미

현대 국가라고 하지만 1960년대까지 이탈리아에는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봉건성이 남부를 비롯한 지역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카톨릭 전통과 농업사회 특유의 보수적 사고가 사회의 전반적 기조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가정과 학교, 교회와 일터 등에서 68운동의 세찬 파고에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변화의 흐름 가운데서도 ‘4P’로 지칭되던 상징적 부분에서 그 변화와 갈등의 폭은 컸다. Padre(빠드레; 아버지), Prete(쁘레떼; 신부), Partito(빠르띠또; 정당), Padrone(빠드로네; 주인)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4P'는 당시 사회와 정치 변화의 흐름과 대상이 어떠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68운동은 가정에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 교회에서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 현실정치의 주역이었던 기존 정당들에 대한 불신과 정치에 대한 의식변화, 일터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 전체의 변화는 노동운동과 노동계의 지형을 바꿔놓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전통적 상하관계, 아니 지배와 복종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던 과거의 노사관계가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로 진일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특히 기존의 노동자 대표성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노조의 기본방향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를 요구하며 설립된 CUB(Comitati Unitari di Base; 하층통합위원회)는 기존 노조 활동의 재고와 함께 근본적인 전략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런 결과로 기존의 노동조합은 공장평의회(Consigli di fabbrica)를 조직하여 일반 노동자들의 대표성 문제와 조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종전의 내부위원회(Comissioni interne)를 대체하는 공장평의회는 각각의 분야와 직종 및 직급 등을 기준으로 직접 뽑힌 노조원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안또니오 그람쉬의 사상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결국 1969년 12월 당시 최대의 노동조합인 CGIL은 공장평의회를 내부위원회를 대체하는 공식 노조의 합법적인 대표기구로 인정하였다. 이듬해 다시 공장평의회는 금속노조의 전체 대의원회에서 노조의 하부구조로 승인 받음으로써 노동운동 조직의 신기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68운동 과정에서 노동부문 변화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것은 CUB이었다. 68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 중순경, 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밀라노와 베네찌아의 마르게라 항구 등의 대도시에서 먼저 조직되었던 이 조직은 이후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결성되었다. CUB는 당시 CGIL, CISL, UIL 3대 노총이 지닌 근본적 문제제기에는 성공했지만, 조직이 지녀야 할 항구성과 전략 부재에 따른 한계를 노출하였다. 다시 말해 학생운동과 연계하여 사회적 변화를 요구한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노동운동 본래의 전술과 조직에서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3개의 기존 노총은 자신의 한계를 재빨리 깨닫고 기존의 내부위원회를 공장평의회로 신속하게 교체함으로써 기층노동자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담아내고 노동운동 안에서의 영역을 사수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CUB는 기층노동자들의 정서를 직접 담아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하지만, 조직 차원의 한계와 사업장 자치경영이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되어 68운동이 끝나면서 결국 노동운동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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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뜨거운 가을' 당시 시위를 벌이는 이탈리아 청년들 ]

뜨거운 가을

68 운동 과정에서 노동 분야와 관련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1969년 가을에 발생한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일 것이다. ‘뜨거운 가을’은 69년 가을 금속노동자들의 계약 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동쟁의와 파업사태가 전국으로 번져 노동자 대 사용자라는 큰 틀에서 대결국면을 보였던 68운동의 귀결적 사건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고 당장 원한다”는 모토가 말해 주듯이 노동계 전반의 근본적 문제제기와 그 해결을 요구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분열되어 있던 CGIL, CISL, UIL의 3대 노총은 기층 노동자들의 변화 요구에 단호한 결정을 내렸고, 이는 모든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1969년 6월 CISL 산하 금속노조연맹인 Fim의 대의원 총회에서 제기된 《자본주의 체계의 수정》 논제는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68운동이 제기하였던 근본적 요구가 결국 노동계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당시 이탈리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의문을 제기하는 68운동의 상징적 목표를 보여주었다.

