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드라마, 무거운 영화

노동사회

가벼운 드라마, 무거운 영화

admin 0 3,300 2013.05.11 10:42

 


bsson_01_0.jpg변사체로 발견된 미모의 20대 여성, 정치권 실세, 총기 살인 등 대부분의 선정적 소재가 한데 어우러진 실록 드라마 한편이 방영 직전, 돌연 그 내용과 성격을 바꿔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SBS, 새 드라마 “애정만세”, ‘정인숙 사건’ 다루지 않을 듯

1970년대 정권 최고위층이 관련된 추문인 ‘정인숙 사건’을 다룰 예정이었던 서울방송의 새 주말 연속극 “애정만세”가 최근 드라마 방향을 ‘70년대의 낭만’을 중심으로 두고 묘사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디어전문 비평지인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SBS 프로덕션 성준기 PD는 “지금까지 세 차례 시놉시스를 작성했는데, 처음에는 정인숙 사건을 모티브로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었다”며 “작가가 직접 미국까지 다녀오는 등 나름대로 정씨 사건과 관련해 깊이 취재를 했지만 드라마를 통해 미화할 만큼 일대기가 아름답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의 연출자인 성 PD가 밝힌 정인숙을 드라마 소재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다른 SBS의 드라마를 염두에 두면 왠지 빈약해 보인다.

이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 “태양의 남쪽”은 주인공을 배신한 친구가 주인공을 감옥에 보낸 후 친구의 여자친구를 성폭행 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고 처절한 복수와 불륜을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서울방송의 사극 “왕의 여자”는 임금과 세자가 한 궁녀를 놓고 벌이는 부자간의 애정행각을 중심에 놓고 있다.

당초 “애정만세”는 고급요정 마담이면서 정·재계에 두루 발이 넓었던 실존인물 정인숙을 극중 여자 주인공인 ‘지선’(이태란 분)으로 그리며 1960~70년대 우리사회 상류층의 부패와 청년문화의 태동기를 그릴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았었다.

고급 요정인 선운각 마담이었던 정인숙은 1970년 3월 중순에 서울 강변에서 두 발의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이 된 후 지금까지 호사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당시 친오빠가 살인범으로 지목됐으나, 진실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또 당시 세 살로 지금은 30대 후반에 접어든 그녀의 아들에 대해서는 친아버지가 누구냐가 시중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에서 어느 정도 수위까지 ‘정인숙’과 그녀의 ‘남자들’이 암시될 지 궁금하다.

bsson_02_0.jpg영화 “선택”, 양심과 의리에 대한 보고서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사상은 위험할 수 있으니 감옥에서 45년 동안 독방생활을 하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지금부터 45년을 감옥에서 보내면 2048년, 21세기의 중간쯤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인기배우 이병헌과 이영애는 78살이 되어 있을 것이고, 가수 보아는 63세로 “가요무대”를 주름 잡고 있을지 모른다. 국민타자 이승엽은 배가 좀 나왔겠지만 공손한 미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원로 야구인으로 대접을 받고 있을 테고.

문제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서 ‘비극’이라고 부르기도 내키지 않은 이런 황당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 사연이 한국의 ‘켄 로치’(영국의 사회주의자 감독)로 불리는 홍기선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선택”.

이 영화는 김선명 씨가 공산주의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950년대에 감옥에 들어가 45년을 살다가 나온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대 총각이 ‘합죽이’ 김희갑 군이 희극배우로 사랑 받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감옥에 들어가서 70살이 넘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 할아버지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 영화가 “선택”이라는 제목을 가지게 된 이유는 김선명 씨가 전향서 한 장만 쓰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양심의 선택에 의해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향서를 쓰는 것을 강요하면서, 대한민국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다양한 고문과 인격모독으로 그를 유린했지만 끝내 그의 정신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자유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자유는 감옥 안에 있었다”는 주인공의 대사는 인간이 얼마나 숭고하고 자신의 의지를 지킬 수 있는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신의 선택은?

이 영화의 주연 배우인 김중기 씨는 실제로 1980년대 운동권의 ‘거물급’으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힌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선택”에서 어두운 시대를 관통한 자신의 체험을 몸으로 연기하는 감동을 준다.

또 죄수로 출연한 배우 중에는 아무도 장기수에 관심을 갖지 않던 때, 김선명 씨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독립영화인 김태일 감독도 숨어있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 ‘배우 겸 감독’이 실제 상황을 찍어둔 것으로 남자 관객들도 손수건이 필요할 만큼 슬프고 감동적이다. (아마 찍고 있던 김 감독도 울었을 것 같다!)

만약 “노동운동을 하면 45년간 감옥에 있어야 하고 탈퇴서 한 장만 내면 아무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개인의 이익이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겨우 종이 한 장과 잠깐의 ‘양심불량’이 괴로워 45년간의 감옥 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결정이다.

하지만 “선택”은 그 기로에서 양심과 의리를 선택했던 한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족: 김선명 씨의 장기수 동료 중에는 정식재판도 받지 않고 40여 년을 감옥에 ‘감금’됐던 사람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