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교섭·의료 공공성·‘무파업’

노동사회

산별교섭·의료 공공성·‘무파업’

admin 0 2,720 2013.05.11 10:39

2003 병원 투쟁이 작년에 이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작년에는 가톨릭중앙의료원, 경희의료원, 제주한라병원에서 2백일 넘는 장기파업으로, 올해는 파업 없는 조용한(?) 타결이 노동계의 관심을 끌었다. 교섭돌입지부 116개중 쟁의조정신청을 낸 지부가 51개로 작년 94개 지부에 비해 현저히 줄었고, 쟁의돌입도 작년 21개 지부에서 동국대, 진주한일, 광명성애, 새양산병원등 4개 지부로 격감했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병원이 파업에 들어가지 않고 잘 타결되어서 다행이라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파업을 무조건 사회혼란 내지는 사회악으로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씁쓸했지만 필자는 이번 기회에 모두가(?) 바라는 ‘파업 없는 원만한 타결’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 더불어 ‘산별교섭 진전’, ‘의료 공공성 전면 제기’의 특징을 갖는 보건의료노조 2003 임단투를 함께 돌아보고자 한다.

외형적으로 드러난 ‘무파업 타결’과 ‘산별교섭 진전’, ‘의료 공공성 제기’는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용에서 관련을 갖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후진적 법제도의 개선, 산업별 노사관계 발전, 노조의 사회적 역할 강화가 맞물려 나타난 ‘의미있는 결과’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제도 정비와 성실교섭이 빚어낸 무파업 행진

대다수 병원들이 노조가 주요하게 제기했던 △ 산별교섭을 통한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 △ 의료의 공공성 강화, △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한 적정인력확보, △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합의하면서 파업직전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지난 7월11일 지방공사의료원 26개가 파업전야에 극적으로 타결된 것을 시작으로 16일에는 서울대, 이대, 고대 등 주요 대학병원들이 파업직전 원만히 타결되었다. 한양대의료원의 경우에는 노조결성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과 외부의 조정 없이 노사 자율 교섭으로 타결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작년 홍역을 치렀던 경희의료원과 가톨릭 중앙의료원도 노사 현안문제를 대다수 타결하면서 교섭을 마무리지었다.

매년 반복되는 파업, 2002년 장기파업에서 2003년 무파업 타결로, 이렇게 1년 사이 급격한 변화를 보인 원인이 무엇일까? 그동안 무엇이 바뀌었을까? 필자는 이 변화의 메커니즘을 읽어내는 것이 우리나라 노사관계 발전의 중요한 고리를 이해하는 것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몇 가지 원인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교섭을 둘러싼 제도의 정비이다. 보건의료노조가 매년 파업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던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제도를 개선한 것이 주효했다. 참여정부가 직권중재가 노사 자율 교섭을 막는 파국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직권중재 일방회부 불가방침을 누차 강조하면서 병원 내부에서는 성실교섭과 자율교섭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제도개선이 불법파업을 유도하여 노조를 압박하고 교섭력을 높여 최종타결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기존의 사측 태도를 바꾸도록 만들어 사측의 적극적인 교섭태도를 끌어낼 수 있었다.

둘째, 교섭 주체인 노사정 각각의 노력을 들 수 있다. 노조는 기업별교섭의 잘못된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 산별교섭 실시와 의료 공공성 강화를 내걸면서 새로운 노사관계를 만들어 갈 것을 제기했고, 정부는 직권중재 회부를 엄격히 자제하면서 불법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노사 대화를 통한 자율교섭 타결에 노력하였다.(2002년의 경우 가톨릭 중앙의료원과 경희의료원 파업 현장에 경찰병력이 투입되었지만 파업은 계속 이어졌다) 주무부서인 노동부를 중심으로, 복지부는 의료 공공성 요구에 관하여, 행자부는 지방공사의료원의 복지부 이관에 관하여, 교육부는 대학병원의 주요 쟁점에 관하여 각각 사전 해결과 조정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측은 노사관계 악화가 병원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교훈 아래 직권중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실교섭에 임하면서 노조의 주요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자연스레 투쟁 분위기보다는 대화를 통한 협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원만한 타결에 이르게 되었다.

보건의료노조 2003년 교섭은 그동안 말로만 외치던 노사화합, 구호성 노사관계 개혁보다 현장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의 실질적 노력이 전근대적 노사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부는 요구와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실교섭 메커니즘을 만들고 또 임박해서야 비로소 파업을 막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의 1/10이라도 사전에 투여하면, 사후 약방문식의 노동행정을 극복할 수 있다.