삐에레 가르니띠(Pierre Carniti), 브루노 뜨렌띤(Bruno Trentin), 죠르죠 벤베누또(Giorgio Benvenuto)가 이끄는 3대 노총 산하의 금속연맹은 전국 규모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8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시작된 이 투쟁은 노동자의 도시인 또리노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또리노에 본부를 두고 있던 피아트(Fiat)사는 몇 달간 지속된 파업이 끝나자 3만5천명의 노동자들을 정직시켰다. 이는 당시 발생한 파업사태와 상황을 단지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해고와 정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협상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

그 러나 금속노조의 요구조건과 사용자가 수용하겠다는 제안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당시 금속노동자측에서 제시한 주요 제안들은, △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비율(15%~17%)로 임금을 인상, △ 주당노동시간을 현 42시간에서 40시간으로 축소, △ 노동자와 사무직 사이의 임금과 규정을 평등하게 설정, △ 공장 내에서의 유급 집회 권리를 보장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산업경영자협회(Confindustria)는 거부의사를 밝혔고, 노동자들은 또리노에서 10만 명이 모여 파업을 시작하였다. 집회와 파업은 곧바로 나폴리, 제노바, 브레시아, 피렌체, 볼로냐, 베네찌아로 확산되었다.

계속된 파업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사회경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단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집회와 파업 주제의 범위가 직접적인 노동문제 이외에도 대표적인 복지정책인 주택과 의료, 과세 문제까지로 확대되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은 11월과 12월까지 이어졌고, 11월28일에는 1만5천명의 노동자가 로마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는 당시까지의 이탈리아 노동운동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회일 만큼 상징성이 컸다. 집회는 12월12일 아볼라(Avola)로 이어졌고, 집회가 유혈사태로 번져 수십 명이 사망하고 다치는 상황이 발생했다. 12월14일에는 유혈사태의 희생자 장례식이 개최되었고, 결국 정부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12 월19일, 노조는 먼저 Confapi(이탈리아 중소기업연합)와 합의를 체결하였고, 이후에 산업경영자협회와 극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날 합의된 주요 내용은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하며, 일정 시간의 유급집회 허용 등이었다. 4개월의 기나긴 파업과 집회는 이탈리아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하고 전환점이 될만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듬해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자 지위에 관한 법률은 모든 노동분야에서 노동자들이 파업과 집회 및 노조활동의 권리를 부여한 법안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 법률로 인해 공장 안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그리고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가 재정립될 수 있었으며, 68운동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수동적 계층으로 인식되던 노동자가 능동적 존재로서, 사회변혁과 진보의 주요 주체로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노동자 지위에 관한 법률

아볼라(Avola)의 대학살 이후 노동부장관이었던 사회당의 쟈꼬모 브로돌리니(Giacomo Brodolini)는 노동자 지위와 권리에 관한 포괄적 개념을 담은 법안을 입안하였다. 그것은 사용자에 비해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노조 활동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념비적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1969년부터 1970년 초까지 15개월이 넘는 토론을 거쳐 완성되었다. 1970년 5월1일 노동절을 기념하여 공포된 이 법안으로 모든 노동자가 권리와 함께 그에 합당한 지위를 법률로써 보장받게 되었고, 이는 모든 노동분야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행해질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되었다.

입법 과정 중간에 브로돌리니 장관이 죽고, 도나 까딘(Donat-Cattin)이 취임하여 통과된 까닭에 도나까띤법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이 법안은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수많은 에피소드와 어려움을 간직한 법안이었다. 또한 사용자의 압제 행위를 반대하고 제한하는 내용과 노동 3권이 적법하게 모든 노동 장소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 법안으로 인해 1948년 이후 분열었던 세 노총이 전후 처음으로 노동절 행사를 공동으로 할 만큼 커다란 상징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의 기본권이 사용자로부터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면, 과거 사용자의 권한이었던 집회 허용권이나, 집회 참가를 위한 유급휴가권 등의 기본 권리들이 노동자와 노조에 돌아갔다. 둘째로 사용자측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사용했던 노동자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훼손하는 조치들(직장 내에 감시기구를 설치하거나 몸을 수색한다거나 징계권을 남용하고 노동자를 차별하는 인권유린 행위 등)을 현격하게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노동자의 권리를 노동자에게 귀속시키면서 노조의 합법성과 대표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물론 개개의 노동자 모두에게 그 대표성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포괄적인 개념에서 지역과 생산단위를 기준으로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는 조직에게 그 합법성과 대표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국가가 법률로써 노조활동을 보장하고 보호한다는 원칙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전에는 소규모 공장이나 기업(보통 15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는 대표성을 획득하기 어려웠지만, 지역과 생산단위를 기준으로 대표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개개의 노동자가 단위 조직에 가입하면 어느 정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근거로 활용되었고, 실제로 70년대에는 이와 같은 유연한 해석이 사업장과 쟁의 과정에서 많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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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CGIL·CISL·UIL 연합회의 ]

