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체제, 부정만 할 것인가

노동사회

WTO 체제, 부정만 할 것인가

admin 0 3,555 2013.05.11 10:44

지난 9월10∼14일까지 멕시코의 칸쿤 (Canc n)에서 개최된 제5차 WTO 각료회의가 결렬됨으로써 2001년 제4차 도하(Doha) 각료회의에서 제시된 도하개발 의제의 완수를 위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향후 세계무역질서의 불확실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이러한 무역환경은 국내총생산의 70% 가량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번 회의 실패의 이유는 1996년 제1차 싱가포르 각료회의에서 협상 의제로 합의되었던 △ 무역 원활화, △ 정부조달의 투명성, △ 다자간 투자협정 및 다자간 경쟁협정 등의 소위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합의 실패로 알려졌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농업협정, 특히 농업보조금 감축을 둘러싼 G-22국가들(브라질, 인도, 중국 등의 농산물 수출 개발도상국들)과 미국·유럽연합 사이의 의견 대립이라고 평가된다. 결국 이번 각료회의의 실패는 카타르 도하회의 이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잠재되었던 갈등이 촉발한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농업분야에서는 각종 보조금 감축 등의 계속된 개혁을 지지하지만, 농업의 비교역성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진행하여야 한다는 점과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는 4가지 의제 모두에 대해 협상을 출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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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개막식에서 수파차이 WTO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

칸쿤 회의 실패 이유

이번 칸쿤회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번 회의에서 1947년 GATT성립 이후 잠재해 있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갈등이 '무역과 개발'이라는 주제를 배경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번 칸쿤회의는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 및 중국을 중심으로 다수 아프리카 국가들이 결성한 개도국 G-22 연합세력이 미국과 유럽연합에 대항하여 WTO 의사결정에 실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특히 브라질과 인도의 영향력과 역할 증대는 향후 WTO의 진로를 두고 개도국의 위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이러한 개도국의 부상과 관련해서 795개 시민단체들(NGOs)의 칸쿤회의 참여도 WTO 체제의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며, 시민단체와 관련 회원국 사이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제연대도 주목할 점이다.

둘째 WTO의 관할권이 확대된 1995년 이후, 잠재되어 왔던 '합의제'(consensus: 안건에 대해 투표가 아닌 전원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에 의한 WTO 의사결정의 효율성 여부이다. 사실 148개 WTO 회원국들이 상품(GATT), 서비스(GATS) 및 지적재산권(TRIPS)의 방대한 영역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현재와 같이 합의제를 따른다는 것은 무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와 관련하여 반도체의 수입관세부터 투자 조건까지 관할하려는 WTO의 방대한 관할권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셋째는 농업협상, 특히 보조금 문제와 관련된 줄다리기다. 사실상 2001년 도하회의 당시 일정부분 합의된 것처럼 보였던 농산물 보조금 삭감 합의가 유럽연합의 신농업정책안을 통한 지연 전술과 미국이 지난해 통과시킨 농가법과 같은 왜곡 전술로 인해 도하회의 이전으로 후퇴했다는 평가도 가능할 만큼 농산물 보조금 문제는 큰 갈등 요인이 되었다. 

2002년 기준으로 OECD 국가내의 연간 농업 보조금은 2,350억 달러로, 이것은 총농가 수입의 31%에 해당하고, 농산물 가격을 기준으로 보면 OECD 국가내의 보조금에 의한 농산물 가격은 다른 지역 가격보다 평균 31%가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왜곡된 생산구조는 개도국 지역 농민을 희생시키는 한편, 식량 안보의 장애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내의 공산물 생산자의 입장은 더 이상 농업정책이 세계무역질서를 왜곡시키고 자유무역의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반발도 강한 만큼, 농산물 협상과 기타 분야의 빅딜 가능성은 상존한다.

WTO 체제가 불리하기만 한 것인가

넷째는 '지적재산권 협정'(TRIPS)상의 TRIPS와 공중보건 문제이다. 이는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AIDS나 기타 풍토병 치료제 등의 기초의약품이 TRIPS하의 약품 특허권의 요건 때문에 해당 지역 환자들이 구입하기가 불가능한 비싼 가격으로 유통되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약품특허권의 실시 요건을 완화하려는 논의가 2001년부터 활발해졌지만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막강한 로비로 최종 타결에 진통을 거듭해 오다가, 결국 지난 8월말 한시적인 조치로 기초의약품의 생산요건을 완화함으로서 관련 논란을 어느 정도 잠재웠다.
다섯째는 자유무역협정(FTA: 회원국간에는 무역장벽을 제거하나 비회원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역장벽을 지속하는 것)을 포함하는 쌍무적 형태의 지역통합조약과 다자간 체계인 WTO 사이의 긴장 관계가 향후 세계무역질서의 중요한 요인이 될 전망이다. 