보건의료노조 산별집단교섭 6대 요구
1. 병원 구조조정 공동 평가와 민주적 제도개선,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대정부 요구, 병원 경영투명성 확보
2. 전 병원 노동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동시 실시와 인력 충원
3. 조합활동 관련 손해배상 청구의 제한 및 가압류 금지
4. 임금인상 가이드라인(11%±2%)합의, 최저임금제(총액85만원), 보건의료산업 임금제도 연구위원회 구성
5. 산별교섭 추진 원칙 노사합의와 노사공동실무위원회 구성을 통한 실질적 논의
6. 미국의 침략 전쟁반대 및 인도적 차원에서 이라크에 의약품 지원


대세를 이룬 산별교섭

산별노조 6년차를 맞이하여, 지난 몇 년간에 걸친 산별교섭 투쟁이 올해 상반기를 거치면서 구호성 쟁취를 넘어 세부 교섭방식과 의제를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작년에는 65개, 올해는 75개 병원이 산별교섭을 합의하였다. 교섭진행 지부 116개 지부를 기준으로 볼 때 2002, 2003년에 걸쳐 산별교섭을 합의한 병원은 총 91개 지부(78.4%)이며, 조합원 수로는 30,229명(83.4%)에 달해 산별교섭을 확실한 대세로 만들었다. 최근 파업중인 광명성애, 서울성애병원이 최종 타결과정에서 산별교섭 참가를 추가 합의하여 산별교섭을 합의한 병원 숫자는 총 93개로 늘어났다.

보건의료노조는 작년의 장기파업과 임원 선거로 임투 준비가 늦어져, 4월8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요구안과 교섭방침을 확정하면서 본격적인 임단투에 돌입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올해 산별교섭에서 실질적 진전을 위해 매주 화요일 ‘산별실천의 날’ 투쟁, 5월20~21일 간부 상경투쟁, 6월3일 조합원 10% 상경투쟁, 6월17일 합동대의원대회 등을 진행하면서 7월 총력투쟁을 배수진으로 하고 다양한 대화와 전방위 활동을 전개하였다.

병원협회장 면담을 통해서는 산별집단교섭에서 병원협회의 주도적 역할을 촉구하였다. 산별교섭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4월24일 국회에서의 집단노사간담회와 몇 차례의 산별집단교섭 상견례를 시도했고, 중간에 노사 실무간담회 등이 계속 진행되었다. 올해 6번에 걸친 집단적 노사 만남에 있어 한 번이라도 참석한 병원 숫자는 모두 70여 개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 산별교섭 참가를 합의하고도 최종적으로 불참한 17개 병원장에 대해서는 단협불이행에 대해 고소 투쟁을 전개하였다. 

보건의료노조는 2003년 투쟁에서 산별교섭 투쟁의 개념을 기존의 기업별교섭을 뛰어넘어 대 사용자 산별교섭과 대정부교섭 등 총체적 교섭구조의 확립이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정부교섭과 병원협회, 사용자와의 산별집단교섭을 요구하였다. 대정부교섭에서는 관련부처 장관과 담당 실?국장 면담을 몇 차례 진행하였다. 산별 교섭방식은 현장 노사가 집단적으로 만나는 ‘산별집단교섭’ 방식을 택하되, 병원 사용자들이 교섭에 나와 자체적으로 대표단을 구성하든지, 병원협회에 교섭권을 위임하여 교섭단을 구성하든지 양자택일 하도록 요구하였다. 산별집단교섭의 세부 진행과 관련해서는 사측의 참여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방침을 정한 것은 지난 몇 년의 투쟁 경험을 통해 병원협회의 한계, 정부 역할에 대한 불신, 산별교섭 법제화 가능성의 요원함 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결국 단체협약을 통해 병원 노사간 집단합의로 ‘산별집단교섭’의 경로를 밟아 사용자 대표와 나아가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완전한 산별중앙교섭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국 노사관계의 힘은 현장에 있고 현장에서부터 노사관계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별교섭에 탄력을 준 노사공동성명서