강력해진 노조와 조직

1969 년 ‘뜨거운 가을’을 겪고 얻은 1970년 5월1일의 노동자 지위에 관한 법률은 이전의 노동자 권리와 노조활동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한 변화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은 무엇보다 CGIL, CISL, UIL로 나누어져 있던 노동조직에 대한 기층노동자들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었다. 1970년 가을 피렌체에서 통합 논의를 위한 회의가 처음으로 개최되면서 보다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통합 움직임은 ‘뜨거운 가을’을 이끌었던 3개의 금속노동연맹(CGIL 산하 금속연맹 FIOM, CISL 산하의 FIM, UIL 산하의 UILM)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3개의 노총은 국내정치 역학관계뿐만이 아니라 국제 정황과도 연결된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통합의 걸림돌은 이와 같은 내외부 관계들의 복합문제였다. CGIL은 안으로는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연계되어 있었고, 밖으로는 세계노동총동맹(WFTU)에 가입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CISL과 UIL은 기민당, 사회당, 사민당과 관계를 맺고 국제자유노련(ICFTU)에 가입하고 있었다. 이는 통합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소속 국제연맹으로부터 탈퇴 및 각 정파들과의 합의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민당은 노동조직의 통합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혔다. 이는  CISL 내에서 많은 반대와 연정파트너였던 사민당 계열의 UIL 지도부들의 부정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반대와 부정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1972년 초에 세 노동조합(CGIL, CISL, UIL) 간에 합의된 ‘연맹협정’때문이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정 기간 3개 노조조직에 대한 기득권과 조직 인정, 둘째 통합조직의 지분에 대한 상호균등 원칙 적용, 셋째 단위노조 사이에도 동일한 형태의 연합조직을 구성하며, 단체협상이나 노동권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결국 통합과정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통합연맹(Federazione unitaria)이라는 조직체가 건설되었다. 통합연맹은 이탈리아 노동운동사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통합조직이었고, 향후 이탈리아 노동세력의 조직강화와 세력확장에 공헌하게 되는 역사적 분기점이라 할 수 있었다. 1948년 이후 사용자와 국가에게 예속되어 있던 노동자의 관계와 지위가 68년과 69년의 투쟁을 거치면서 상당히 개선된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고, 여기에 기층노동자의 조직에 대한 변혁과 혁신 요구까지 받아들여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새로운 전환기에 이르게 되었다.

개개의 노동자 지위와 조직의 통합은 모든 노동자들이 직간접으로 노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는 곧바로 노조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역량 강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통합연맹은 이탈리아 사회에서 정당과 카톨릭 세력들과 거의 동등한 힘을 가진 하나의 공식 세력으로 인정받았고, 이와 같은 정황은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조는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국가 경제의 중추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이는 집권 기민당의 세력약화와 야당이던 좌파 세력, 즉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정치 세력이 보다 강력해 질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그 러나 각론 차원에서 노동자와 관련된 정당이나 야당의 정치적 세력 확장은 노조운동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오는 역설적 상황을 낳았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전통적으로 정치와 다소 분리된 채,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수평적 분리 관계가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정당 우위의 세력재편으로 전환함으로써 수평적 협력관계가 다소 종속적인 수직관계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 조와 정당간의 관계변화는 1980년대 중반이후 경제가 침체하자 노동자에게 불리하도록 국가 정책과 방향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실제로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하는 국면에서 노조의 사회적 영향력과 위상은 하락하게 되었다.