이는 특히 미국이 향후 무역협상에서 지역통합조약을 다자간 체계인 WTO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음을 천명함으로써 향후 무역질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 미 무역대표부 대표의 칸쿤회의 종결 기자회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만일 WTO상의 다자간 무역 협상이 여의치 않으면 FTA 등의 쌍무 또는 기타 지역간 무역 협상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러한 쌍무적 접근방식은 WTO와 같은 다자간 방식보다는 우리에게는 불리할 것이다.

WTO 전면 부정?

수출이 우리 경제개발에 기여하는 비중이 54%나 되고, 세계 192개국 중 148개국(현재 최종적인 가입절차가 진행중인 캄보디아와 네팔 포함)이 WTO에 가입하고 있는 현실에서 WTO와 무관한 무역활동은 상상하기 힘들고 현실성도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서비스시장 개방, 특히 교육시장이나 농산물시장 개방과 관련해서 WTO 유해론이 제기되는 것은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WTO 전면부정론은 대외용의 정치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다음으로 안타깝게도 현재 신자유주의적 세계무역의 틀은 여러 분야가 동시에 상호작용 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 WTO 체제는, 예를 들어 쌀에 대해서는 시장 개방을 하지 않고 자동차에 대해서만 시장개방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쌀시장 개방 없이는 자동차 시장에서의 무역 이익을 누리기 힘든 소위 일괄타결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농산물 시장개방에 대해서는 의무면제(waiver)를 받고 공산품 시장에서는 다른 나라와 시장개방의 이익을 누린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령 우리가 어떤 농산물 수출에 국제경쟁력이 있다고 할 때, 농산물 시장은 열지 않고 공산품 시장에 대해서만 개방하려는 국가와는 주고 받기식의 거래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선발 개발도상국의 위치에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유사한 이해관계를 갖는 다른 개도국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 등과 같이 개도국그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들의 협상 역량이나 전략 분석을 통해 미국이나 유럽연합과의 향후 협상에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관련국가들의 시민단체와의 유대 강화도 중요한 안건이 될 것이다.

브라질·남아공과의 연대 필요

다른 중요한 쟁점중의 하나는 농업협상과 관련한 한국의 개도국 지위 유지 문제이다. 개도국 지위는 회원국 스스로의 선언에 따르는 것이 지금까지의 GATT/WTO의 관행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도국 지위에 대한 논란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현재의 협상 추세는 따라서 분야별(상품, 서비스 또는 지적재산권) 또는 하부 분야별(예를 들면 상품시장 내 농산물 시장) 구체적인 개도국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상품시장의 일환으로서의 농산물 협상에서 한국의 개도국 지위라는 방식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분야별 대응책이 요구된다. 

농산물 협상의 경우는 더욱 세분화되어 구체적인 농산물 품목(예를 들면 한국의 쌀)을 '특별품목'으로 설정하여 이 품목들에 대해서는 회원국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시장개방의 제한을 인정하는 방식까지 나타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현재 100% 이상의 고관세 부과 농산물(146개 품목)중 향후 협상에서 특별품목으로 설정이 필요하거나 가능한 것과 기타의 것을 분류하여 협상에 대비함으로써 농산물 시장 개방의 반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적재산권과 관련해서는 최근 고가의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신약 개발의 성공과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적 성공 등에서 보듯이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우리에게 유리한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WTO 협상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최근 '무선인터넷 플랫폼'(WIPI)을 중심으로 한미간에 전개되는 분쟁을 보더라도, 고부가가치의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통상분쟁에의 효과적 대응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FTA를 포함하는 지역통합협정에 대한 여러 측면의 대비가 필요하다. 현재 한-칠레 FTA 비준 문제나 일본 및 미국과의 FTA 체결 논의를 보면 FTA가 갖는 무역 창조효과와 무역 교란효과에 대한 충분한 경제적 분석이 결여된 채, 도미노 효과식의 심리적 부분이 강조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향후 미국의 쌍무협상을 통한 다양한 통상압력에 대응할 수 있는 다자간 체계를 통한 논리적, 제도적 대비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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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각지에서 모인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이번 회의를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  - 출처:참세상 ]

통상정책의 비판적 참여 필요

칸쿤회의에서 쟁점이 되었던 중요 통상이슈들은 기업가보다는 노동자나 농어민 계층에 보다 민감한 이슈들이다. 또한 그 이슈 간에도 관련 계층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고 심지어는 대립되기도 하기 때문에 통일된 노선을 전개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관련 정책의 결정에 직접당사자의 입장이 가능한 많이 반영되어야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정치에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통상정책 이해당사자의 노력이 긴요하다. 예를 들어, 항상 논란이 되고 있는 농산물 협상의 경우도 농민의 이익을 직접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형성된다면 정책결정이나 집행과정에서 최대한 농민의 이익을 배려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현 정부의 통상정책에 대한 비판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국제무역 환경 자체가 복잡하고 다각화 되어 가는 현실에서 통상정책이 어느 한 측면만을 고려하기는 힘든 여건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운동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