올해 산별교섭 추진에 있어 의미가 큰 사건은 6월10일 45개 병원이 합의한 노사공동성명서 채택이다. 이 산별교섭 합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2002년 산별교섭 추진합의가 지부교섭을 통한 개별 노사간 합의였던 데 비해 2003년 산별교섭 노사공동성명은 집단적 합의로서 산별교섭 추진의 전망을 보다 구체화하였다. 둘째, 지방공사의료원과 민간 중소병원들이 자체적으로 대표를 구성함으로써 산별교섭의 사용자 추진 주체가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산별교섭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 셋째, 2002년 “산별교섭에 참여한다”는 수준의 합의에서 2003년에는 산별교섭 추진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2003년 9월까지 사용자 대표 구성 → 10월부터 본격 논의 → 2004년부터 실질적인 산별교섭 시작)이 합의됨으로써 2004년 산별교섭 추진의 토대가 확고히 마련되었다. 넷째, 몇 차례의 간담회와 상견례를 추진하고, 노사공동성명서에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산별교섭에 대한 사용자들의 우려와 불신을 떨쳐내고 산별교섭이 미룰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대세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전체 보건의료산업 차원에서 교섭구조 변화와 노사관계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로써 1998년 최초로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조직을 전환한 뒤 6년 동안 제대로 된 산별교섭을 하지 못했던 보건의료노조가 2004년에는 산별교섭을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노사공동성명서 채택과 함께 병원협회와 현장 사용자도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먼저 병원협회의 움직임이다. 사용자단체로서 실질적 역할을 해야 될 병원협회는 노조의 요구에 대해 “50억 예산을 가진 조직에게 5천억 예산을 가진 병원장이 도장을 맡기겠느냐?”고 항변했다. 병원협회의 위상과 한계를 함축한 발언이다. 즉, 전국 1,066개 병원급 의료기관을 대표하는 병원협회의 예산이 1년에 50억 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1년 예산이 5천억이 넘는 대학병원들이 교섭권을 넘겨주겠냐는 것이다.

2003 산별집단교섭 노사공동성명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병원은 국민의 건강권 실현을 위한 의료제도 개혁과 병원 노사관계 발전을 위해 아래와 같이 합의하고 성실히 이행한다.
1. 2003년 10월부터 2004년 산별교섭 진행을 위해 노사 대표는 산별교섭 추진 방식 등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2. 상기의 논의를 위해 보건의료노조에 가입된 병원들은 2003년 9월까지 병원측 대표 구성을 진행한다.
2003년 6월 10일 산별집단 상견례 참석 병원 노사 일동
 

달라진 사용자들의 태도

zoo_01_1.jpg병원협회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노조의 ‘노’자도 못 꺼내는 분위기라고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변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노조가 있는 회원 병원을 상대로 산별교섭 참여여부를 묻는 설문조사 실시, 5월2일 정기총회에서 참여정부 노동정책에 대한 특별강연 배치, 산별교섭에 대해 협회도 준비해야 된다는 병원장의 문제제기, 몇 차례에 걸쳐 노사문제를 주제로 인사노무관리자 연수교육과 산별교섭과 주5일제를 안건으로 하는 노사관계 워크숍 개최, 노조의 요구에 의해 5월15일 상임이사회에서 산별교섭 참가와 임원진 간담회를 정식안건으로 상정하여 논의(결과는 부결됨), 병원협회 내에서 노조가 있는 병원, 파업경험이 있는 병원을 중심으로 노사대책위원회 구성, 산별교섭 대책반 구성, 의료기관 산별교섭 전망에 대해 외부 연구 용역을 맡기는 등 이전에 비해 자신의 역할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런 양상은 노조의 투쟁과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병원협회가 법정단체가 되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별 병원들도 어느 해 보다 산별교섭 참여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초기 개별 병원들은 사용자단체 미구성, 집단교섭의 실효성문제, 각 병원별 입장 차이, 여건 미성숙, 준비기간 부족 등을 내세우며 미온적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에는 노사합의에 이르렀다. 상반기 합의 이후 10월에 개최된 노사 간담회에 참석한 어느 대학병원 관계자는 “진퇴양난”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합의했기 때문에 안 나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먼저 나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양상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상반기 합의가 사측이 스스로 합의한 것이 아니라 노조에 이끌려서 억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병원이 먼저 나서서 대표단을 구성하고 조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올해를 경과하면서 이제 지방공사의료원 26개, 중소병원 40개, 특수목적 공공병원 등은 산별교섭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고 있고, 사립대병원 28개는 반쯤 발을 담그기 시작했고, 국립대병원 9개는 여전히 밖에 머물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산별교섭이 진전되는 배경에는 노조의 중앙지도력과 현장의 강력한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장기파업 등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병원 노사관계, 특히 2002년 장기파업의 경험을 보면서 누구나 벼랑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겨났고, 의료시장 개방과 새로운 의료정책 추진 등 급변하는 의료환경에서 병원이 맞이한 어려움과 활로 모색, 주5일제 시행에 따른 사측의 공동대응 등 몇 가지 정세변화가 사측의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의료의 공공성 강화, “돈보다 생명을!” 

상반기 성과를 바탕으로 하반기에 산별교섭 준비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두 축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선 상반기 합의에 기초해서 2004년 산별교섭을 준비하기 위해 10월 중순 노사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고 10월23일에는 노사 대표가 만나 대표단 구성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11월에는 병원 산업발전과 노사관계 진전을 위한 노사 대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산별교섭의 내용 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조직 내부적으로는 산별노조발전전략위원회를 재가동하여 ‘산별교섭방식과 산별협약안’을 준비하기 위해 10월28~29일 산별학교, 11월12~13일 의료공공성학교를 개최하려고 한다. 또한 정책연구사업으로 의료기관 주5일제 시행방안, 의료공공성 강화 방안 등 연구 프로젝트를 외부 전문가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밖으로는 ‘공공연대’ 등과 공공성의 사회 의제화, 대정부 교섭 관련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의약분업투쟁과 의사파업 이후 의료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특히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무상의료’와 ‘의료의 공공성’ 담론이 형성되었다. 공공의료가 10% 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영리중심 의료체계가 더욱 강화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제자유구역법과 의료시장 개방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2003년을 의료 공공성 강화의 전진과 후퇴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판단하였다. 