임금연동제와 변화된 노조전략

1970 년대와 80년대를 가르는 이 시기는 이탈리아 노동운동과 노조활동이 강력하고 왕성했던 시기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침체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노조는 유럽에서도 보기 드물게 강력한 조직을 구축하면서 계급적 차원에 국한되었던 운동의 흐름과 방향을 사회 계층과 국민 차원으로 확장하였다. 이러한 외형적 발전과 확장의 요인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육체 노동자 중심의 노조운동이 외연 확장과 함께 전문직종과 중견간부들이 또 다른 중심의 한 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전문직이나 엔지니어 또는 중견간부들을 일컫는데, 이탈리아어로 꽈드리 quadri 라고 칭한다). 두 번째는 공공부문 노조활동의 강화와 자율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이 등장하였다. 세 번째는 대기업 일변도의 노동운동 흐름이 중소기업 부문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이는 중소기업이 경제 발전의 주축으로 자리잡게 된 결과였다.

새로운 시기의 도래와 함께 노동운동의 목표와 전략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동이 행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활동의 자유가 법률적으로 보장되면서 사무직과의 임금 격차나 불평등한 지위는 많이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노조가 전략적으로 가장 먼저 내세웠던 사항은 임금에 대한 것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임금관련 전략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지수연동제(흔히 Scale mobile이라고 하는데 물가에 따라 임금이 변동하는 시스템을 말한다)와 임금보조기금이다.

지수연동제(또는 임금연동제라고 칭하기도 한다)는 직급이나 직위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임금이 생계비 상승에 따라 자동으로 조정되는 임금결정 시스템을 말한다. 1975년에 합의된 임금연동제는 여러 면에서 노동자들의 임금,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획기적인 보장책이었다. 주로 3개월마다 임금이 물가인상률에 맞추어 자동 조정되었고,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인플레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의 위험에서 벗어나 임금이 실제로는 인상되는 효과를 가져오게끔 했다.

임금연동제가 정치와 경제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당시 노동자 정당이었던 공산당은 이 제도를 상당히 지지하고 있었으며, 사용자연합이었던 Confindustria와의 적극적 중재노력을 통해 이 제도가 노동정책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대립관계이자 다소 지배적인 관계였던 사용자집단과 노동자들이 동등하게 협의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향후 노동운동에도 많은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이후 제정되는 노동관계법안이 사용자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정당을 매개로 사회적 협의를 도출하는 전통을 낳았다.

긍정적 효과를 가졌던 임금연동제가 이탈리아 경제 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노동자들이나 노조들은 임금연동제에 따라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도 상대적인 임금보전 또는 임금인상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으며, 불평등한 사회적 부의 재분배라는 사회보장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한편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임금연동제의 본래 기능을 단순히 임금보전이나 임금상승에 국한시킴으로써 임금연동제의 기능에 대해 의심하게 했다. 또한 국가 경제의 해악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 국내외의 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정부뿐만 아니라 사용자단체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공동체의 회원국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임금연동제를 둘러싸고 국가 위기사태까지 몰고 왔지만, 새로운 법안을 도입하여 문제가 되었던 ‘퇴직보상’에 관한 임금연동제가 다시 실시됨으로써 국민투표까지 제안되었던 위기는 해소되었다.

1975년은 세계적으로 석유위기가 경제의 암초로 다가왔고 경기침체와 실업률이 문제가 되었던 해였다. 이탈리아 역시 경기침체의 조짐을 보였지만 경제구조가 이미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후퇴가 심각해지면서 국가차원의 대책이 마련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임금보조기금의 창설과 실행이었다. 1977년 발효된 이 법안에 따르면 신규 노동자를 채용할 경우 기금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노조나 사용자측은 기본적인 노사문제에 이 기금을 이용하였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경기침체는 이탈리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쳐 거시경제의 측면에서 노사관계와 임금정책 등이 새로운 하강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이는 곧 노조의 부유화와 귀족화 경향과 함께 1980년대 중반 이후 노조운동이 침체기에 들어서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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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집회 ]

자율노조의 출현과 침체국면의 노동운동     

이 탈리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자율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1960년대 초반 이후 획일적이고 대량생산 중심의 미국적 생산방식과 관련해 노동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되면서이다(이에 대하여 한국에 소개된 책으로는 『이탈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세르지오 볼로냐, 안또니오 네그리 저, 이원형 편역, 갈무리, 1997., 『디오니소스의 노동 I』, 안또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이원영 역, 갈무리, 2000. 등이 있다). 특히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기술혁신이라는 문제가 논쟁의 쟁점이 되면서 이탈리아 자율주의 철학은 시작되었다. 자율주의의 출발점은 안또니오 그람쉬가 제공한 바가 크다. 자율주의 철학자들은 안또니오 그람쉬가 1929년 미국 대공황을 관찰하고 쓴 「미국주의와 포드주의」란 글에서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관계와 계급과 생산관계 사이의 주체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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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네그리
1974 년 세르지오 볼로냐와 함께 출간한 『위기의 노동자 조직』으로 노동계의 이목을 받았던 자율주의 철학의 창시자이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정치범으로 선고받아 수감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현재 파리 8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디오니소스의 노동』, 『자유의 새로운 공간』 등이 있다.

세르지오 볼로냐
역 사학자이자 철학자로 1970년대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이자 조직가이다. 자율주의 철학 잡지 『쁘리모 마죠(5월1일; Primo Maggio)』를 창간하고 편집자를 역임했다. 노동운동에 관한 글을 여러 편 발표했으며, 특히 유명한 논문 「이탈리아의 계급 구성과 당 체제」를 써서 세계 이론가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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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세르지오 볼로냐(Sergio Bologna) 등이 시작한 이탈리아 자율주의 철학의 핵심은 2차 대전 이후 국가의 생산관계와 사회관계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빠져있던 주체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자율적으로 사회의 주체로 자리잡았으며, 사회투쟁이나 활동분야에서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움직임은 세계적으로 하나의 운동으로까지 평가받았던 ‘68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학교에서는 학생이, 가정에서는 주부가, 일터에서는 노동자가, 문화·예술계에서는 지식인과 예술가가 주체로 등장하여 조직과 운동의 자율적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운동에는 자율적으로 주체가 될 수 있는 세력이 있으며, 노동자 역시 생산관계에서 주체로서 조직하고 운동한다는 것이 이 철학의 요점이다.

자 율주의 운동의 여파는 컸다. 좌파 진영은 자율주의를 지나친 혁명주의적 경향이라 비난하거나 소아병적 마르크시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쏟아 부었다. 이 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인 안또니오 네그리는 1979년 알도모로 수상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은 이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꺼지지 않는 논쟁을 제공하고 있으며,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 지위를 국가 법률에 반영시킬 만큼 상당히 긍정적 영향을 미쳤고,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의 주체로 등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파장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자율주의 운동이 노동계에 미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중반이후 시작된 경기침체는 국가적으로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이것은 집권여당이었던 기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게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특히 1975년 총선 이후 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야당들은 경제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임금교섭이 자제되었고 임금연동제의 축소는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 지형의 변화를 토대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지형이 구축되었다.

흔히 3자 협약이라 불리는 전통이 시작된 1983년부터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노조가 협상 테이블을 마주하고 노동관련 문제에 대한 3자간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제안자였던 노동부장관의 이름을 붙여 스꼬띠(Scotti) 협약이라 불리는 이 협약은 향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하였다. 노조는 정치적 개입을 공식화하였고, 국가 경제의 조화로운 3주체의 합의 전통을 이끌어 내었으며, 이탈리아 산업계가 노·사·정 3자가 맞물리면서 돌아가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3자 협약은 경제적 합의 도출이나 거시경제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는 반면, 노동운동과 노조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후퇴이자 향후 조직의 축소와 운동 침체를 수반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전까지 노사관계의 일방적 국가개입은 거의 없었지만, 3자 협약을 통하여 공식적인 국가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1984년 단체교섭의 규제사항들이 법적으로 규제대상이 되는 법안 - 흔히 성 발렌띠노 날에 입안되었다해서 성 발렌띠노 법령으로 불리운다 - 이 제안되어 국회를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컸다. 노동조직이 위축되고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의식이 희박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던 이 법안으로 3개의 노조는 정치적 성향을 분명하게 달리하였으며, 계층과 직종에 따른 새로운 노동조직이 출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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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CGIL 전국총회 ]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