보건의료노조 내부적으로는 최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와 의료의 공공성 강화투쟁이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당위성 투쟁, 명분성 투쟁, 상층위주 투쟁’에 그쳤고, 구조조정 반대투쟁에 대한 정당성 확보 차원으로만 머물렀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후 보다 힘있는 공공성 투쟁을 위해서는 사회 공공성의 관점에서 보건의료 노동자 자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투쟁 만들기와 병원 특성별로 ‘구체적인 공공성 역할’ 강화를 모색하는 투쟁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하였다.

올해 병원 투쟁의 현장에는 ‘돈보다 생명을’이라는 구호가 몸벽보, 머리띠, 각종 선전물을 통해 휘날렸다. 또, 몇 차례의 정책토론회, 대정부 면담투쟁, 보건의료단체 등과 공대위 구성과 공동투쟁, 환자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전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지방공사의료원에 대해 소관 부처의 복지부 이관과 지역거점 공공병원의 확대 강화 요구와 국립대병원의 전사적자원관리(Enterprise Resource Planning), 다인(多人) 병실 축소, 지정진료제 등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부도폐업 병원의 공공병원화 등의 주장들이 사회쟁점화 되면서 일부는 해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내년 초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임단투 방침을 확정하고 일찍 산별교섭에 돌입하려고 한다. 2004년은 산별교섭, 의료 공공성 강화와 주5일제 도입을 둘러싼 한판 격돌을 예상하면서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사관계 발전과 의료산업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미래를 열어가려고 한다.

중장기 전략과 일관된 추진력이 요구돼 

병원의 산별교섭 진전이 다소 느린 것은 단일업종에도 불구하고 국립대, 사립대, 민간중소병원, 지방공사의료원, 특수목적 공공병원 등 자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내부 차이가 존재하지만, 전국차원의 산별교섭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산별교섭이 구체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하면 연맹 전체가 산별노조로 전환한 것처럼 한 산업 전체가 산별교섭으로 진입하게 되는 새로운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은 8부 능선을 넘어 섰고, 2004년에는 노사합의로 실질적인 진행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미 내용적으로는 노사가 만나 산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2004년에는 올해에 이어 전체 병원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별집단교섭’ 요구를 중심 축으로 하면서, 보조 축으로 병원협회를 상대로 교섭을 추진할 것이다. 여기서 산별교섭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한 관건은 사측 대표단 구성여부, 나아가 사용자단체 구성이다. 사측 대표단이 구성되어있는 지방공사의료원, 중소병원, 공공병원 대표에다가 국립대, 사립대병원 대표를 추가해서 구성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구성되는 사측 대표단은 정식 산별교섭단이라기보다는 산별교섭 추진을 위해 사용자측 의견을 모으는 논의 대표의 성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식 사측 대표단은 이후 노사간 논의과정에서 구성될 것이다.

노조 내부의 준비도 중요하다. 특히 산별협약안 준비가 본격화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산별노조가 이후 어떤 산별교섭을 지향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역이 바로 산별협약안이다. 산별시대에 걸맞은 교섭방식으로의 전환을 위해 사용자에 대한 요구방식을 대대적으로 정비, 질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즉, 기존의 ‘본조 공동요구-지부별 요구’라는 기업별노조 중심 틀에서 산별교섭의 틀인 ‘산별중앙협약’과 ‘산별현장협약’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요구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이므로 민주노총과 노동계의 공동대처가 시급한 사안이다.

내년 투쟁에서 또 하나의 변수는 청구성심병원 등 일부 병원에서 보여주고 있는 부당노동행위와 손배가압류, 노조탄압, 합의사항 불이행 등과 정부의 태도이다. 보건의료노조 투쟁이 내년에도 올해처럼 원만한 타결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다시 파업투쟁의 파고가 높아질지는 사측과 정부가 2002~2003년 투쟁과 협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에 달려있다.

최근 사회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고, 정부의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의 2003년 투쟁을 되돌아보면서 무엇이 한국의 노사관계를 선진화시킬 수 있는지 한번쯤 곱씹어봤으면 좋겠다. 당면한 현안 해결도 중요하지만 노사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사정 모두의 중장기 비전, 전략적 선택, 일관된 추진력이 아쉬운 때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1호